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장원 인천재능대 교수와 함께한 인천개항장 탐방
“건축물은 유ㆍ무형의 가치 ··· 보존 넘어 활용해야”

[인천투데이 조연주 기자] 1883년, 조선의 항구가 강제로 열렸다. 그렇게 인천 개항장에는 새로운 문화와 문물이 쏟아져 들어왔고, 건축물들이 다양한 모양으로 지어졌다. 이 모든 게 조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벌어진 일이었다.

손장원 인천재능대학교 실내건축과 교수는 건축물은 건물 자체로 의미와 함께 당대 역사적ㆍ 상징적 의미를 담고 있는 ‘유ㆍ무형의 가치’가 숨 쉬는 곳이라고 역설한다. 인천 개항장 거리에는 어떤 역사적 의미가 담겨있을까. 외세에 의해 강제로 문이 열린 아픈 역사를 담고 있는 개항장의 건축물을 우리는 어떻게 바라보고 기억해야할까. <인천투데이>는 인천 개항장 일대를 함께 돌며 손 교수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아래는 손 교수의 이야기를 정리한 것이다.

인천개항박물관(옛 일본제1은행 인천지점)에 구현해놓은 개항기 모습.(사진 조연주 기자)

인천 개항장의 표(表)와 리(裏)

1883년 1월, 일본에 의해 강제로 개항된 이후부터 다양한 건축양식의 건물이 개항장 일대에 지어지기 시작했다. 1950년 한국전쟁 이전에 지어진 근대 문화유산 건축물은 현재 인천에 210개가 있으며, 이중 172개가 중구와 동구에 밀집해있다.

개항장은 지금의 인천 중구와 동구 일대를 일컫는 말이다. 개항 당시 동구에는 조선인들이 모여 살았고, 중구에는 영사관과 관청 등 주요 행정시설이 들어서며 외국인들이 모여 살게 됐다. 경인전철을 기준으로 남쪽(중구)은 화려하고 잘 사는 동네가 됐고, 북쪽(동구)은 이른바 ‘못 사는 사람들’이 사는 동네였다. 이를 각각 개항장의 ‘표(表)’와 ‘리(裏)’라고 말하기도 한다. 화려한 겉면 뒤에 슬픈 역사가 숨어있다는 얘기다.

개항 당시 이곳은 외국인들에게 인천보다 제물포라는 이름으로 더 유명했다. 서해안 작은 포구이던 제물포가 개항과 함께 하루아침에 세계적 항구가 된 것이다. 제물포는 ‘체물포(chemulpo)’ 또는 ‘치물포(chimulpo)’라고도 불렸다.

프랑스 여행가 샤를르 바 라는 ‘조선 종단기(Voyage en Corée)’에서 제물포를 두고 “그것은 내 평생 처음 보는 아름다운 경관이었다. 해안선과 항구를 이루는 섬들을 따라 아기자기한 산봉우리들이 다채롭게 솟아있었고, 아침 햇살이 눈부시게 빛나고 있었다”고 묘사했다. 서양인의 눈에 제물포가 어떻게 비춰졌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청나라 사람들은 경사지에 반지하 형태의 건물을 세웠다.(사진 이보렴 기자)

해방 이후 우리 역사도 담겨있는 공간
‘마구잡이식 문화재 만들기’ 그만둬야

개항 이후 치외법권 지역인 조계지가 생겨났다. 일본 조계지를 중심으로 서쪽에 청국 조계지, 나머지에 각국 조계지가 형성됐다. 이때 만들어진 청국 조계지가 지금의 인천차이나타운이다. 청국 조계지가 차이나타운 부지로 이어진 것은 인천이 유일하다. 개항 당시 일본인들이 만들어놓은 도시구조는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일각에서는 개항장의 근대 건축물을 두고 ‘네거티브(부정적인, 나쁜) 문화유산’이라고 말한다. 치욕의 역사가 담긴 건물은 없애야한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개항장 건축물들은 해방 이후 우리 역사가 담겨있는 공간이기도 하다. 건물을 없애자는 건 우리의 역사를 지워버리자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개항장 거리 일대를 근대 역사와 문화ㆍ예술이 숨 쉬는 곳으로 거듭나게 하는 것은 그 역사를 부정하지 않는 데서 출발한다.

