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투데이 심혜진 시민기자] 빨래를 남편이 전담한 지 1년 조금 넘었다. 결혼 초부터 집안일을 나 몰라라 하는 남편 때문에 많이 다퉜다. 게으름이 문제인가, 무관심이 문제인가, 고민했다. 6년이 지나서야 알았다. 자기 일이란 생각이 아예 없는 게 문제라는 걸. 나는 무수한 집안일 가운에 가장 티 나는 몇 가지를 남편에게 통째로 맡기기로 했다. 청소기 돌리기, 빨래, 쓰레기 분리수거다. 처음 남편은 “그럼 넌 뭘 하려고” 하는 반응이었다. 그 외의 모든 일을 내가 한다고 답했다. 남편은 잠시 화장실과 현관, 고양이 화장실, 냉장고, 싱크대 등을 빠르게 둘러보더니 알겠다고 했다.

하루라도 청소기를 돌리지 않으면 바닥에 고양이 두 마리의 털 뭉치가 굴러다닌다. 청소기 돌리는 게 익숙지 않은 남편은 처음엔 요리조리 머리를 굴리며 청소안 할 핑계를 찾더니, 자신도 털 날리는 게 싫었던지 요즘은 군말 없이 청소기를 돌린다. 역시 습관이 중요하다. 쓰레기는 2~3주에 한 번 갖다 버리는 듯하다. 이 또한 별 불만이 없다.

문제는 빨래다. 남편이 빨래하는 방식은 이렇다. 1주일에 한 번, 외출하기 직전 세탁기에 돌려놓고 나간다. 다음 날, 또는 다다음 날 세탁기에서 빨래를 꺼내 건조대에 넌다. 다 마른 빨래는 일주일이고 열흘이고 건조대에서 내려올 줄 모른다. 세탁이 끝남과 동시에 널고, 마르면 곧바로 걷고, 차곡차곡 개어 서랍에 넣어두는게 일반 상식인 줄, 나는 알았다. 남편의 행동은 여러모로 파격적이어서 이해하기 힘들었다. 그렇다고 내 손이 닿기 시작하면 결국 빨래는 다시 내 몫이 될 게 분명하다. 세탁기에서 젖은 채 하루 이틀 묵은 옷을 입는다고 생각하니 찝찝했다. 결국 널기 직전 헹굼을 한 번 더 하는 것으로 타협했다. 다 마른 옷이 몇날며칠 베란다에 걸려 있는 게 햇빛에 색이 바랄 것 같고, 특히 미세먼지 많은 날엔 오염물질들이 옷 사이로 파고들 것 같아 찝찝한데, 남편은 아무 상관없다 한다. 그래서 남편 옷은 놔두고 내 옷만 정리하기로 했다.

두 사람 사는 집 빨래하기가 이렇게 골치가 아프고 어려워서야. 그나마 세탁기가 있으니 타협이라도 하고 넘어간다. 손빨래하던 시절에 이 사람과 결혼했다면, 때가 덜 빠졌네, 어쨌네 하는 문제까지 추가될 게 분명하다. 문득 커다란 고무대야에 다섯 식구가 벗어 놓은 옷을 모두 넣고 빨래판에 옷을 비벼 손빨래하던 엄마가 떠올랐다. 그 많은 옷을 어찌 손으로 다…, 생각만으로도 허리가 아프다. 엄마에게 전화를 걸어 그 시절 이야기를 들어보기로 했다. 엄마는 고무대야와 빨래판을 사용한 건 그래도 양반이라며 아주 오래전 경험을 꺼내놓았다.

“옛날엔 수도가 없었잖아. 나는 시골에서 살아서, 산에서 내려오는 물을 가둬서 웅덩이를 만들어놓고 그물을 길어다 먹었어. 그러면 웅덩이 물이 아래로 더 흐를 거 아냐. 거기에서 빨래를 했어. 웅덩이 물이 지저분해지면 안 되니까 그 아래에서 한 거지. 산이 없는 동네에 살 땐 논에서도 했지. 깨끗한 물이 땅에서 솟는 논이 있거든. 가물 때 대비해 그 물을 가둬놓는데, 거서도 했어. 땅 주인도 뭐라 안 했어. 주인이 못 오게 한다는건 상상도 못하던 시절이야. 못 살아도 그런 인심은 좋았지. 우물? 우물에선 빨래하기 힘들어. 생각해봐. 우물이 깊은데 그 물을 언제 다 길어서 해. 힘들어서 못해.”

