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주 시민기자의 영화읽기 - 보드랍게(Comfort)

[인천투데이 이영주 시민기자]

박문칠 감독 | 2020년 미개봉 | 2020년 6월 3일, 제21회 전주국제영화제 온라인 상영으로 관람

출생신고 할 때 면서기가 옥(玉) 자는 귀한 양반네나 쓰는 이름이니 원래 집에서 부르던 순옥은 안 된다고 했다. 그래서 순악이 됐다. 김순옥, 김순악, 사다코, 데루코, 요시코, 마츠다케, 기생, 마마상, 식모, 개잡년, 엄마, 위안부, 할머니…. 일본군‘위안부’ 생존자 김순악이 80여 년 동안 불린 이름이다.

배우고 싶었지만, 여자가 공부해서 뭘 하냐는 가난한 부모 탓에 죽을 때까지 글을 읽고 쓰지 못했다. 큰 도시의 공장에서 돈을 벌 수 있다기에 따라나선 길은 그를 평생 지옥에 가두는 올가미가 됐다. 해방 이후 서울에 도착했지만 고향에 갈 차비가 없어 따라간 남자는 직업소개소에 데려갔고, ‘이미 버린 몸’이라는 낙인은 유곽으로 기지촌으로 전전하게 했다.

나이가 들고 남의 집 식모살이를 하며 자식을 키웠다. 그렇게 80 평생을 사는 동안 단 한 번도 자신을 ‘보드랍게’ 대하는 손길을, 눈길을 마주한 적이 없었다. 남은 건 독기뿐이라 고운 말이 나오지 않았고, 억센 할머니로 늙어갔다. 위로하는 건 술과 담배밖에 없었다.

사진제공ㆍ전주국제영화제

박문칠 감독의 ‘보드랍게’는 2010년 1월에 생을 마감한 일본군‘위안부’ 김순악의 삶을 따라가는 다큐멘터리 영화다. 영화는 비단 일본군‘위안부’ 피해자 김순악만이 아닌 조선 땅에서 소작농의 딸로 태어난 인간 김순악, 성폭력 피해를 수치로 여기는 한국에서 어떻게든 살아내야 했던 여성 김순악의 삶을, 현재를 살아가는 여성들의 목소리로 담아냈다.

김순악이 일본군‘위안부’였음을 증언한 후 그의 곁을 지켰던 (사)정신대할머니와함께하는시민모임 회원들과 미투운동 참여자들은 경산이 고향이었던 그의 경북 사투리를 살려 생전에 그가 남긴 증언을 낭독하고, 그의 삶을 읽어내면서 자신들이 느낀 감정을 고백한다. 그렇게 일본군‘위안부’ 김순악의 삶은 현재와 만난다.

이용수 님의 기자회견 이후 일본군‘위안부’는 유사이래(!) 가장 뜨거운 관심을 받는 핫이슈가 됐다. 공격적인 비난이든 객관과 중립의 태도를 유지하는 비판이든 열렬한 옹호든, 너도 나도 ‘위안부’ 전문가가 되어 말을 보태고, 그 말들은 더욱 자극적인 헤드라인을 달고 기사화됐다. 이런 말들의 잔치 속에는 오로지 ‘순수한 피해자 대 타락한 피해자’만 존재할 뿐, 얼굴이 있고 이름이 있고 살아온 역사가 있는 ‘사람’은 보이지 않는다. 아니, 아예 관심이 없다.

사실 1991년에 고 김학순 님의 증언으로 일본군‘위안부’의 존재가 세상에 공식적으로 드러난 이후 지금까지 언제나 그랬다. 일본군‘위안부’ 피해자들이 세계 곳곳을 다니며 증언하고 주한일본대사관 앞에서 ‘일본군성노예제 문제 해결을 위한 정기 수요시위’를 28년간 매주 여는 동안에도 한국 사회가 이들에게 관심을 가진 건 한일관계에 뭔가 문제가 생기거나 선거 국면 때밖에 없었다.

그것도 일본군‘위안부’로 끌려갔던 ‘소녀’의 순간, 전시 성폭력을 당했던 피해의 순간에만 집중할 뿐, 일본군‘위안부’가 되기 전 그들의 삶이 어땠는지, 이후 어떤 삶을 살았는지, 그 삶은 지금 여기와 어떻게 연결돼 있는지는 관심 밖이었다.

한복을 입은 순결한 ‘소녀’이거나 수요 집회에서 일본의 사죄를 요구하는 의연하면서도 순수한 ‘할머니’로 굳어진 일본군‘위안부’의 납작한 표상을 넘어, 영화 ‘보드랍게’는 소녀와 할머니 사이, 그가 살아내야 했던 두터운 삶의 궤적을 ‘보드랍게’ 따라간다. 그의 증언을 낭독하며 그 궤적을 따라가는 현재의 여성들은 자신의 현재를 통해 그의 삶에 응답한다. 그렇게 김순악의 삶은, 일본군‘위안부’는 과거가 아니라 그만의 이야기가 아니라 지금의 이야기, 여기의 이야기, 나의 이야기가 된다.

자극적인 장면 하나 없는데도 내가 미쳤나 싶을 정도로 영화를 보는 70분 남짓한 시간 동안 내내 울었다. 김순악의 험난한 삶에 대한 안타까움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의 삶이 비춰주는 지금 여기의 나, 지금 여기의 여성들을 ‘보드랍게’ 안아주지 못한 나 때문이기도 했다. 일본군‘위안부’ 문제는 없던 일처럼 무시하거나 흔적 없이 청산해야할 그 무엇이 아니라, 지금 나에게 여전히 진행형이기 때문이다.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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