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녘에 가장 가까운 섬, 교동도(하-1)
북녘에 가장 가까운 섬, 교동도(하-1)
  • 천영기 시민기자
  • 승인 2020.02.17 11: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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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영기 선생의 인천 섬 기행| 교동도(하-1)
왜구 침입 맞선 교동읍성, 그리고 느티나무

[인천투데이 천영기 시민기자]

교동읍성 성벽과 느티나무.
교동읍성 성벽과 느티나무.

교동읍성 남문으로

향교에서 화개사 정류장까지 내려와 오른쪽으로 200여 미터쯤 가면 길 건너편에 교동읍성으로 가는 안내판이 있어 쉽게 찾아갈 수 있다. 들어가는 길 입구에 폐가 두 채가 있다. 올 때마다 세월의 무상함이 새겨지는 것을 본다. 슬레이트 지붕에 마치 이끼가 내려앉듯 바래가는 아련한 빛깔, 한 축이 허물어져 내리는 돌담, 담쟁이덩굴로 온통 뒤덮인 집, 스쳐지나가며 보는 것이지만 세월의 흔적이 순간순간 생채기를 낸 듯 아득해진다.

교동읍성은 인조 7년(1629)에 남양 화량진에 있던 경기수영을 이곳으로 옮기며 쌓은 석성이다. 인조 11년(1633)에는 삼도수군통어영(三道水軍統禦營, 경기ㆍ충청ㆍ황해도 등의 수군을 관할하는 수군 최고사령부)을 이곳에 설치하고 경기수사(京畿水使)에게 3도 통어사를 겸하게 했다. 그만큼 해상교통의 중심지로서 교동도는 한강과 서해를 잇는 역할 뿐만 아니라 군사적 요충지로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교동읍성은 영조 29년(1753) 통어사 백동원이 성곽과 여장(女墻 성가퀴, 몸을 숨겨 적을 공격할 수 있게 성 위에 낮게 덧쌓은 담)을 고쳐 쌓았고, 고종 21년(1884)에는 통어사 이교복이 남문을 중건하고 문루와 성벽을 수리했는데 공사를 끝내지 못했다고 한다. 고종 27년(1890) 동문과 북문을 고쳐 세웠다고 한다. 1921년 폭풍으로 남문의 문루가 무너졌고 동문과 북문은 언제 무너졌는지 알 수 없으며 지금은 흔적조차 없다.

성의 형태와 구조는 1750년대 초 전국의 군현을 회화식으로 그린 지도집인 ‘해동지도’와 ‘1872년 지방지도’를 보면 알 수 있다. ‘해동지도’를 보면, 남문ㆍ북문ㆍ동문 위에 모두 누각이 올려져있고 이중 성벽 역할을 하는 옹성(甕城, 성문을 엄호하기 위해 성문 바깥쪽에 반원형으로 쌓은 성)이 설치돼있다. 성벽 위에는 여장도 둘러진 견고한 성이었다. 부내에 5채의 건물이 보인다. ‘1872년 지방지도’에는 옹성은 보이지 않으나 객사와 영문(營門, 조선시대 각 도의 감사가 업무를 맡아보던 관아), 홍살문이 그려져 있다.

성의 둘레는 430미터 정도여서 둘러보기 좋은데, 길이 나있지 않아 다 둘러볼 수 없어 아쉽다. 성벽을 따라 산책길을 만들면 좋을 것 같다. 문루 높이는 6미터로 동문은 통삼루(統三樓), 남문은 유량루(庾亮樓), 북문은 공북루(拱北樓)라 했다. 홍예만 남아있던 남문은 2017년 12월에 유량루(庾亮樓)를 복원해 문루를 올렸다. 올해까지 옹성과 성벽, 치(雉, 성벽에 기어오르는 적을 쏘기 위해 성벽 밖으로 내밀어 쌓아놓은 돌출부) 등을 복원할 예정이란다.

남문 앞에는 비석의 몸체는 없고 비좌를 꽂았던 홈만 파진 귀부가 하나 덩그러니 놓여있다. 아마도 선정비의 귀부일 것 같다. 2005년께 인근 주민이 땅속에 묻혀있던 것을 발견했다고 한다.

문루 왼쪽으로 무너진 성벽이 맞물려 앞으로 나와있는데, 옹성의 일부로 보인다. 전에는 홍예만 남아 황량한 느낌이었는데 문루를 올리니 번듯한 모습이다. 문 뒤쪽 홍예의 안쪽에 ‘南樓(남루)’가, 뒤 홍예에는 삼도수군통어영을 의미하는 ‘三道通門(삼도통문)’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다.

문루가 복원된 남문 유량루. / 교동도호부지와 안해루 장주초석. / 남문으로 가는 길에 있는 폐가. / 황룡우물. (사진 왼쪽 위부터 반시계 방향)
문루가 복원된 남문 유량루. / 교동도호부지와 안해루 장주초석. / 남문으로 가는 길에 있는 폐가. / 황룡우물. (사진 왼쪽 위부터 반시계 방향)

 교동도호부지

남문을 통과해 오른쪽으로 난 마을길을 따라가면 아전청으로 추정되는 곳에 개인주택이 들어섰다. 초석과 기타 석조물들을 울타리로 사용하고 있어 안타깝기 그지없다. 집 옆으로 밭으로 사용하는 공터가 있고 그 뒤축대 위 밭두렁에 누각 건물에 많이 쓰는 장주초석 2개가 보인다. 안해루가 있던 곳이다. 장주초석은 본래 4개가 남아있었는데, 나머지 2개는 교동초등학교 운동장으로 옮겨져 뜬금없는 자리에 덩그러니 서있다. 문화재 가치를 잘 몰랐던 사람들이 다른 용도로 쓰려고 옮기고 돌 표면도 깎아 크기도 작아졌다고 한다.