아, 우물에선 빨래를 못한다는 걸 처음 알았다. 그렇지, 김홍도나 신윤복의 그림에 냇가에서 빨래하는 장면이 나오지만, 우물은 등장하지 않는다. 그림 속 여성들은 빨랫방망이를 들고 있다. 방망이로 옷을 치면 빨래가 됐던 걸까?

“옛날 천은 광목같이 되게 억센 게 많았거든. 그런 것은 물을 먹으면 짤 수가 없어. 청바지를 짠다고 생각해봐. 힘들잖아. 그래서 방망이로 두들기는 거야. 반반한 돌에 빨랫감을 놓고 비누칠을 해. 그 담에 방망이로 팍팍 두들기면 때도 가시고 비눗물도 빠지는 거야. 그 방망이가 끝이 좀 뾰족하게 생겼어. 아래쪽은 네모난 데 위쪽은 삼각뿔처럼 생겼단 말이야. 그래야 방망이를 두들겼을 때 물이 방망이 끝으로 빠져나가 사방으로 물이 안 튀어. 물론 나한테도 튀긴 하지만 그건 뭐 어쩔 수 없지. 하여간 방망이는 지금으로 말하면 탈수기나 마찬가지야.”

막연히 방망이질로 때를 뺀다고만 생각했지, 탈수 역할을 했다는 것 역시 처음 알았다. 끝을 뾰족하게 만들어 물이 흘러가게 했다니, 참 지혜롭다고 생각한다.

제일 힘든 건 손 시린 거

‘우리나라의 어느 시내나 연못가에서 볼 수 있는 것이 예 대로의 빨래 방식이다. 큼직하고 판판한 돌 위에 빨랫감을 올려놓고 열심히 두드리고 있는 여인의 모습은 지금도 변함없다. 냇가에서의 빨래는 계절의 구분없이 어느 때나 볼 수 있는 풍경이지만 (…) 겨우내 밀렸던 빨래를 이고 여인들은 봄볕이 쏟아지는 시냇가로 모여든다.’ (1965.3.3. 경향신문)

엄마가 말해준 모습이 그대로 실린 기사를 찾았다. 이 기사에는 ‘겨우내 밀렸던’이란 말이 나온다.

“빨래할 때 제일 힘든 건 손 시린 거. 장갑이 없었으니까. 손이 물속에 있을 땐 그나마 시린 걸 몰라. 근데 손이 물 밖에 나오면 찬바람에 그냥 얼어버리는 거야. 곱는다고 해야 하나. 손등이고 뭐고 다 트고, 아프고 피나고 딱지 지고, 손톱 밑도 갈라지고 그랬지 뭐. 바깥에서 일하는 사람은 다 그랬어. 힘드니까 옷을 겨우내 안갈아입는 애들도 있었고. 그땐 왜 그렇게 콧물이 많이 났는지 몰라. 따뜻한 옷이 없어서 추워서 그랬을까? 휴지가 없으니까 옷에다 콧물을 하도 닦아 소매 끝에 허옇게 굳은 걸 손으로 떼어내고 그랬다니까. 봄이 오면 겨울에 덮었던 이불도 빨고 그래야 하니까 아무래도 빨래가 많았지.”

