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요한 건 여기, 인천에도 트랜스젠더가 있다는 거죠”
“중요한 건 여기, 인천에도 트랜스젠더가 있다는 거죠”
  • 조연주 기자
  • 승인 2020.02.21 11:0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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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소수자 활동가 신우리 씨 인터뷰

[인천투데이 조연주 기자] 신우리 씨는 자신을 인천 토박이라고 소개했다. 그녀의 어머니와 어머니의 어머니, 그의 엄마도 동인천에서 오래 장사를 했다. 신 씨의 아버지도 인천에서 태어나 나고 자랐다.

신우리 씨는 노동자이자, 정치활동가이기도 하다. 그녀는 주 5일 연수구 옥련동에서 부천 송내로 출퇴근하고 있다. 신 씨는 정의당에 2016년 가입했고, 지금은 정의당 인천시당에서 활동하고 있다. 신 씨가 일하는 업계에서 노동조합을 만드는 것은 그녀의 목표 중 하나다.

그리고 신우리 씨는 트랜스젠더 여성이다. 신우리 씨는 주민번호 앞자리에 1이라고 적혀있지만, 자신을 여성이라고 정체화한 이른바 ‘MtF’트랜스젠더 여성이다.

신 씨는 이렇게 자신에 대한 소개가 여러가지인 이유를 두고 사회적 약자·소수자의 문제는 단 하나의 정체성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노동자이자, 활동가이자, 인천 토박이이자, 여성인 신우리 씨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아래는 그녀의 이야기를 정리한 것이다.

성소수자 활동가 신우리 씨.
성소수자 활동가 신우리 씨.

남고 나온 여성 ··· 날 소개하는 이름 찾는데 시간 걸렸죠

인천에서 나고 자란 토박이다. 어머니쪽은 조선시대 때부터 인천에 살았다. 친할아버지는 이북에서 내려오셨고, 아버지는 용유도 출신이다. 어렸을 때는 어머니, 아버지가 모두 일을 하고 있어서 할머니 손에 자랐다. 할머니 덕분에 젠더롤(성역할)이라는 것을 모르고 자랐다. 할머니는 내 머리도 빗겨주고 묶어주고, ‘꼬까옷’도 많이 입었다. 그런 것에 익숙하게 컸다.

‘뭔가 이상하다’라고 느낀건 유치원에 들어가고 본격적으로 사회화를 시작할 5살 무렵이다. 소꿉놀이를 하는데, 남자는 아빠를 하고 여자는 엄마를 하더라. 그렇게 나는 아빠역할을 하게 됐다. 병원놀이를 할때도 남자는 의사, 여자는 간호사 역할을 하고 놀았다.  왜 꼭 그래야하지? 억울하고 화나고 이상했다.

운명같은 순간이 있었다. 9살 때는 텔레비전에서는 ‘그것이 알고싶다’였나, 거기서 이태원 트랜스젠더 바 (당시는 그곳을 게이바라고 불렀다) 잠입 취재 보도를 봤다. 당시 방송 분위기는 사뭇 무겁고 심각했는데, 거기 나온 한 사람이 “우리는 남성의 몸에 갇혀있는 여자에요”라고 말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적절한 표현은 아니다. 하지만 그때는 반갑고도 충격적인 말이었다. 세상에 나같은 사람이 나 혼자만은 아니라는걸 알게 됐다. 트랜스젠더라는 말이 있기도 전부터 트랜스젠더로 살기 시작했다.  

트랜스젠더를 의미하는 색깔과 심볼

중학교까지는 공학을 다녔고, 고등학교는 남고를 나왔다. 당시 연수구에는 거의 남고밖에 없었다. 당연히 괴롭히는 애들도 많이 만났다. 특히 1학년때 남자애들한테 당했던 불쾌한 경험이 많다. ‘계집애같다’, ‘호모(동성애자를 비하하는 말) 같다’는 소리도 심심찮게 들었다. 그래도 내 성정체성 때문에 주눅든 적은 없었다. 구김살없이 보낸 유년시절 때문인 것 같다. 

고등학교 2학년 때, 내 인생의 터닝포인트가 찾아왔다. 친구들이 “네 왕언니 텔레비전에 나온다”라고 해서 찾아봤다. 그 순간을 잊을 수 없다. 너무 예쁜 여성이 화장품 광고에 나오고 있었다. 하리수였다. 지금은 언니 동생하면서 지내고 있지만, 당시에는 너무나 존경스러운 연예인이었다. 하리수는 ‘트랜스젠더’라는 존재를 대한민국에 처음으로 알리고, 선언한 사람이다. 리수언니의 등장 이후로는 나도 날 설명하는 게 조금 더 편해졌다.

