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투데이 심혜진 시민기자] 호주로 이민 간 친구가 며칠 전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사진을 몇 장 올렸다. 마트 진열대 사진이라는데 물건이 하나도 없이 텅텅 비어 있었다. “화장지가 없다!” 친구가 사진과 함께 남긴 글이다. 내가 걱정하는 댓글을 달았더니, 당장 쓸 건 있으니 괜찮단다. 창고형 마트에 산더미처럼 쌓여있던 화장지가 모두 사라진 것이 놀라워 기념으로 사진을 찍은 것뿐이라면서. 미국과 유럽에서 화장지 사재기가 심각하다더니, 내 친구가 그 영향을 받을 줄은 몰랐다.

화장지가 없다는 상상을 하니 정말 난감할 것 같다. 화장실에서 무엇으로, 어떻게 ‘뒤처리’를 해야 할까. 매번 손수건을 사용할 수도 없고 말이다. 옛날 배경의 영화나 드라마에서 종이를 구겨 사용하는 걸 보긴 했는데, 몹시 불편할 듯하다. 화장지가 없을 땐 어떻게 살았을까.

4월 6일 저녁,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화장지를 언제 처음 사용했는지 물었다.

“막내 임신한 해에 처음 쓰기 시작했어.”

사용 시기를 정확히 기억하고 있다니, 놀랍다.

“이유가 있지. 걔 임신하고 치질이 생겼어. 늬네 임신했을 땐 안 그랬는데, 사람들이 ‘애가 (자궁) 밑에 생겨서 그렇다’고 그러더라고. 하여간 엄지손톱 만하게 살이 튀어나와서 꽈리처럼 붙었었어. 근데 그게 터진 거야. 피가 나고 얼마나 아픈지, 누워서 자지도 못하고, 앉을 때도 무릎 꿇고 앉아야하고, 빨래할 때도 너무 힘들었어. 그래서 종이를 쓸 수가 없는 거야. 할 수 없이 휴지를 샀지. 그리고 그때 마침 아빠가 쿠웨이트에 일하러 갔잖아. 월급이 따박따박 들어오니까, (화장지를) 살 수 있었지.”

“휴지가 비쌌나봐?”

“그럼 비쌌지. 우리 주인집이 부자였는데도 휴지를 안 썼어. 경기도 동두천에 살 때였는데 동네 사람 중에 휴지 쓰는 사람 없었어. 근데 휴지가 있다는 건 알았지. 너무 아파서 가게에서 하나를 샀는데, 종이 쓰다가 그거 쓰니까 훨씬 낫더라고. 부드러우니까. 그렇다고 지금처럼 좋진 않았어. 퍼석퍼석하고 엉성하게 감겨서 거칠거칠했지. 색깔도 회색인가 갈색인가 거뭇거뭇했어. 화장지 질이 여러 가지였는데, 아마 제일 싼 걸 샀을 거야. 그래도 포대종이나 신문지보다는 나았지. 훨씬 좋았지.”

“그럼 화장지 덕분에 치질이 나은 건가?”

“아니, 그건 아니지. 터진 다음에 그냥 아물어버리더라고.”

화장지가 나오기 전엔 뭘 썼는지 자세히 설명해달라고 했다.

“나는 어려서부터 종이를 썼어. 어디서 났는지는 몰라도, 아버지랑 오빠들이 종이를 갖다 놓더라고. 그걸 실에 꿰어서 화장실에 걸어두고 쓰는 거야. 신문은 귀해서 없었고 대부분 물건 사면 담아주는 포대종이나 오래된 책이었지. 문종이(창호지, 한지)로 된 책도 많았어. 어른들은 볏짚을 썼지. 근데 그냥 볏짚은 억세서 못 쓰고, 맨 처음에 떡잎처럼 나온 잎이 있어. 볏단을 손으로 쥐고 아래쪽을 갈퀴로 긁으면 떡잎만 모아진단 말이야. 그건 말라도 부드럽거든. 그걸 둘둘 말아서 화장실에 갖다 놓고 쓰는 거지. 뭐 제대로 닦였겠어? 그냥 다들 그렇게 하고 사니까 불편한 줄 모르고 산 거지. 근데 휴지를 한 번 쓰고 나니까 그 다음부터는 종이를 못 쓰겠더라고. 잘 안 닦이니까. 그래서 그냥 휴지 사서 썼어. 그때부턴 그게 자연스러운 게 된 거고.”