오히려 걱정해야할 것은 ‘마구잡이식 문화재 만들기’다. 중구는 2007년에 만국공원 복원사업을 한다면서 자유공원에 대표 건축물 다섯 개를 짓겠다는 계획을 발표해 크게 비판을 산 적이 있다. ‘그렇게 지은 건축물들은 문화적이거나 역사적 가치가 없을뿐더러, 환경적으로도 유해하다’는 비판을 넘지 못하고 결국 취소됐다. 건축물은 건물 자체로 의미를 띄는 게 아니라, 당대 역사적ㆍ상징적 의미를 담고 있는 ‘유ㆍ무형의 가치’가 숨 쉬는 곳이다. 그러한 이해 없이 겉모습에만 집착하니 그런 결과물이 나오게 된 것이다.

정작 보존해야할 건물들을 부수고 있다. 정권이 바뀌고 나서 건축문화유산을 바라보는 인식도 달라지고 있다고는 하지만, 중구 송월동 애경비누 공장이나 동구 만석동 신일철공소 같은 근대 건축물을 큰 고민 없이 없애버리는 걸 보면 크게 달라진 것 같지도 않다. 지난해, 부평구에 있던 일본식 목조건물 ‘아베식당’ 철거 소식도 안타깝다. 최근 얘기가 나오고 있는 부평구 부평2동 미쓰비시 줄사택 같은 경우도 한 줄 정도는 남겨둬야 한다고 생각한다.

팟알 카페는 당시 건물을 거의 그대로 보존하고 카페 이용자들에게 개방하고 있다.(사진 이서인 기자)

문화적 자원을 콘텐츠로, 이야기로 만들어야

근대 건축물을 문화유산으로 보존한다고 해도 다른 문제가 남는다. 바로 활용 문제다. 우리나라의 많은 문화유산을 보면, 보존하겠답시고 울타리 쳐놓고 겉모습만 대충 둘러본 다음 사진만 찍어가고 있다. 만지지도 들어가지도 못한다. 그건 반쪽짜리 보존이다. 건축문화재의 가치가 적극 재생산되는 방식을 고민해야한다. 문화적 자원을 콘텐츠로, 이야기로 만드는 것이다.

인천 개항장 건축물을 문화콘텐츠로 만들고 역사 이야기를 덧붙인 대표적 예시로 ‘팟알(pot R)’카페가 있다. 이 카페 건물은 개항기에서 해방까지 영업한 하역회사 사무소로 쓰였다. 기존 건축물을 약간만 손대고 거의 그대로 살려 보존하고 있다. 1층은 점포이고 2층은 주택인 일본의 전형적 상가건물 구조인 ‘마찌야’다. 팟알카페는 도꼬노마(=일본의 사랑방) 형태를 보존하고 2층과 3층을 시민들에게 개방하고 있다.

누군가 가장 좋은 건축물 활용법을 물으면, 최대한 손대지 않고 원형에 가깝게 보존하면서 다양한 용도로 사용하는 것이 바람직한 방법이라고 대답한다. 다만, 무분별하게 ‘카페’로 전환하는 것은 걱정스럽다. 카페는 지금도 많이 있고 주변 상권을 해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대만의 경우, 일제강점기에 지은 총독부 관사를 대만 총통부가 사용하고 있다. ‘식민 도시’가 남겨둔 건물을 ‘피식민 도시’가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호주 시드니에도 ‘쓰리 와이즈 몽키즈(3 Wise Monkeys)’라는 펍(=술집)이 있는데, 이곳이 원래 호주 국립 은행이었다. 국보(國寶) 문화재인데 펍이라니, 한국에서는 아직 상상할 수 없는 보존 형태다. 근대 건축물을 활용해 관광지로 자리매김한 중국 상해의 와이탄 거리도 좋은 예다.

