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8~1954년 죽산 조봉암 어록 모아
올해 1920~1947년 어록 발간 계획

[인천투데이 이보렴 기자] 죽산 조봉암을 기념하는 어록집이 출간됐다.

죽산 조봉암 선생은 인천의 대표적인 독립운동가다. 지난해 12월 24일 첫 발행됐다. 이 책은 국회회의록, 당시 신문기사 등을 이용해 조봉암의 발언을 모아 엮은 책이다. 신문기자와 논설위원을 지낸 신동호 씨가 편저를 맡고, 죽산조봉암선생기념사업회가 발간했다.

죽산 조봉암 어록 1948~1954

죽산 어록 발간사업은 인천시가 지원하고 있다. 시는 이번에 출간된 ‘죽산 조봉암 어록 1948~1954’는 사업비 2000여 만원을 보조했다. 시는 이밖에도 조봉암 기념사업에 어록발간 사업비를 포함한 5000만 원을 지원했다.

시 문화재과 관계자는 “조봉암 기념사업을 지원하는 이유는 인천에서 태어난 기념할 수 있는 인물이며, 인천 애향심을 제고하기 위해서다”라고 말했다. 또 “발간사업은 지난해 1948~1954년 어록을 모았다면, 올해는 1920~1947년 어록을 발간할 예정”이라며 “죽산 선생의 생애 전부를 보려고 한다”고 전했다.

죽산은 강화도 선원면 태생이다. 이승만 독재정권 시절 빨갱이 누명을 쓰고 1959년 7월 31일 11시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지난 해는 죽산 서거 60년이기도 했다.

죽산은 1919년 강화에서 일어난 3·1운동에 주도적으로 참여했고, 모스크바 동방노력자공산대학에 유학한 엘리트였다. 죽산은 제1차 조선공산당을 창당해 일제강점기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가로 활동했다. 1932년 상하이에서 일본 경찰에 체포됐다가 1939년까지 신의주형무소에 복역했다.

죽산은 감옥을 나와 인천에 정착했다. 해방 직후 제헌 국회의원과 농림부 장관을 맡아 토지개혁을 주도했다. 죽산의 토지개혁은 강제로 땅을 뺏는 농지개혁이 아니었다. 우선 정부가 지주한테 도지를 매입할 때 현금을 준 게 아니라 정부 농지채권을 줬다. 그런데 이 채권으로 땅을 살 땐 시중 가격의 30%밖에 안 됐다.

반면 일본 적산(=적의 재산)을 매입할 땐 채권가격 그대로 인정했다. 즉 땅을 사는 것보다 적산을 매입하는 게 나았다. 이 과정에서 남한 지주가 산업자본으로 전환하는 토대가 마련됐다. 반면, 농민들에겐 무상에 가깝게 공급했다. 그렇게 1950년 4월부터 농민들에게 토지분배가 시작됐다.

이후 죽산은 이승만 정권의 방해로 1954년 3대 국회의원 선거 때 후보등록조차 하지 못했다. 이후 1958년 1월, 이승만 정권은 진보당에 대한 탄압을 시작해 죽산에게 간첩혐의를 씌워 체포했다. 1심에서 무죄를 선고받았지만 2심과 대법원에서는 사형을 선고받았다. 그리고 1959년 7월 31일 오전 11시, 재심 요청에도 불구하고 죽산은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곽정근 죽산조봉암선생기념사업회 회장은 “이 책이 죽산 선생님을 이해하고 그 뜻을 기리고 현대적으로 계승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됐으면 좋겠다”며 “이 책의 출간이 죽산 선생님에 대한 이해와 재조명, 그리고 그 뜻이 널리 확산되는 데 계기가 되기를 간절히 바란다”고 전했다.

박남춘 인천시장은 “대한민국 대법원이 재심을 열어 다시 죽산선생의 무죄를 선고한 것은 끔찍한 사법살인 이후 50여 년의 세월이 지난 뒤인 2011년이다”라며 “대한민국처럼 짧은 시간에 산업화와 민주화를 이뤄낸 국가는 많지 않다. 그 원동력을 생각해봐야 한다”고 말했다.

지용택 새얼문화재단 이사장은 “죽산 선생은 초대 농림부 장관으로 토지개혁을 단행했고, 상미 이후는 국회의원으로 노동문제, 토지문제, 평화통일 문제에 누구보다 앞서서 일했다”며 “이 책으로 죽산 선생의 깊은 뜻이 보다 젊고, 많은 이들에게 전해지길 바란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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