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주 시민기자의 영화읽기 - 나는 보리(Bori)

[인천투데이 이영주 시민기자]

김진유 감독│2020년 개봉

[2020년 5월 21일 CGV 남주안 관람] 바닷가 마을에서 부모, 남동생과 함께 사는 초등학생 보리(김아송)는 매일 아침 등굣길마다 동네 언덕배기 끝에 있는 사당 앞에서 기도를 한다. 보리가 무슨 소원을 비는지 궁금해 하는 단짝 친구 은정(황유림)에게 보리는 소원을 털어놓는다. “소리를 잃고 싶어!”

보리의 부모와 남동생 정우(이린하)는 농인이다. 가족 중 유일한 청인인 보리는 짜장면 배달 주문을 비롯해 이웃 청인들과 의사소통 대부분을 도맡아하는 가족 내 통역사다. 수어를 조금 할 줄 알긴 하지만 부모나 동생에 비해 서툰 보리는 가족들이 수어로 정겹게 대화하는 모습에 소외감을 느끼기 일쑤다.

다른 가족들처럼 소리를 잃고 농인이 되고 싶었던 보리는 우연히 텔레비전에서 “물속에 오래 있으니 소리가 잘 들리지 않는다”는 해녀의 인터뷰를 보고 바다에 뛰어든다. 병원 응급실에서 정신을 차린 보리는 여전히 소리가 잘 들린다는 걸 알면서도 안 들리는 척, 연기를 시작한다. 소리를 잃고 싶었지만 잃지 못한 보리의 농인 연기가 시작되면서 영화는 청인 중심의 차별과 모순이 가득한 현실을 초등학생 보리의 눈높이에서 보여준다.

김진유 감독의 첫 장편 데뷔작 ‘나는 보리’는 농인 부모 사이에서 나고 자란 코다(CODA, Child of deaf adult) 보리가 세상과 부딪치며 한 뼘 자라는 성장담이다. 본인이 코다이기도 한 감독이 자전적 경험과 동료 코다들의 경험을 토대로 각본을 쓰고 연출했다.

보리가 청력을 잃었다는 소문이 돌면서 이웃과 친구들의 태도는 돌변한다. 보리가 듣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한 이웃들은 보리의 뒤통수에 대고 혀를 끌끌 차며 동정을 보내고, 친구들은 “어차피 듣지도 못 한다”며 대놓고 따돌린다. 시장통 옷가게 주인은 보리 엄마에게 바가지를 씌운다. 보리가 농인 연기를 하기 전까지는 몰랐던 일이었다. 관객들은 보리의 눈과 귀를 통해 깨닫는다. 이 세상이 뭔가 단단히 잘못 돼있다는 걸.

영화는 농인 연기를 하는 보리를 대하는 세상과 수어로 대화하는 보리네 가족을 명확히 대비시킨다. 세상은 농인을 청각에 문제가 있는, ‘결핍’의 존재로 대한다. 청인의 기준으로 모든 것을 판단한다. 그래서 대놓고 동정하거나 무시하고 차별한다. 정우가 인공 와우 수술을 받으면 청력이 미약하게 살아나는 대신 가장 좋아하는 축구와 같은 운동은 앞으로 하지 못하게 될 것이라는 의사의 경고는 청인인 고모의 통역을 거치며 삭제된다.

그러나 보리네 가족은 전혀 다르다. 농인 연기를 하는 보리에게 부모는 “소리를 들을 수 있든 없든 우리에게 똑같은 사람”이라고 말한다. 정우는 수술을 받으면 축구를 못하게 된다는 걸 알게 된 후 수술을 받지 않기로 한다.

그렇다고 청인과 농인의 대립구도를 보여주는 것은 아니다. 은정은 보리가 농인 연기를 시작하자 공책에 글씨를 쓰며 보리와 대화하고 우정을 이어간다. 연기라는 걸 안 뒤에도 보리의 비밀을 지켜준다. 마을 이장인 은정의 아빠 역시 정우가 농인이라는 이유로 후보 선수로 밀렸다는 이야길 듣고 코치를 찾아가 설득해 주전 자리로 돌려놓는다.

농인을 듣지 ‘못하는’ 결핍의 대상으로 보는가, 다만 소통의 방식이 ‘다른’ 존재로 보는가. 이 차이가 만든 커다란 간극이다.

음성언어만이 유일한 소통도구인 세계에서 농인은 결핍의 존재이지만 수어가 소통도구가 되면 오히려 청인이 결핍의 존재가 된다. 애초에 보리가 청력을 잃고 싶다고 소원을 빌었던 이유가 바로 그 소외감 때문 아니었던가.

영화 ‘나는 보리’는 비단 ‘장애인을 차별하면 안 된다’는 식의 도덕교과서 같은 교훈을 주기보다 코다 소녀 보리와 농인 가족을 통해 농인의 세계, 수어의 세계를 보여줌으로써 청인들의 성찰을 이끌어낸다.

영화는 보리네 가족의 수어 대화뿐 아니라 청인들의 대화에도 한글 자막을 입혔다. 청인들은 수어 대화의 자막을 통해 수어의 세계를 조금이나마 이해하고 농인들은 청인들의 대화를 이해할 수 있다. 이것만으로도 농인과 청인 누구도 소외되지 않을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준다. 영화가 할 몫은 이미 다했다.

※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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