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현석 인천민속학회 이사

김현석 인천민속학회 이사

[인천투데이] 요즘은 ‘증언’ 대신 ‘구술’이란 말을 많이 쓴다. 간혹 두 단어를 엄밀히 다른 개념으로 보고 사실관계를 보다 강조할 땐 ‘증언’, 이야기에 좀 더 비중을 둘 땐 ‘구술’을 적용하기도 한다. 구별 없이 둘을 한데 합쳐 쓸 때도 있다.

구술은 특히 지역에서 하나의 유행처럼 번지고 있다. 학술 연구는 물론이고 지역 문화원이나 박물관에서도 구술 콘텐츠는 이제 빼놓을 수 없는 사업이 됐다. 마을이 지역의 핵심 가치로 주목받게 된 것도 이러한 유행에 한몫 했다. ‘마을을 기록한다’는 건, ‘구술을 채록한다’는 것과 별반 다름없는 의미로 이해되고 있다. 마을 기록 작업 등에서 구술이 주목받는 이유 중 하나는 자료 부족 때문이기도 하다.

점점 작은 단위의 지역으로 갈수록 공식적으로 남아 있는 기록은 드물다. 지역의 변화를 추적하거나 하나의 사건을 이해하기 위해서 사람들의 이야기는 중요한 정보가 된다. 하지만, 본래 구술사는 역사의 빈 부분을 채우는 것에 목표를 두고 있지 않다. 구술사는 시대를 복원하는 것보다 시대와 사람을 이해하고 공감하는 데서 더 큰 가치를 갖는다.

마을도 마찬가지다. 마을이 역사의 중심부에 들어서게 된 건 기록이나 사업을 위한 것이 아니다. 마을이 주목받게 된 과정을 들여다보면 쉽게 눈치 챌 수 있다. 과거에 마을은 조사와 연구 대상이었다. 어딘가 숨어 있는 자료를 찾기 위해 연구자들이 동네 구석구석을 뒤지며 돌아다녔다. 주민의 공간이 아니라 연구자의 공간으로 대우를 받던 시절이다.

시각이 바뀐 건 우리 사회가 변하기 시작할 때부터였다. 우리는 1987년 6월 항쟁으로 절차적 민주주의의 성취를 경험했다. 그 후 사회 민주화 요구는 다양화되고 구체화됐다. 이에 응답하기 위해 활동가들이 지역에 들어가 터를 잡았다. 얼마 후 소련은 해체됐고, 지방자치제도가 시행됐다.

국가와 민족과 같은 큰 이야기에 몰두하거나 끌어 모은 자료에서 보편성을 밝혀내는 데 집착하던 역사학은 사실 자체보다 이야기에 기초한 서사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보편성보다는 특수성의 가치를 찾는 데 무게중심을 옮겼다. 지방자치단체들은 관광이나 축제를 위해 지역 역사에 힘을 쏟기 시작했다. 풀뿌리민주주의가 싹을 틔우는 듯 보였다.

하지만, 여전히 지방자치는 개발과 토건의 그림자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지역 경쟁력이 곧 도시 정비에 있다는 지역 정치권과 토착 권력의 철학은 쉽게 변하지 않았다. 이른바 구도심을 중심으로 보존과 개발을 둘러싼 갈등이 멈추지 않았다. 이러한 갈등 속에서 마을이 역사의 중심에 등장하게 된다. 다양한 사람이 모여 마을을 기록하게 된 것도 이 무렵이다.

마을에서 기록은 쉽게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그러다 보니 사람들은 기록물에 집착하게 됐다. 자료를 발굴하거나 기록물을 만드는 것이 하나의 목표가 됐다. ‘마을 속으로’ 들어간 이유는 희미해졌다. 경쟁적으로 구술 사업을 진행하는 것도 그런 이유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집착을 버릴 때 기록의 근원적 의미에 다가설 수 있다. 기록은 기록 행위자의 변화를 이끌어내야 한다. 결국 기록이 아니라 사람의 문제다.

구술 작업에서는 흔히 ‘라포’ 즉, 구술자와 면담자 간 신뢰관계가 강조된다. 그렇지만 이것이 장기간 유지되는 경우는 거의 없다. 기록물이 완성되면 ‘라포’도 깨진다. 연구자의 실책이다. 기록하는 행위보다 기록물 자체에 의미를 두기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이다.

왜 구술자의 이야기를 듣는가. 둘 사이에 연대 과정이 유지되지 않는다면 기록은 의미가 없다. 정의기억연대를 둘러싼 논란은 ‘큰 이야기’만은 아니다. 우리 주변 마을 작업의 초심을 다시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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