개항장 거리에서 석조로 지어진 건물은 일본제1은행 사무소가 유일하다.(사진제공ㆍ인천 중구)

건축물이란 선세대가 후세대 위해 한 일종의 ‘저금’

대한민국 최초 서양식 호텔이라고 알려진 ‘대불호텔’도 개항장에 위치해 있었다. 인천시는 몇 년 전 그 건축물을 허물었고 최근 ‘대불호텔 전시관’으로 다시 지었다. 당시 건축물을 보존하는 게 더 가치 있는 일이다. 껍데기만 베껴 세운 것은 큰 의미가 없다. 지금 대불호텔 높이는 원래 높이보다 약 30cm 더 높은 것으로 확인된다. 아스팔트를 계속 덧대면서 지반이 점점 높아졌다.

당시 대불호텔을 일본인이 운영했다. 이에 질세라 세워진 스튜어드호텔은 중국인이 운영했다. 그래서 스튜어드호텔에는 주로 중국인, 대불호텔에는 주로 일본인이 묵었다.

세계에 퍼져있는 화교 대부분은 ‘광방(=광둥성 출신)’이다. 하지만 인천 개항장엔 ‘산방(산둥성 출신)’과 광방이 함께 머무르고 있어 ‘양방’이라고 불린다. 개항장 화교들의 삶은 세 종류 칼 끝에서 시작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는 ‘삼파도(三把刀)’라고 불리는데, 화교들이 외국으로 나갈 때 가져가는 칼 세 가지인 제봉가위(양장점), 이발가위(이발소), 요리칼(요리점)을 뜻한다.

청나라 사람들은 청국 조계지에 점포주택을 주로 세웠고, 중국식과 서양식 건축형태가 섞여있었다. 경사지에는 반지하 건물을 세워, 당시로선 특이한 경관이 연출됐다.

일본 조계지 건물들은 의양풍 건축양식을 띄고 있다. 의양풍은 일본을 벗어나보지 못한 건축가들이 일본 전통건축 관점으로 서양 건축양식을 보고 어깨너머로 배운 건축양식이다. 세모난 지붕모양을 문 위에 얹는 등, 르네상스식 구조물과 프랑스풍 건축물의 모습을 딴 화려한 장식이 특징이다.

개항장을 비롯해 서양 건축물 요구가 많아졌지만 이에 대응할 수 있는 서양 인력은 턱없이 부족했기 때문에, 일본 전통건축 장인들이 그 수요를 채웠다. 주로 목수였던 이들은 서양 건축 기법은 흉내 낼 수 있었지만, 돌이나 서양 건축재료를 사용하는 방법에는 익숙하지 않았다.

기술의 한계 때문에 진짜 석조를 쓸 수 없으니, 중요한 기둥과 하단 부분만 석조를 사용해 멋을 냈고 나머지는 돌처럼 보이는 벽돌을 사용했다. 개항장 거리에서 석조로 지어진 건물은 일본제1은행 사무소가 유일하다. 일본제18은행 인천지점과 일본제58은행 인천지점은 벽돌로 지은 건물이다.

건축물이란 선세대가 후세대를 위해 한 일종의 ‘저금’ 같은 것이다. 인천 개항장이 당대 건축물을 다시 활용하면서 관광지로 탈바꿈하고 있듯, 우리 뜻대로 지어지지는 않았지만 우리 뜻대로 보존하고 활용할 수 있어야한다. 단순히 예쁘지 않아 보여서, 낡아서 없애고 다시 짓는 식의 무분별한 개발은 지금 당장은 좋아보일지 몰라도 반드시 후세대에게 큰 짐으로, 빚으로 남게 됨을 잊지 않아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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