‘겨울철은 추위 때문에 자연 옷을 빠는 횟수가 줄어들고 옷의 더러움이 짙기 쉽다. (…) 해가 짧고 추위 때문에 빨리 마르지 않아 더러움이 타는 수도 많다. 먼저 짧은 하루지만 햇볕을 충분히 이용한다. 그러자면 빨래를 해가 뜨기 전에 끝내어 일찍부터 말리도록 한다. 아침식사가 늦는 가정이나 갓난아기가 있어서 아침이 분주한 경우는 밤에 빨아두었다가 아침에 일찍 널 수 있게 한다.’ (1964.2.4. 경향신문)

해뜨기 전부터 해가 진 후까지 빨래를 해야 하다니. 아무래도 이 기사는 빨래터가 있는 동네 사람들을 위한 기사인 듯하다. 아무리 그래도 겨울에 해가 없으면 더욱 추울 텐데 어떻게 빨래를 하란 말일까. 갓난아기는 아침에만 보채는 걸까. 겨울이 문제인 건 아니다. 현실성 없는 조언과 설명들은 계절을 불문하고 당시 신문 생활면을 가득 채우고 있다.

‘특히 여름철은 빨래가 세찬 계절이다. 그러나 무더운 때 그늘진 곳에서 찬물에 손을 담그고 깨끗하게 빨래하는 마음은 퍽도 주부에게 즐거운 때이다.’ (1960.7.8.경향신문)

빨래가 퍽도 즐거웠겠다.

‘식모’ 줄고 세탁기 수요 늘어

집집마다 수도가 들어오면서 빨래는 한결 수월해졌다. 도시 마당엔 커다란 ‘빨간 고무대야’가 서너 개쯤은 있었다. 대야에 물을 가득 담아 빨래를 넣고 비누칠한 빨래를 빨래판에 비벼 빠는 모습. 어릴 적 자주 본 엄마의 모습이다. 아, 그런데 빨랫방망이는 어디로 간 걸까.

“옷감이 달라졌어. 나일론이나 폴리에스테르 같은 천으로 옷을 만드니까 물이 쭉쭉 잘 짜지더라고. 때도 잘 지고. 방망이가 필요가 없어졌지. 천이 부들부들해서 방망이질을 하면 옷감이 상하기도 했어. 청바지를 빨 땐 방망이 생각이 나기도 했어. 잘 안 짜지니까 비눗물 빼기가 힘들더라고. 집안일이 너무 많아 너희한테 옷 더럽게 입지 말라는 말을 많이 했지. 이불 빨기가 제일 힘드니까 외출옷 입고는 이불도 못 덥게 했고. 지금 생각하면 너무 했나 싶기도 한데, 빨래하고 나면 몸이 막 힘드니까. 그래도 하기 싫다는 생각을 한 적은 없어. 몸이 힘들고 피곤했던 거지.”

서양에 세탁기가 있다는 이야긴 1950년대부터 신문지면에 심심찮게 등장했다. 1960년대에 일부 부유층에서 세탁기를 들여오기도 했다. 그런데 1960년대 말 정부가 냉방기와 세탁기 등의 수입을 제한하는 일이 벌어졌다.

‘상공부가 수입제한 조처를 취하게 된 것은 전기 소모가 많은 냉방기와 전기세탁기의 급격한 수요 증가로 인한 전력 사정 악화를 막기 위해서라는 명분을 내세우고 있으나 업계에서는 이미 냉방기와 세탁기를 수입 해다 놓은 업자와 생산 업자에 대한 특혜를 주기 위한 처사에 불과하다고 지적하고 있다. (…) 전기세탁기는 67년도에 518대가 도입되었으며 국내 메이커는 금성사가 제너럴 부품을 수입 조립하는 독점상태에 있다.’(1968.4.17. 매일경제)

이 기사는 정부가 수입 업체와 금성사에 특혜를 주기 위해 더 이상의 수입을 막는 조치를 했다며 비판하고 있다. 실제로 금성사는 이듬해인 1969년, 일본 히타지(HITACHI)와 기술제휴를 맺고 금성 백조 자동세탁기를 출시했다. 국내에서 처음 생산한 전기세탁기다. 3년 후 금성사는 가정용 세탁기를 새로 제작해 판매하기 시작했다.

