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인희 인천문화재단 인천문화유산센터 연구원

[인천투데이] 강화군 서도면 볼음도리 답사 날짜를 잡고 볼음교회 목사님을 만나려했다. 하지만 그날 목사님은 뭍에 일이 있어, 일정이 맞지 않았다.

홍인희 인천문화재단 인천역사문화센터 연구원

목사님은 본인은 볼음도에 온 지 13년밖에 되지 않았다며 대신 볼음도에서 1938년에 태어나 지금까지 살고 계신 볼음교회 원로장로님을 소개시켜주셨다. 볼음도에 대해서는 누구보다 잘 알고 계신다면서.

소개받은 원로장로님은 할아버지께서 볼음도에 정착한 이후로 지금까지 살고 있다고 하셨다. 할아버지 이름은 이신숙인데 강화 진위대 활동을 하다 일본 헌병대가 잡으러와 볼음도에 들어오게 됐다고 하셨다.

진위대는 1895년(고종 32) 지방의 질서 유지와 변경 수비를 목적으로 설치된 근대적 지방 군대였다. 일제가 진위대를 해산할 계획을 추진하자, 진위대는 기존 의병부대와 연합전선을 형성하기도 했다.

아무튼 이신숙 할아버지는 그때 진위대에 함께하던 김귀천과 함께 강화를 도망 나오셨는데 각각 볼음도와 아차도에 정착했다고 하셨다.

원로장로님은 볼음도에서 한국전쟁을 겪으셨다. 당시 도서 지역에 살면서 전쟁이 난 줄도 몰랐다는 분이 많은데, 볼음도에서도 흉년이 들어 전쟁은 생각지도 못하고 마른장마에 천둥이 친다고 생각했다고 하셨다.

전쟁 중 어느 날 인민군이 서도에 들어가 200명을 죽인다고 한 소문이 나돌았다고 하셨다. 그때 석모도 하리 사람이 돛단배를 타고 주문도에 와서 이 소식을 전해주었는데, 지척에 산다고 그것을 알려준 하리 사람이 어찌나 고마웠는지 몰랐다고 하셨다. 그때 지소에서 총을 주며 다 같이 서도를 지키자고 했단다. 얼마 후 인민군 3명이 입도해 그들에게 총을 쐈다고 하셨다. 총 6발 중 4발은 빗나가고 5발 째 맞았는데 3명 중에 책임자가 치명상을 입는 바람에 그들은 돌아갔고, 그 이후 밤에도 보초를 서며 섬을 지켰다고 하셨다.

또, 피란민도 많이 왔다고 하셨다. 배가 계속 넘어와 볼음도 앞 바다가 새까맣게 보일 정도였다고. 쌀을 지고 온 피란민도 있었는데, 밥 한 끼 얻어먹고 쌀 한 되를 내어 놓고 하숙을 하기도 했다고 하셨다. 이렇듯 섬에서는 피란민과 원주민이 같이 살아가는 형국을 보이며 오히려 피란민을 많이 챙겨준 모습이었다.

방을 못 얻으면 양지에 움막을 짓고 살기도 했다고 하셨다. 그렇게 북쪽의 집에 쌀 가지러 잠시 갔다 오겠다고 배타고 갔던 사람을 영영 못 보는 경우도 있었단다. 그렇게 남과 북, 사람들, 국토는 영영 분단이 되고 말았다.

당시 가뜩이나 흉년이 든 데다 땔감도 없어서 나무뿌리, 풀뿌리 할 것 없이 모조리 땔감으로 썼다고 하셨다. 해당화 군락을 이뤘던 볼음도도 한국전쟁 이후에는 해당화 뿌리까지 모조리 캐다가 땠다고 하시니, 그 참상이 이루 말로 다할 수 없었을 것이다.

한국전쟁이 발발한 1950년에 그 분은 아마도 12세 정도였으므로 우리에게 해주신 이야기는 대부분 그의 어른들에게서 들은 이야기일 지도 모른다. 물론 직접 보고 겪은 이야기도 있을 것이다. 이젠 기억이 흐릿해져 명확하지 않거나 착오가 있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분들의 이야기는 가치가 있다.

전근대 시기 역사는 지배층과 지식인의 전유물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개개인의 생애가 역사가 되는 시기가 됐다. 구술사의 등장과 이를 활용한 역사 연구는 어쩌면 필수불가결한 것이다. 그래서 이분들의 경험과 구술은 중요하다. 올해는 한국전쟁이 발발한 지 70년이 되는 해다. 한국전쟁을 겪으신 분들이 벌써 80~90대가 됐다.

이 분들의 경험이 구술로나마 남아 당시를 회상할 수 있는 기재로 작용하고, 또 그것을 이용해 콘텐츠를 개발한다면 이것 또한 우리가 후대에게 남겨 줄 큰 자산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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