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녘에 가장 가까운 섬, 교동도(상)
북녘에 가장 가까운 섬, 교동도(상)
  • 천영기 시민기자
  • 승인 2020.01.13 1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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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영기 선생의 인천 섬 기행
교동도(상)

[인천투데 천영기 시민기자] 교동도는 강화나들길 9ㆍ10코스와 평화나들길(자전거길 130km)이 있는 곳이다. 이곳은 고려 때부터 지금까지 군사적 요충지다. 이런 까닭에 역사적 유물이 많이 남아있고, 1960년대 모습을 지닌 대룡시장과 간척사업으로 인한 드넓은 벌판과 고구저수지ㆍ난정저수지가 있다. 육지의 때를 덜 탄 다양한 생물과 철새 등이 서식하는 생태계의 보고이기도 하다. 북한과 거리는 가장 가까운 곳이 2.5km로 우리나라 섬 중에서 북쪽에 가장 근접한 섬이다. 그래서 관광객은 민간인 출입통제구역인 교동도에 들어가기 위해 군부대에서 출입증을 받아야 하는 번거로움이 있다.

화개산 표지목 뒤로 보이는 고구저수지와 북측 연백평야.
화개산 표지목 뒤로 보이는 고구저수지와 북측 연백평야.

교동도의 넓은 농지는 대규모 간척사업으로 이뤄진 것인데, 화개산(260m)을 중심으로 남서쪽 수정산(100m)과 서북쪽 율두산(밤머리산, 89m)은 원래 각각 나눠진 섬이었다. 고려 때 몽고의 침입으로 조정이 강화도로 천도하자 군량미 확보가 문제가 됐다. 이에 매립이 이뤄졌고, 일제강점기에도 대규모 간척사업을 진행해 현재와 같은 농지와 농수로를 확보했다. 그러나 개인 저수지인 ‘물꽝’으로는 농사짓기가 어려워 대규모 저수지인 고구저수지(1978년 완공)와 난정저수지(2006년 완공)를 축조했다.

2014년 7월에 교동대교를 놓았다. 그 전에는 창후리 선착장에서 1시간 간격으로 운항하는 카페리호를 타고 월선포로 들어갔다. 그래서 차를 가져가지 않으면 교동도를 여행하기 위해 자연스레 1박을 했다. 이제는 배가 아니라 차량으로 직접 들어갈 수 있다. 여행이 훨씬 편해졌다. 그런데 숙박시절은 전과 다름없이 몇 개 되지 않는다.

이러다 보니 당일치기 여행객만 늘어 식사 한 끼 하는 것 외에는 교동 관광수입에 큰 영향을 주지 못하는 것 같다. 대룡시장은 황해도 난민들이 들어오면서 만들어져 옛 풍물시장의 풍취를 고스란히 가지고 있는데, 매해 들어갈 때마다 가게들이 현대식으로 바뀌어 안타깝다. 교동 주민들이 지혜를 모아야할 때다.

교동도 관광안내지도, 2014년에 개통된 교동대교, 화개산 정상 정자에서 바라본 섬들, 효자묘. (사진 왼쪽부터 시계방향)
교동도 관광안내지도, 2014년에 개통된 교동대교, 화개산 정상 정자에서 바라본 섬들, 효자묘. (사진 왼쪽부터 시계방향)

조선 후기부터 사용한 한증막

교동면사무소 뒤로 화개산 정상으로 올라가는 길이 있다. 안내판이 있어 길을 잃지 않고 정상에 오를 수 있다. 산 밑자락에서 만나는 한증막, 연산골에 있는 연산군 유배지, 화개산성, 효자묘, 봉수대 터, 산 정상에서 조망, 그리고 산을 넘어 내려오면 남향으로 화개사와 향교가 있다.

면사무소 뒤로 500여m 산책하듯이 길을 가면 골짜기 쪽으로 커다란 돌무덤 같은 것이 보인다. 주민들이 1970년대까지 사용한 한증막 시설로 조선 후기부터 사용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곳뿐만 아니라 수정산을 비롯해 여러 곳에 한증막이 있었으나 대부분은 터만 남아있다. 이곳 한증막은 현대 찜질방의 근원이라 할 수 있으며, 선조들의 치병과 목욕 문화를 알 수 있는 학술적 가치가 높은 시설이다.

황토와 돌을 이용해 만들었는데, 마른 소나무가지 등으로 안에 불을 피워 온도를 높인 후 재를 꺼내고 생솔가지를 깔고 누워 땀을 낸 다음 옆 개울에서 냉수욕을하고 다시 이를 반복했다. 안에 들어가면 천장까지 돌들이 까맣게 그을려 있고 가운데는 불을 피웠던 자리도 확인할 수 있다. 한증막 옆으로는 물을 담았던 샘물터도 같이 보존돼있다. 체험학습장으로 만들어 땀 한번 흘리고 가면 좋을 텐데, 구조만 살필 수밖에 없다.