‘한꺼번에 와이셔츠는 10장, 시트는 5장을 빨 수 있는 이 세탁기는 세탁 타이머가 있어 조절해두면 자동으로 세탁이 완전히 된다. 세탁 후에는 오른쪽 통(탈수 통)에 넣으면 원심분리로 물기가 80~90% 빠져 여름철에는 그대로 입어도 될 정도로 거의 건조된다’ (1972.5.15. 매일경제)

1970년대 초만 해도 세탁기는 국내에 몇 천 대밖에 없었다. 그런데 1974년 한일전기ㆍ신일전기에 삼성전자까지 세탁기 시장에 뛰어들면서 공급 물량이 크게 늘었다.

‘금성사는 현재 연간 4만 대의 세탁기를 공급하고 있으며 한일ㆍ신일은 아직 시제 단계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해 3천 대 미만에 머무르고 있으나 앞으로는 생산량을 더 늘릴 계획에 있으며 삼성이 금성과 대등한 4만 대를 공급할 경우에는 공급량은 10만 대 선에 이르러 현재의 최대 추정 수요 5만~6만대 선을 크게 앞지를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1974.6.21. 매일경제)

1970년대 들어 세탁기 수요가 크게 증가한 것은 식모ㆍ가정부라 불리며 남의 집에서 식사ㆍ청소ㆍ빨래 등을 맡아 일하던 저학력 어린 여성들이 공장으로 빠져나간 이유가 컸다. 공장에 가면 정해진 임금을 받을 수 있었기에 젊은 여성들은 ‘식모’로 일하기보다는 공장을 택했다. 세탁기 업체들의 경쟁이 가열되면서 세탁기 용량이 커지고 물살의 세기를 조절할 수 있는 등, 세탁기의 품질 개발에도 힘썼다. 발맞춰 세탁기에 사용할 수 있는 가루비누도 생산됐다. 1970년대 말 세탁기 시장은 연간 30만대로 커졌다. 1980년대 중반 세탁기 기능이 좋아지면서 업체마다 신제품 개발에 몰두했다. 녹슬지 않는 세탁기, 손빨래 방식 세탁기, 빨랫방망이 방식 세탁기, 심지어 삶아 빠는 세탁기까지 등장했다. 삼성전자에서 생산한 이 세탁기는 계란까지 삶을 수 있다는 광고로 주목을 끌었다. 그러나 대중은 전기세 걱정에 이 세탁기를 외면했다. 그 이후 이 ‘계란 세탁기’는 실패한 광고 사례로 종종 언급된다. 이 시기를 거치며 세탁기는 가정 필수품으로 자리 잡았다.

“때 잘 빠질까?” 의심했던 세탁기

우리 집에 세탁기가 처음 들어온 건 1990년대를 몇 년 지나서였다. 세탁조와 탈수조가 따로 나뉜 반자동세탁기였다. 세탁기를 설치한 날, 나는 엄마의 일손을 덜 수 있으리란 기대로 기분이 좋았다. 그러나 그 세탁기는 사용할 수 없었다. 당시 우리 집은 산 밑 가난한 동네에서 펌프로 지하수를 끌어올려 사용하고 있었다. 세탁기를 사용할 만큼 물이 충분히 나오지 않았다. 우리 집은 1996년 내가 대학에 들어간 해에 산을 내려올 수 있었다.

뒤늦게 세탁기를 사용하게 된 것에 그리 아쉬움이 없었다고 엄마는 말했다.

“남들 다 쓸 때도 나는 솔직히 안 믿었어. 그게 때가 빠질까, 의심한 거지. 손으로 싹싹 비벼 빨아야한다고 생각했어. 나처럼 생각하는 사람 많았을걸. 그런데 딱 한 번 써보고는 생각이 완전히 달라졌지. 생각보다 때도 잘 지고, 몸이 안 힘든 거야. 이렇게 편하면 때가 좀 덜 지더라도 세탁기 써야겠더라고. 요즘은 세제가 좋아져 그런지 양말 때도 싹 빠지고 얼마나 좋은지 몰라. 빨래하는 거 하나도 안 힘들어. 나는 다시는 이전 시절로 돌아가고 싶지 않아. 정말로.”

나와 남편에겐 지겨운 빨래가 하나도 힘들지 않다는 엄마. 더 이상 엄마의 손이 겨울에 트지 않아서 참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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