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읽기] 조선총독부의 차별적 위생 정책과 그 시사점
[세상읽기] 조선총독부의 차별적 위생 정책과 그 시사점
  • 인천투데이
  • 승인 2020.03.16 13: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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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민섭 인천문화재단 인천문화유산센터 연구원
정민섭 인천문화재단 인천문화유산센터 연구원
정민섭 인천문화재단 인천문화유산센터 연구원

[인천투데이] 전근대기 전염병은 인간에게 가장 가혹한 재앙이었다. 조선시대에도 역병으로 사람은 물론 가축까지 피해를 입은 사례가 ‘조선왕조실록’ 등 사료에서 확인된다. 조선에서 전염병을 근대적으로 대처하기 시작한 때는 갑오개혁 이후다. 갑오개혁 당시 조선 조정은 내무아문(內務衙門)에 위생국을 설치하고 분장 사무를 공중위생ㆍ의약ㆍ방역으로 나눴다. 그리고 위생 관련 실무를 경무청이 담당하기 시작했다.

특히 1895년에 전국적으로 유행한 콜레라는 근대적 위생 정책 수립과 실무를 담당하던 경찰의 제도화를 촉진했다. 아울러 개화기 지식인이었던 유길준ㆍ김옥균 등도 위생 관련 정책의 필요성을 강조했으며, 독립협회도 ‘독립신문’으로 개인 청결과 위생의 중요성을 계몽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조선 정부의 전염병 정책 수립과 집행은 통감부가 설치되면서 일본으로 대체됐으며, 병탄 이후에는 조선총독부가 그 역할을 대신했다.

조선총독부는 병탄 전 조선의 위생정책이 실패했다고 규정하고 경찰력을 동원한 폭력적ㆍ무단적 위생정책을 실시했다. 경찰은 평시에도 위생상 불결하다고 여기는 가구를 지도ㆍ단속해 태형을 집행하기도 했으며, 동리에서 관리하는 우물ㆍ공중화장실 등 유지ㆍ보수에 조선인을 동원했다. 또한 전염병이 발생하면 가가호호 순시하는 검병호구조사를 실시, 환자를 찾아내 격리 조치했다. 이 과정에서 유증상자를 폭력적으로 연행하는 경찰과 조선 민중이 충돌하는 사례가 허다했다. 조선인 여성을 강제적으로 검사해 성적 모욕을 주는 일도 많았다.

일제는 왜 이렇게 폭압적인 위생 정책을 실시했을까. 식민지 조선 민중이 근대적 보건의료 지식이 부족했던 점도 이유일 수 있다. 그러나 더 근본적 이유는 위생 정책을 수립ㆍ집행하는 일제 관료들과 한반도로 넘어온 일본인들의 민족적 우월감과 편견 때문으로 보인다. 식민지 병탄 초기 조선총독부에서 발행한 연보를 보면 “조선에 있어서는 위생사태 극히 불량하고 (중략) 병자는 먼저 무녀(巫女), 매복(賣卜)의 말을 들어 의료를 피하려하는 풍습이 있다.(이하 생략)”고 조선인의 전염병에 대한 무지를 일반화했다.

또, 조선총독부 기관지인 <매일신보(每日申報)>에서는 “조선인은 원래로 위생에 주의치 아니하는 습관을 만들었으니”라고 한다던가, “선인(鮮人)은 일반히 위생적 사상이 부족하여 방실(房室)과 가구를 청결, 정리하는 관념이 결핍하므로”라고 했다.

이런 점은 일제가 식민지 조선을 바라보던 시각을 그대로 보여준다. 즉, 조선은 일본에 비해 비문명적이고, 비위생적인 사회로서 일제의 문명화한 제도와 정책으로 교화해야할 대상으로 바라본 것이다.

중국에서 발발한 코로나19로 인해 대한민국이 혼란스럽다. 이런 와중에 일부 정치세력은 코로나19 확산을 막기 위해 중국인 입국을 금지하자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번 집단 감염 사태는 중국인보다 특정 종교 신도들의 안이한 대처와 격리 회피 등에서 비롯했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대체적 의견이다.

인천은 한ㆍ중 수교 이후 두 나라 교류의 중심에 서왔다. 두 나라는 미래를 향해 함께 나가야할 동아시아 동반자이자 협력자다. 중국에서 코로나19가 확산할 때 대한민국과 인천시는 방역마스크를 보내는 등 우호의 손길을 뻗쳤고, 이에 화답하듯 중국 웨이하이시는 인천시에 마스크를 10배로 보답했다. 이는 연대로 위기를 극복하는 이상적인 국제 교류와 협력을 보여준다.

중국인 입국을 금지하자는 주장과 조선을 비문명ㆍ비위생 사회로 본 일제의 시각이 겹쳐 보이는 것은 왜일까. 그것은 다름과 차이를 넘어 인간으로서 지향해야할 가치를 보여주지 못하는 편협한 인식 때문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