우리나라 어느 고을을 찾아가더라도 심심치 않게 만나볼 수 있는 흔한 볼거리 중의 하나가 소위 ‘비석거리’라고도 부르는 옛날 수령들의 선정비 전시장이다. 통칭하여 선정비(善政碑)라고 일컫기는 하나 맑고 청렴한 덕행으로 백성들을 다스렸다는 ‘청덕선정비’, 영원토록 잊지 않겠다는 ‘영세불망비’ 등등 하나같이 가슴 절절한 사연을 상상하게 만드는 표현들이 비면에 새겨져 있다.

그러한 때문인지는 몰라도 선정비는 오히려 비문과는 반대로 해석돼 한 고을의 우두머리였던 수령들을 가식적이고, 반민중적이며, 가렴주구를 일삼던 존재로 평가하는 관례를 만들어 냈다. 백성들이 권력자들의 강압에 의해 어찌할 수 없이 이 비석들을 세웠을 터이고 백성들의 본심은 정반대의 심정이었으리라고 추측하는 것이 일반적인 중론이라는 말이다. 잘 보아달라고 만들어 놓은 것이 지금에 와서는 오히려 역효과를 내고 있는 셈이다.

그러나 악명이든 미명이든 후대까지 이름이 회자되는 극히 일부의 사람들을 제외하고 우리 스스로 기대하고 있는 만큼 우리는 이 비석의 주인들에 대해 잘 알지 못한다. 만일 선정비의 주인이 무덤에서 일어나 ‘너희들 중 나를 잘 아는 자 있으면 내 비석에 돌을 던지라’고 말한다면 스스럼없이 돌을 던질 수 있는 자가 얼마나 있겠는가. 전국 곳곳에 산재해 있는 선정비군이 한 고을의 유산으로 전해져옴에도 불구하고 그리 커다란 관심이나 평가를 받지 못하는 이유도 이러한 대상에 대한 무지에서 비롯하고 있는 바가 크다.

부평지역에도 계양구에 소재한 부평초등학교 정문 안쪽에 선정비들이 모여 서 있다. 언젠가 그 비석들을 보기 위해 가 보았더니 돌 위에 보기 흉한 낙서들이 여기저기 가득했다. 볼펜으로 휘갈겨 써놓은 글씨들을 보고 있으니 매일 이 길을 지나며 학교를 오가는 학생들이 인류의 유산이라든가, 선정(善政)의 의미라든가 하는 고민들을 얼마나 많은 시간 학교에서 공유하고 있을지 의문이 들었다.

선정비가 한 개인을 대상으로 만든 기념비이기는 하나 그 자체에는 당대의 정치·사회·경제 등의 국면이 묵시적으로 담겨져 있을 뿐만 아니라 백성들의 생활과 관념, 지배층의 지배 논리와 촌락의 존재 형태 등 한 시대의 가치관을 유추해 볼 수 있는 ‘벌레 구멍’과도 같은 시공의 연결점들이 가득 들어 있다.

한 사례를 들자면, 선정비의 건립이 수령의 징세 태도와 관련돼있다는 어느 연구자의 견해가 좋은 본보기가 될 수 있겠다. 국가가 수령을 평가할 때 세금 징수 능력을 가장 중요한 잣대로 삼는 반면, 백성들은 징세 문제에 있어 조금이라도 편의를 봐주는 수령들에게 감동을 받게 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견해에 의한다면 암행어사의 감찰에 걸려 파면을 당한 수령의 선정비가 존재한다고 해서 거짓이라고 말할 수도 없고, 비석 한번 세워보겠다고 세금을 잠시 여유롭게 해주는 경우도 있었을 테니 곧이곧대로 믿을 수도 없는 노릇이다.

선정(善政)이라는 단어에는 참 복잡한 문제들이 얽히고설켜 있는 셈이지만 그럼에도 그 단어가 갖고 있는 본의, 즉 백성들이 모두 배불리 먹고 아무 걱정 없이 편한 잠자리에 들 수 있으며, 인간의 상식이 외면 받지 않는 세상을 만들어야한다는 사명감, 그러한 마음으로 정치를 행하여야한다는 뜻에는 시대를 불문하고 변함이 없을 것이다.

세금 이야기가 나왔으니 잠시 사족을 달자면, 경제개발이 한창이던 1971년 무렵 이른바 ‘물가파동’으로 공공요금을 비롯한 생필품 가격을 인상한다는 소식이 매일 신문지상에 오르내리고 세금이 과도하게 징수되는 등 경제정책이 갈피를 못 잡고 있던 때가 있었다.

이로 인해 각처에서 조세저항의 움직임이 일어났고 그 중에서도 부평시장 상인들과 서울 평화시장 상인들의 조세저항은 과세표준을 새로 조정하는 등 납세행정의 근본적인 시정을 고민하게 만들었던 대표적인 저항 사례로 거론되고 있다. 잘못된 것을 바루려는(正) 부평지역민들의 의지 또한 연륜이 깊다.

지금 국회는 다시 파행을 맞았고 시민사회는 다시 들썩인다. 시민들이 선정(先正)의 고된 길을 걷지 않고 기쁜 마음으로 선정(善政)을 찬양할 수 있는 날은 언제쯤 오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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