# 값은 비싸고 품질은 낮고

화장지 이미지.

1967년 다음과 같은 기사가 실렸다.

<영국이나 독일같이 검소한 나라에서는 재생지로 된 검은 갈색 화장지를 쓴다지만 현재 우리나라에서는 몇몇 호텔을 제외하고는 가정에서는 주로 흰빛의 고급화장지를 애용하고 있다.> (1967.3.4. 매일경제)

가정에서 주로 흰색 고급화장지를 애용하고 있다는 표현은 진위가 의심스럽다. 당시 국민 대다수는 화장지를 사용할 만큼의 경제적 여유가 없었다. 다만 눈여겨볼 대목이 있다. 기사는 ‘속 내용물이 고르지 못하고 절단선의 점선이 그 기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고 있다. 외제에 비해 뻣뻣한 것이 단점’이라는 내용과 함께 ‘하얀 화장지에는 펄프 원단으로 만든 고급화장지와 재생지로 된 갈색 휴지를 표백한 것이 있는데 이의 구별은 표백 휴지가 좀 더 빳빳한데 현재 시중에서 파는 화장지는 포장이 돼 있어 포장을 뜯고 내용물을 선택하게 돼 있지 않으므로 우선 큰 회사의 제품이 안전할 듯하다’로 끝맺고 있다. 초창기 국내에서 생산한 화장지는 품질이 썩 좋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아폴로화장지 공업사 제품 ‘아폴로화장지’(값 45원)가 절취선이 없고 가운데가 마구 터져 있어 불량품이라고 마포구 합정동 변봉주 씨 등이 한국부인회를 통해서 회사측에 항의, 아폴로측은 “기계가 한때 고장이 나 불량품이 나간 것을 인정한다”고 사과하고 물건을 교환해 줬다.> (1970.7.25. 동아일보)

<주부 임모씨는 지난 3일 갈현시장에서 50원에 구입한 유한킴벌리 회사제 크리넥스 화장지를 불량품이라고 고발. 분홍색 두루마리로 된 이 화장지는 구겨지고 이중삼중으로 겹쳐 감긴 데다 절손부분이 많아 쓸 수 없을 뿐 아니라….> (1972.1.29. 동아일보)

당시 버스비가 10~15원이었으니 화장지 값 45~50원은 꽤 비쌌다. 그러나 값에 비해 품질은 형편없었다. 그럼에도 화장지는 사용이 편리해, 수요가 점점 많아졌다. 특히 대기업에서 완전자동공정 생산설비를 갖추고 전략적인 마케팅을 하면서 시장이 크게 성장했다. 1972년에는 전년 대비 화장지 생산량이 15배나 늘었다.

<장미표, 현대표, 무궁화표, 크리넥스표 등의 상자 화장지와 무궁화표, 장미표, 현대토끼표, 연화표 등의 두루마리 화장지가 유통되고 있으나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해오던 무궁화표, 장미표 등이 유한킴벌리의 크리넥스표에 거의 시장을 빼앗기고 있으며 크리넥스의 새로운 마케팅 전략으로 슈퍼마켓, 특정 외래품 판매소까지 침투 등 새로운 수요 창조로 크리넥스의 시장 확대는 기하급수적으로 번져가고 있으며 생산 부족으로 즐거운 비명을 올리고 있을 정도다.> (1972.4.21. 매일경제)

이듬해엔 어쩐 일인지 화장지 사재기가 극성을 부렸다. 1973년 석유 파동으로 석유 값이 크게 올라 물가가 치솟으면서 플라스틱 제품과 우유, 연탄 등 생활필수품 가격이 오르거나 품귀현상을 빚은 것이다. 화장지는 여섯 달 새 값이 두 배 이상 올랐어도 물건을 구하기 힘들었다. 생산과 공급은 변함이 없었지만, 너도나도 한꺼번에 많은 양을 사들였기 때문이다. 이에 언론에선 연일 매점매석을 하지 말자고 보도했지만 서민들의 불안으로 품귀현상은 이듬해까지 이어졌다.

