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영기 선생의 인천 섬 기행] 교동도(중)

화개사로 가는 길
 

화개사 법당.

화개사로 내려가는 길은 산을 에둘러 내려가기에 경사가 급하지 않다. 봉수대를 바로 지난 능선에서 난정 저수지 왼쪽 수정산과 오른쪽 율두산 사이를 간척한 농지가 드넓게 펼쳐진다. 반듯하게 정리된 농지와 이를 관통하고 있는 곧게 뻗은 수로, 그리고 산자락 밑에 올망졸망 모여 있는 마을들, 한눈에 들어오는 정겨운 풍광에 잠시 걸음을 멈춘다.

떨어지지 않는 발길을 옮겨 내려오다 보니 문무정(文武井) 표지판이 있다. 그 내용을 보니, 이곳 동쪽에 문정(文井)과 서쪽에 무정(武井), 두 개의 샘이 있었는데 지금은 하나로 합해져 그 흔적만 남았다고 한다. 전하는 말로는 문정에 물이 많으면 문관이, 무정에 물이 많으면 무관이 많이 배출됐다고 한다. 그러다 어느 날 샘물의 물빛이 바다 건너 송가도(석모도의 북쪽 섬으로 매립돼 삼산면 상리와 하리가 됨)에 비춰 부녀자들의 풍기가 문란해졌고, 이에 노승의 말에 따라 소금으로 메우자 진정됐다고 한다. 지금은 하나로 합해져 흔적이 남았다고 하는데, 주변을 살펴보았으나 정확한 위치를 찾을 수 없다.

조금 더 내려가니 화개사가 나온다. 화엄사에서 화개암, 그리고 화개사로 이름을 바꿨다. 이곳은 지금 비구니 사찰이다. 고려 때 지어진 사찰인데 ‘목은집’과 ‘속수증보 강도지’에 고려 말 문신인 목은 이색이 이곳에서 독서를 했단다. 1840년경 화재로 소실됐고, 1967년 다시 화재를 겪고 다음해 중건돼 과거에 건물이 어떤 모습이었는지 알 수 없어 안타깝다.

간척사업으로 조성된 농지.

법당은 팔작지붕에 겹처마나 서까래, 부연이 가는 나무인 것으로 보아 견고하게 짓지는 않았다. 기둥도 원기둥과 사모기둥이 섞여있고 문틀과 문들은 새로운 나무로 기둥 안쪽에 덧대어 만들어 고풍스런 맛이 전혀 없다. 아무튼 법당에 주칠한 서까래와 기둥들, 덧댄 문틀, 황토벽들을 보면 전혀 어울리지 않고 생뚱맞다.

그래도 이곳 화개사 법당 옆에 하늘을 찌를 듯 줄기를 뻗어 올려 넓게 펼친 솔가지를 산자락 위에 살포시 걸어놓은 노송의 늠름한 자태가 멋지다. 수령 200년이 넘었다. 한 폭의 수묵 담채화를 보는 느낌이다. 법당 마당에서 바라보는 풍광도 좋다. 구름장 터진 틈으로 햇살이 바다로 떨어져 상여바위를 환하게 비추고 있다.

유래를 알 수 없는 석종형부도 한 기 있는데 계단 아래 조성한 축대 위에 쓸쓸하게 서있다. 기단부와 탑신부, 상륜부가 하나의 몸돌로 이뤄졌다. 세월의 흐름이 조각의 형상을 깎아낸 탓에 기단부의 앙련(仰蓮, 연꽃이 위로 향한 모양의 무늬) 문양만 겨우 알아볼 수 있다.

읍내리 비석군
 

읍내리 비석군.

화개사에서 내려오다 향교로 꺾어지는 삼거리 길목에 1991년 교동 관내에 있던 비석들을 모아 비석군을 조성했는데, 2018년 향교 홍살문 옆 주차장 뒤로 다시 옮겼다. 조선시대 선정을 베푼 교동지역 목민관인 수군 절도사 겸 삼도통어사 도호부사, 방어사 등의 선정비 등 비석 총 40기가 세워져 있다. 그렇다고 모두 선정을 베푼 것은 아니다. 철저한 고증으로 위선적인 비는 따로 구분해 놓아야할 것이다.