가족한테는 커밍아웃을 여러번 했다. 초등학교 3학년때 엄마한테 “나 여자 되고싶다”라고 말했는데, 엄마는 농담인줄 알고 웃어넘겼다. 고등학교 1학년이 돼서 진지하게 커밍아웃했다. 고등학교 3학년 때는 동생한테도 말했다. 그때까지만해도 가족들은 그러려니 하고넘어 갔다. 대학교 2학년이 되고 나서는 집을 나와 휴학하고 번 돈으로 트랜지션(성전환) 수술을 하고 집에 나타났다. 집안이 뒤집어졌다. 엄마는 막 울었다. 지금은 잘 지낸다.

당연히 대학교에서도 난리가 났었다. 우리학교에서 ‘걔’하면 나를 말하는 것이었다. 다른 과 사람들은 나를 보러 구경을 오기도 했다. 나중에 들은 얘기인데, 교수들 교직원들이 모여서 날 두고 어떻게 할건지 상의하기도 했다더라. 학교 사람들은 내가 당연히 자퇴할거라고 생각했는데, 난 안했다. 할 이유가 없었다.

트랜스젠더는 그렇지 않은 사람만큼 어디에나 있다

그리고 소수자의 이야기는 연결돼있다

요즘은 변 하사와 숙명여자대학교 합격생 A씨 등 요즘 이슈로 뜨겁다. 언론에 자신이 노출되는 것에 대해서, 수많은 고민과 용기가 필요했을 일임을 짐작할 수 있다. 많이 두려웠을텐데도, 용기를 내준 두 분에게 고맙다는 말을 전하고 싶다.

물론 좋은 소식만 들리는 것은 아니지만, 트랜스젠더라는 단어가 공공연하게 여러 매체를 타고 다니는 것이 신기할 때도 있다. 내가 대학교다닐 때는 여러번 인터뷰를 했었는데도, 결과적으로 한 곳에도 안 실렸다. 아마 편집국에서 거른 것 같다. 그렇게만 보면 요즘 참 달라졌음을 느낀다.

최근 몇 년 트랜스젠더가 이슈가 된 만큼, 여러 가지 혐오를 마주하고 있는데, 그 결은 조금씩 다른 것 같다. 트랜스젠더는 여성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그나마 낫다. 어쨋거나 트랜스젠더라는 젠더 자체를 부정하지는 않으니까. 더욱 악질적인 사람들은 트랜스젠더라는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트랜스젠더란 없고, 여성성에 세뇌당한 남자쯤으로 취급한다. 하지만 우리들은 여기 분명히 있다.

트랜스젠더는 자신의 존재를 선언을 하는 순간 수많은 여성으로서의 또는 남성으로서의 진정성을 증명을 해야 한다. 머리가 짧고 바지를 입고 다니는 트랜스젠더 여성들은 말만 여자인 남자들이라고 비난받는다. 머리를 기르고 치마를 입고 다니는 트랜스젠더 여성들은 사회에서 부여한 ‘여성성’을 강화하는 존재가 된다. 어느 장단에 맞춰야 할지 모르겠다.  

인천에서 트랜스젠더로 산다는 것은, 사실 인천이란 지역보다도 서울 이태원이나 강남 밖이라는 것에 더 의미가 있는 것 같다. 사람들은 이태원 밖에는 트랜스젠더가 있을 거라는 생각을 못하는 것 같다. 한번은 인천에 있는 백화점에 상품권을 교환하러 갔는데, 주민등록증과 나를 자꾸 번갈아 보더라. 아직 성별정정을 하지 않아 앞자리에는 1이 적혀있는데, 생긴건 여자니까 매치가 안되는 거다.

나는 여성이기도하고, 노동자이기도 하다. 인천에 살고있는 사람으로서 인천에서 꽃피울 수 있는 지역문화를 고민 하고있는 정치활동가이기도 하다. 인천이 수도권이라는 이름에 묶여 오히려 타시도에 비해 배제되는 현상에 대해서도 걱정이 많다. 

나의 정체성이 서로 연결돼있음을 느낀건 트랜스젠더 인권활동을 할 때 였다. 당시 아는 언니가 기혼 남성으로 살다가 여성으로 성별정정을 시도할 때 난항을 겪었다. 언니가 남성에서 여성으로 성별정정을 하게 되면 그 전 결혼 기록이 여성간 동성혼이 되기 때문에 성별정정이 불가하다는 이유에서다.

트랜스젠더 문제는 단순히 트랜스젠더 하나만을 바라본다고 해결되는게 아니었다. 동성혼 문제를 해결하고, 노동자로서 양극화 문제를 해결해 나갈 때 사회가 바뀐다는 것 비로소 그렇게 소수자 이야기는 연결돼있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깨달았다.

중요한건 내가 여기 인천에 있다는 거다. 그 사실을 누가 부정할 수 있겠나. 트랜스젠더는, 트랜스젠더가 아닌 사람들 만큼이나 어디에나 있다. 이걸 사람들이 알아줬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