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혜진 시민기자의 사연이 있는 요리이야기 86. 누룽지
심혜진 시민기자의 사연이 있는 요리이야기 86. 누룽지
  • 심혜진 시민기자
  • 승인 2020.02.17 1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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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혜진.
ⓒ심혜진.

[인천투데이 심혜진 시민기자] 작년 크리스마스 즈음 나는 많이 지쳐있었다. 연초부터 쏟아진 일거리가 연말까지 이어져 휴가 한 번을 제대로 못 갔다. 남들은 파티를 한다, 여행을 간다, 아니면 영화라도 본다는 성탄절에도 나는 책상 앞에 앉아 잘 써지지 않는 원고를 붙들고 있어야할 판이었다. 몸이 피곤하니 마음도 괜히 우울했다.

크리스마스이브 오후, 자판으로 글을 썼다 지웠다 하는데 핸드폰이 울렸다. “택배 왔는데 집에 계신가요?” 요사이 뭐 산 게 없는데 뭘까. 잠시 후 “쿵” 하는 소리와 함께 무거운 물건을 끄는 소리가 났다. 문을 열어보니 커다란 상자가 놓여 있었다. 그제야 생각이 났다. 봄에 주문해 둔 그림책이 드디어 왔구나!

내가 유년 시절을 보낸 1980년대엔 마땅한 유아용 책이 없었다. 집에는 과일 이름이나 교통수단이 투박하게 그려진 교육용 그림책이 두세 권 있었다. 그런데 어느날엔가 집에 반짝반짝한 그림책이 들어왔다. 그것도 한꺼번에 서른 권씩이나. 바로 ‘계몽사’에서 나온 ‘디즈니 그림 명작’이었다. ‘백설공주’와 ‘시골쥐와 서울쥐’ ‘정글북’ 같은 신나고도 따뜻한 이야기가 가득했다. 표지부터 속지까지 모두 화려한 컬러로 그림도 세련되고 예뻤다. 글자를 모르던 때부터 그 책을 끼고 살았다(고 한다). 내가 열두 살이 됐을 때, 친척 동생네가 그 그림책을 가져갔다. 서운했지만 주는 걸 반대하진 않았다. 언제까지나 그림책을 읽을 순 없다는 걸 나도 알고 있었다.

살면서 이따금 그림책이 생각났다. 제일 좋아했던 건 ‘늙은 나귀 좀생이’. 늙어서 일을 할 수 없게 된 나귀 좀생이를 아버지의 명령으로 아이가 장에 내다 파는 이야기다. 아이는 좀생이를 함부로 대하는 장사꾼들을 피해 다니다 한 부부를 만난다. 아이는 그 부부가 좀생이를 잘 보살펴 주리라 믿고 은화 한 닢을 받고 좀생이를 건넨다. 떠나는 좀생이를 보기 위해 아이가 높은 곳에 올라가 끝까지 손을 흔드는 마지막 장면이 슬프면서도 아름답게 남아있었다. 이후로 길에서 강아지를 볼 때면 나는 그 좀생이가 생각났다. 어쩌면 바쁘고 무뚝뚝한 부모님을 대신해 삶의 비밀과 인간의 도리를 알려준 건 그 그림책인지도 몰랐다.

어른이 된 후 그 그림책을 사려고 알아봤을 땐 이미 절판된 상태였다. 중고물품은 60권 전집이 무려 100만 원에 달했다. 늘 군침만 흘리던 중 작년 봄, ‘계몽사’에서 한시적으로 예약주문 판매를 한다는 글을 봤다. 중고물품의 절반도 안 되는 가격이었다. 나는 곧바로 주문했다. 그런데 책 복간 과정이 순탄치 않았던 모양이다. 인쇄가 늦어지는 사이 바쁜 일정에 그만 책을 주문한 사실을 까맣게 잊고 있었다. 아홉 달 만에 도착한 책이 더욱 반가울 수밖에 없었다.

30년 만에 다시 펴본 책들. 신기하게도 모든 장면이 기억났다. 늘 돈에 쪼들렸던 엄마는 60권짜리 그림책을 절반만 사 주었다. 뒤늦게 나머지 책을 펼쳐보는 것도 꽤 재밌었다. 책장을 넘기는데 어디선가 구수한 냄새가 나는 것 같았다. 뭔가 옆에 있어야할 것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허전함의 정체가 뭘까 한참 생각했다. 아, 그렇지, 누룽지가 있었지….

어렸을 때 엄마는 밥을 푸고 남은 누룽지를 긁어두었다가 내가 책을 볼 때면 간식으로 내줬다. 나는 방바닥에 엎드려 누룽지를 먹으며 이미 수백 번 본 책을 보고 또 봤다. 손에 축축하고 끈적한 누룽지 검댕이 묻으면 책장에 문질러 닦았다. 예쁜 그림책은 검은 손자국으로 얼룩덜룩했다.

책을 읽을수록 구수한 냄새가 점점 더 진하게 나는 것 같았다. 쫀득쫀득한 식감도 되살아나는 듯했다. 나와 놀아주지는 않았지만 늘 나를 지켜보며 나름의 방식으로 내 곁에 있었던 엄마의 모습도 떠올랐다. 뭔가를 더 찾고 싶은 마음에 다급하게 ‘좀생이’ 책을 펼쳤다. 언제나 그리웠던 늙은 나귀. 인제 보니 그 온화했던 부부는 요셉과 마리아였구나! 마리아의 뱃속 아기는 예수님이렸다. 종교도 없으면서 괜히 울컥 눈물이 났다. 그래도 우울하진 않았다. 그 순간 알았다. 이 모든 것은 내가 받은 최고의 크리스마스 선물이란 걸. 어린날의 만화책과 누룽지, 그리고 그날을 떠올리며 느끼는 그리움과 충만함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