특이한 것은 가로가 세로보다 폭이 넓은 선정비 4기다. 거사대(去思臺)라 적혀있어 유래를 찾아봤다. 국왕의 동정과 국정의 제반사항을 기록한 일기체 연대기인 ‘일성록’에 평안도 어사 박내겸(朴來謙)이 보고한 별단(別單, 순조 22년 1822)을 보면, “도내 수령들이 비를 세우고 공적을 기리는 것은 조가(朝家)에서 금하는 것인데 혹은 거사석(去思石)이라 하고, 혹은 거사대(去思臺)라고 하여 이름을 바꾸어 비석을 세우니 그렇지 않은 읍이 없습니다”라는 내용이 나온다. 이렇게 볼 때 거사비는 중앙정부의 단속을 피하기 위한 수령들의 꼼수라 할 수 있다.

교동향교
 

교동향교 내삼문.

인천시 유형문화재 제28호인 교동향교는 고려 인종 5년(1127년)에 세워졌다. 원래 화개산 북쪽인 고구리 향교골에 세워졌는데 교동읍이 읍내리로 옮겨짐에 따라 부사 조호신이 영조 17년(1741년)에 현재의 위치로 옮겼다. 현존하는 우리나라 향교 243개 중 가장 오래된 것이다. 고려 충렬왕 12년(1286년) 안유가 왕을 따라 원나라에 가서 공자와 주자의 초상을 처음으로 그려서 돌아오는 길에 이곳에 임시로 봉안했다 개경으로 옮겨갔다는 기록이 있다.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공자의 초상을 모신 의미 있는 장소다.

향교 입구에는 항상 홍전문(紅箭門, 홍살문)이 세워져 있다. 붉은 칠을 한 문으로, 둥근 기둥 두 개를 세우고 위는 붉은 살을 꽂고 가운데 태극문양을 새긴 삼지창 모양을 새겨 넣었다. 이 문부터가 향교의 영역이라고 보면 된다. 하마비는 보통 ‘대소인원개하마(大小人員皆下馬)’라고 쓰여 신분에 관계없이 말을 타고 오지 말라고 하는데, 이곳에는 ‘수령변장하마비(守令邊將下馬碑)’라 쓰여 수령이나 장수라도 말에서 내리라 하고 있다.

홍전문.(홍살문)

홍살문을 지나니 멀리 외삼문이 보인다. 이는 양쪽으로 담장을 둘러 영역을 구획해 주며 출입을 위한 기능적 용도 외에도 상징적 의미로서, 산 자뿐만 아니라 죽은 자 또한 출입을 한다고 보아 가운데는 신문(神門), 양쪽 문은 인문(人門)이다. 또한 중앙간의 지붕은 양협 간의 지붕보다 한 단 높게 한 솟을삼문으로 해 상징성과 권위성을 부여했고, 가운데 신문은 항상 닫아두는데 영혼이 다니는 문으로 제례가 있는 날만 열린다.

외삼문에서 왼쪽으로 담장을 따라 돌면 성전약수가 있다. 물이 대성전 밑에서 발원했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다. 교동 제일의 약수로 위장병과 아토피성 피부염에 좋다고 알려져 많은 사람이 찾는다. 그리고 조선시대에 이 약수를 먹고 문성(文成)을 이룬 명륜당 유생이 많아, 교동도를 문장과 덕행이 뛰어난 인물을 많이 배출한 문향(文鄕)이라 불렀다. 그래서인가, 누군가 약수 앞에 하트모양의 돌무지를 쌓았다. 피식 웃음이 나온다.

강학공간인 명륜당과 동ㆍ서재
 

교동향교 외삼문.

향교는 공자 이하 유현(儒賢)의 위패를 모시는 문묘와 학생들을 모아 강습하는 학교가 병설돼있으며, 그 기능에 따라서 필요한 건물들이 배향공간(配享空間)과 강학공간(講學空間)으로 이뤄져있다. 교동향교는 구릉지에 세운 관계로 전학후묘(前學後廟)의 공간구조를 갖고 있다.

