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인희 인천문화재단 인천역사문화센터 연구원

[인천투데이] 얼마 전 러시아 함선 돈스코이(Dmitriy Donskoy)호를 발견했고 이를 인양할 예정이라며 89억 원을 투자받은 혐의로 재판에 넘겨진 일당이 있다. 러일전쟁 중에 울릉도 앞바다에 침몰한 돈스코이호에 금괴가 가득하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어, 이를 믿고 일제강점기 이후 지속적으로 발굴 사업이 추진됐지만 결국 실패로 끝났다. 이번에 투자사기를 벌인 일당도 작년에 실형을 받은 것으로 안다. 일확천금을 얻고 싶어 하는 사람들의 마음이 담긴 보물선 에피소드였다.

돈스코이호 관련 기사를 보면서 2011년 충남 태안군 안흥항 마도 주변에서 발굴된 마도3호선이 떠올랐다. 배 이름에서도 알다시피 마도 해역에서 발견된 선박은 한 개가 아니었다. 마도 1호선부터 4호선까지 발견됐고, 1호선에서 3호선은 모두 고려시대 무신집권기 배로 확인됐다. 태안 안흥량은 난행량(難行梁)이라고 불릴 정도로 물길이 험난하다. 고려ㆍ조선시대에는 이곳에서 조운선이 자주 침몰했다. 당시에는 안타까운 일이었지만 이 때문에 갯벌에 갇힌 조운선이 타임머신을 타고 우리 앞에 올 수 있었다.

마도3호선에서는 유물이 쏟아져 나왔다. 선수ㆍ선미ㆍ돛대 등이 거의 완벽하게 남아 있다는 것 이외에도 도기ㆍ금속 등 유물 280여 점이 인양됐고, 목간도 35점이나 발견됐다. 목간에는 글씨가 쓰여 있었는데, 지금으로 말하면 택배 송장 같은 것이다. 고려시대에서 온 송장에 의하면, 마도3호선은 전남 여수에서 강화도로 발송하는 화물을 싣고 있었다.

그 화물의 내용물은 볍씨ㆍ보리ㆍ밤 등 곡물과 생선ㆍ젓갈류ㆍ홍합 털ㆍ사슴 뿔ㆍ직물 등 다양했다. 목간에는 상어ㆍ전복젓갈ㆍ홍합젓갈ㆍ마른 홍합ㆍ전복ㆍ견포(?脯, 개고기 포) 등과 함께 김영공(金令公)ㆍ유승제(兪承制)ㆍ신윤화(辛允和)ㆍ우삼번별초도령(右三番別抄都領)ㆍ기대랑(奇待郞)ㆍ김시랑(金侍郞) 등 수취인도 기재돼있었다. 여기에서 김영공(金令公)은 1258년(고종 45) 최의(崔?)를 죽이고 최씨 무신정권을 끝내 스스로 집권자가 된 김준(金俊, ?~1268)이다. ‘고려사’ 유천우(兪千遇) 열전에 보면, 영공은 김인준(金仁俊)을 가리킨다고 돼있다. 또, 김준 열전을 보면 김준의 초명은 김인준이며, 그의 아버지 김윤성(金允成)은 원래 천한 노비(賤?)였는데 주인을 배반하고 최충헌(崔忠獻)에게 투신해 그의 노비가 됐다.

김준은 용모가 늠름하고 성품이 너그럽고 활을 잘 쏘며 베푸는 것을 좋아했으며, 날마다 유협자제들과 술을 마셨다. 노비 출신의 김준을 박송비(朴松庇)와 송길유(宋吉儒)가 최충헌의 아들인 최이(崔怡)에게 천거해 전전승지(殿前承旨)에 제수됐는데, 이때부터 상승 가도를 달렸다.

김준이 영공으로 불린 때는 ‘고려사’에 의해 1265년(원종 6년)으로 추정할 수 있다. 유승제라고 나오는 인물인 유천우(1209~1276, 고려 고종 때 과거에 급제해 정계 진출)가 승제, 즉 승선(承宣)이 된 시기는 1263~1264년으로 보기에 이를 종합해 마도3호선의 침몰 연대는 1264년에서 김준이 죽은 1268년 사이로 본다. 바로 강도시기(1232~1270)가 끝나기 직전이다.

이렇듯 고려시대 강화 천도 시기에도 실권자를 향해 많은 물품이 진상되고 있었으며, 수도로 향하는 조운선은 그 목적지가 개경에서 강화도로 바뀌었을 뿐 그대로였다. 마도3호선 발견으로 고려시대 강도는 임시수도가 아니라, 국가시스템이 정상 작동하고 있던 명실상부한 고려의 두 번째 수도였던 증거가 하나 더 보태졌다. 진정한 보물선은 바로 우리 선조들의 일상생활을 품고 항해 도중 침몰해 750여 년을 차디찬 바다 속에 있다가 불현듯 우리에게 온 마도3호선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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