# 아파트와 함께 화장지 수요 폭발

1970년대 중반 이후 서울에 아파트가 늘어나기 시작했다. <경향신문>에서 아파트에 사는 주부 세 명과 좌담회를 열고 그 내용을 기사에 담았다.

<화장실이 막혀 뜯으니까 신문지가 나와요. 위에서 신문지를 쓴 거죠. 화장지라도 쓰레기통에 따로 버리면 절대로 막히지 않아요. 이런 점은 서로 조심해야죠.> (1976.9.21. 경향신문)

아파트에 살면서도 화장실에서 신문지를 사용할 정도로, 화장지는 1970년 중반까지도 대중화되지 않았다. 심지어 사치품으로 바라보는 이들도 있었다. 아래는 한 기자가 당시 노인의 눈으로 세태를 꼬집은 글의 일부다.

<헌 신문지가 지천으로 널렸는데도 비싼 돈 주고 화장지 사다가 여기저기 풀어서 다 없애버린다.> (1978.9.20. 경향신문)

1980년대 들어 화장지 수요는 아파트 수세식 화장실의 증가와 맞물려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화장실의 변천은 필연적으로 화장지의 고급화를 불러왔다. 뒷간에서 쓴대서 ‘뒤지’라 불리다가 못 쓰는 종이를 비벼서 쓰던 ‘휴지’를 거쳐 보드랍게 주름을 잡아 고운 물을 들여 만든 ‘화장지’로 발전한 것. (…) 현재 우리나라에선 한 달에 35m가 감긴 두루마리 화장지 2500만개가 사용된다고 한다. 한 달에 30억원의 돈이 수세식변기로 녹아들어가는 것. (…) 화장지 업계에서는 전 가구 중에 아파트와 연립주택의 비율은 13%, 거기다 양옥을 합해 30%쯤을 수세식으로 추산하고 있다.(서울 기준)> (1983.6.18. 동아일보)

1980년대 중반부터 화장지에도 고급화 바람이 불면서 화장지 시장은 해마다 20~30%씩 성장했다. 유한킴벌리에선 휴대용 화장지를 판매하는 자동판매기까지 내놓았다. 소비자들은 점점 폐지를 재활용한 갈색 화장지를 꺼리고 촉감과 품질이 좋고 변기가 막히지 않게 잘 풀리는 화장지를 선호했다. 화장지는 더욱 하얘졌다.

그런데 1990년대 들어 양상이 또 한 번 바뀌었다. 도시화, 공업화로 인한 환경오염에 경각심을 갖게 된 대중이 화장지를 부정적으로 바라보기 시작한 것이다. 화장지를 만들기 위해 얼마나 많은 나무가 베어지는지, 산림 파괴로 지구 공기가 얼마나 나빠지는지, 사람들은 관심을 가졌다. 이에 백화점이나 생활협동조합에서는 우유팩을 화장지와 교환해주는 행사를 열었다. 정부에선 저공해 상품에 ‘환경마크’를 부여하는 정책을 1991년부터 논의하기 시작해 1997년부터 시행하기 시작했다.

# 없어도 불편한 줄 몰랐던 때

엄마는 요즘 화장실에서 화장지에 크게 의존하지 않는다. 비데를 사용한 뒤 화장지로는 물기만 닦는다. 엄마의 비데 사용 소감이 의미심장하다.

“참, 내가 생각해도 신기해. 치질 때문에 앉지도 눕지도 못하던 게 얼마 전인 것 같은데, 이제 비데를 다 사용하고 말이야. 세상이 이렇게 바뀔 줄 누가 알았겠어. 돈만 있으면 참 살기 좋은 세상이야. 안 그래? 그래도 가끔은 옛날 생각이 나. 그때는 없어도 불편한 줄을 몰랐거든. 이제 비데 없으면 어쩌나, 고장 나면 어쩌나, 그런 생각도 해. 몸은 편해서 좋은데 마음은 자꾸 조바심이 나. 갑자기 불편해질까 봐. 뭐가 더 나은 건지 헷갈려.”

※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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