외삼문을 들어서니 강학공간의 중심 건물인 명륜당이 바로 나온다. 외벌대 기단 위에 정면 4칸 측면 2칸, 막돌초석 위에 사모기둥, 홑처마로 된 팔작지붕 굴도리집이다. 중앙의 2칸은 대청으로 하고 양 옆면을 대칭으로 1칸씩 온돌방을 배치했다. 향교의 본래 기능인 공자의 사상을 받들어 유생들에게 강학을 하는 교육장이다.

동재와 서재는 ㄱ자 집으로 이곳도 역시 팔작지붕으로 납도리집인데 규모는 동재가 서재보다 조금 크며, 동재에는 부엌이 서재에는 창고가 딸려 있다. 유생들이 숙식과 독서를 하던 곳이다. 명륜당에서 강학한 후동ㆍ서재에 와서 공부하다가 의문 나는 사항은 직접 스승에게 묻는 방식으로 공부를 하는데 대학원식 교육법이다.

특이한 것은 보통 집을 지을 때 칸수를 홀수로 하는데 명륜당은 4칸으로 짝수라는 것과 동재와 서재가 명륜당과 일렬로 배치된 것이다. 아마도 향교 건물의 초창기 형태 때문이 아닐까 생각한다. 명륜당의 단청을 제외하면 강학공간의 구조는 일반 민가와 다르지 않다. 그리고 명륜당과 동ㆍ서재의 정감 있는 굴뚝을 비교하는 것도 재밌다. 아, 동재 뒤에 장독대가 있는데 동재의 부엌과 관련이 있을 것 같다.

배향공간인 대성전과 동ㆍ서무
 

대성전.

내삼문은 대성전과 동ㆍ서무가 있는 제사공간으로 들어가는 입구로, 명륜당 바로 뒤 축대 계단 위에 있다.

그러나 굳게 닫혀있다. 계단 오른쪽 아래에 노룡암(老龍巖)이라는 작은 바위가 있다. 교동현 관아 동헌의 북쪽 층계에 있었던 돌로, 숙종 43년(1717년)에 이봉상이 ‘노룡암’이라는 글자를 새겼고, 영조 49년(1773년)에 손자 이달해가 글을 지어 새겼던 것을 순조 20년(1820년) 통어사 이규서가 ‘호거암장군쇄풍(虎距巖將軍灑風)’이라는 글제를 새겼다. 돌 아래쪽이 깨져 정확한 내용은 알 수 없으나 1982년에 지금의 위치로 옮겼다.

동제 뒤로 대성전으로 오르는 길이 따로 있다. 길 오른쪽으로 정면 3칸 홑처마에 방풍판이 달린 맞배지붕집인 제기고가 있다. 판장문을 달았는데 내부에는 제사용기들이 보관돼있다.

명륜당.

왼쪽으로 사주문을 들어서면 배향공간인 대성전 영역이다. 대성전은 막돌허튼층쌓기를 한 축대 위에 높다랗게 자리하고 있는데 정면 5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으로 좌우에 방풍판이 달려있다. 건물의 퇴간부에는 팔각 장주형 주춧돌과 원형 기둥을, 나머지는 방형초석에 사모기둥을 올렸다. 공포는 초익공에 겹처마를 써 권위 건물 특징을 드러낸다.

축대 아래 양옆으로 동무와 서무가 똑같은 구조로 서있다. 외벌대 위에 정면 3칸 측면 2칸, 방형초석에 사모기둥을 올렸고 홑처마에 맞배집붕집으로 방풍판을 달았다. 양쪽에는 여닫이문을 달았으며 가운데는 창호를 달았다.

교동향교는 올 때마다 정감이 새록새록 묻어나는 곳이다. 계절마다 보는 느낌도 다르지만 마치 시골집에 들렀을 때처럼 포근하게 감싸주는 기운이 있다. 향교 앞 코스모스, 동ㆍ서재의 시골집 분위기와 굴뚝들, 대성전으로 오르는 길 주변, 대성전에서 바라보는 풍광, 담장을 타고 올라 기와를 덮은 담쟁이덩굴 등이 눈에 어른거린다.

성전약수.

※ 천영기 선생은 2016년 2월에 30여 년 교사생활을 마치고 향토사 공부를 계속하면서 시민들과 함께 월 1회 ‘인천 달빛기행’과 때때로 ‘인천 섬 기행’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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