안해루 터 뒤에 돌계단이 있는데 여름에는 잡목과 풀이 우거져 잘 보이지 않고 올라가기도 힘들다. 그 위에 동헌과 객사가 있었던 곳으로 추정된다. 그런데 지금은 일본식 주택 폐가가 복구할 수 없을 정도로 무너져가고 있다. 이곳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면 삼도수군통어영이 있었다던 남산포 앞바다가 한눈에 들어온다.

교동도에는 예부터 왜구들이 눌러 살다시피 할 정도로 침입이 잦았다. 그래서 읍성을 쌓고 읍성 안에 주요 기관들이 들어앉았다. 동헌과 객사를 비롯한 내아ㆍ외아 같은 관청 건물과 안해루ㆍ상문루 같은 건물이 있었다. 그러나 세월과 함께 이 건물들은 모두 사라지고 그 자리엔 민가가 들어서거나 텃밭으로 일궈졌다.

현재 연산군적거지 우물. / 홍예 안쪽에 쓴 남루. / 울타리로 사용되고 있는 아전청 초석과 석물들. / 교동읍성에서 바라본 교동대교 방향. (사진 왼쪽부터)
현재 연산군적거지 우물. / 홍예 안쪽에 쓴 남루. / 울타리로 사용되고 있는 아전청 초석과 석물들. / 교동읍성에서 바라본 교동대교 방향. (사진 왼쪽부터)

 황룡우물과 연산군적거지

다시 길을 내려와 보니 길 건너편에 돌을 우물 정(井)자로 짜 맞춘 우물이 있다. 조선 태종 때 황룡이 출현했다고 해서 황룡우물이라고 부른다. ‘조선왕조실록’에 의하면 1418년(태종 18)에 허리 굵기가 기둥과 같은 황색대룡(黃色大龍)이 수군 군영 앞 이 우물 안에 가득 차게 보였다고 한다. 교동 수군첨절제사인 윤하가 조정에 보고해 기록됐다. 지금은 사용하지 않고 강화유리로 덮어놓았다.

계속 길을 가면 밭에 연산군잠저지(潛邸, 임금이 왕위에 오르기 전에 사는 집) 비석이 서 있었는데, 지금은 연산군적거지(謫居, 귀양살이를 함)란 비석으로 바뀌었다. 그 앞에 있는 우물 안 벽에서 나무가 뿌리를 박고자라 줄기를 자르고 철조망으로 막았는데, 지금은 깔끔하게 정비하고 강화유리를 덮었다. 이곳 외에도 고구리 연산골과 봉소리 신골에 유배지가 있다는데 집을 옮겨 다녔는지, 아니면 이 세 곳 중 하나인데 정확한 위치를 모르는 것인지 알 수 없다. 마을 사람들은 연산골이 유배지였을 것이라 추정하고 있다.

읍성 느티나무

연산군적거지에서 밭 위로 올라가면 수령 300년이 넘은 아름드리 느티나무가 성벽에 뿌리를 내리고 하늘을 이고 있다. 표지판에 보호수로 지정된 날짜가 1982년 10월 15일로 돼있고, 수령은 317년이라 적혀있다. 보통 보호수는 100년 단위이거나 10년 단위로 추정하는데, 317년이라고 정확하게 적힌 것을 보면 느티나무를 심은 연도가 어딘가 기록돼있을 것 같다. 성벽을 감싸고 있는 거대한 뿌리와 뻗어있는 가지들을 보면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이 느티나무 한 그루 보는 것만으로도 교동도 여행을 마감할 수 있을 것 같다.

읍성 성벽은 무너져 석성임에도 불구하고 흙으로 덮여 마치 토성처럼 보인다. 관리하는 것인지 군데군데 아래를 보면 바깥은 다듬은 막돌들로 허튼층쌓기를 한 것을 볼 수 있다. 성벽의 돌들은 세월이 내려앉아 겉 표면이 검은 색을 띠고 있다. 무너진 성벽에서 거무튀튀한 색과 대비되는 안에 박혔던 돌들의 원색, 시공을 거슬러 과거로 걸어 들어간다. 전립을 쓰고 순시하는 군관이 위풍당당하게 읍성을 걷고 있다.

성벽에 오르면 북쪽으로 화개산의 화개사와 향교가 보이고, 서북쪽으로는 월선포와 교동대교, 강화도의 별립산이 한눈에 들어온다. 남쪽으로는 삼도수군통어영과 사신당이 있던 남산포와 석모도가 보인다. 북쪽은 화개산이 막아주고 바다를 한눈에 바라볼 수 있는 곳에 읍성을 쌓은 것이다. 이곳에 한참을 앉아 읍성에 절묘하게 뿌리를 내린 느티나무를 생각하며 졸시 한 편을 올린다.(다음 편에 계속)

※ 천영기 선생은 2016년 2월에 30여 년 교사생활을 마치고 향토사 공부를 계속하면서 시민들과 함께 월 1회 인천 달빛기행과 인천 섬 기행을 하고 있다.

교동읍성 느티나무 단상

야음을 틈타

은밀하게 뿌리를 내렸다.
시작은 아무도 몰랐다.

야금야금 성벽을 가르고
돌 틈을 따라 벌려가는 촉수처럼
하늘도 조금씩 조금씩
길을 내주었다.

땅 속에 흙들을 움켜쥔 힘만큼
하늘은 부챗살을 빚었고
그 너비가 커지자
누구도 베지 못했다.

삶의 몸부림이
활짝 펼쳐진 파아란 하늘
족적이 찍히자
아무도, 아무도
벨 수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