연산군 유배지에 세운 교동도유배문화관

연산골에 있는 연산군유배지 비석. 현재 이곳에 교동도유배문화관이 들어섰다.
연산골에 있는 연산군유배지 비석. 현재 이곳에 교동도유배문화관이 들어섰다.

2018년, 연산군 유배지에 교동도유배문화관을 만들었다. 이곳 골짜기에 ‘연산군유배지(위리안치)’ 비석만 덩그러니 놓여있었는데, 연산군이 위리안치(圍籬安置, 유배된 죄인이 거처하는 집 둘레에 가시로 울타리를 치고 그 안에 가두는 것)된 집과 폐위된 연산군이 유배올 때 탔다는 함거(죄인을 호송하거나 맹수를 잡아 가두는 데 사용하던 우리처럼 만든 수레)를 재현해 놓았다.

그러나 이긍익이 쓴 ‘연려실기술’을 보면, 중종반정(1506년)에 의해 폐위된 연산군은 붉은 옷에 갓을 쓰고 4인이 메는 평교자(조선시대 종일품 이상이 타던 뚜껑 없는 가마)에 올라타 창덕궁을 나와 김포ㆍ통진ㆍ강화를 거쳐 5일 만에 교동에 도착했다고 한다. 함거가 아닌 평교자를 탄 모습으로 바꿔야 할 것이다.

유배문화관 안에는 고려와 조선시대에 강화와 교동에 유배된 왕과 왕족들에 대한 설명이 걸려있다. 아마도 한양과 가까이 있어 감시와 격리가 쉬웠기 때문일 것이다. 고려 때는 희종ㆍ강종ㆍ충정왕ㆍ우왕ㆍ창왕이, 조선시대에는 광해군ㆍ안평대군ㆍ영창대군과 사도세자의 장남 은언군, 흥선대원군의 손자 영선군 등이 이곳에 유배됐다. 특히 이 골짜기는 연산군의 유배지로 추정되는데, 골짜기 지명이 연산골이고 주민들의 말을 들어볼 때 이곳에 연산군이 유배돼 살았을 가능성이 높다

화개산성 안에 있는 약수와 효자묘

화개산으로 올라가는 길 오른쪽으로 무너져내린 산성을 볼 수 있다. 더 허물어지기 전에 보수해야할 정도로 많이 무너졌다. 화개산성 축조 시기는 알려진 바 없고 내성과 외성의 이중구조로 된 포곡식 산성으로 내부에 우물과 샘이 하나씩 있었다고 한다. 둘레는 약2168m로 강화군 향토유적 제30호다. 성벽은 대부분 무너져있는데 1591년(선조 24) 교동현감이었던 이여양이 외성을 헐어 읍성을 쌓았다고 한다. 그 후 1677년(숙종3)과 1737년(영조 13)에 개축했는데 군창(軍倉)을 뒀다는 기록이 있다.

산을 오르다 가끔 뒤를 돌아보는 것도 좋다. 화개약수에 도착하기 전에 산 아래 고구저수지와 북쪽 연백평야가 한눈에 보이는 곳에서 잠시 숨을 고른다. 겨울 사진은 을씨년스런 느낌을 주지만 시야를 가리는 나뭇잎이 하나도 없어 풍경을 담기엔 제격이다. 꽝꽝 언 고구저수지 곳곳에서 사람들이 얼음낚시를 하고 있다. 연백평야는 마치 강물 건너편에 있는 것처럼 가까이 보인다. 실제 북한 주민이 헤엄쳐 탈출하는 사례가 빈번할 정도로 거리가 가깝다. 그러나 스쳐 지나가는 관광객에게는 평화롭기 그지없는 풍경이다.

산 9부 능선 정도에 화개약수가 있다. 이쯤에서 잠시 쉬어 약수 한 모금 축이는 것도 좋다. 약수터 오른쪽으로 석천 김홍기라는 사람이 쓴 시가 걸려 있는데 한번 읽어보며 ‘천년 비밀의 갸륵한 맛’을 음미해보자. 이곳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효자묘가 있다. 봉분만 있는데 희한하게 봉분 앞에 깊게 패인 자국이 있다. 그 이유가 봉분에 얽힌 이야기에 있다.

효자묘는 대략 삼국시대를 배경으로 추정하고 있다. 병환 중인 홀아버지를 모시고 살던 청주골의 지극한 효자인 신 씨가 아버지 공양식 제공을 대가로 부유한 자제 대신 화개산성에 병사로 징발됐다. 자식의 안부가 걱정인 아버지는 고목근현(현재 고읍마을)으로 이사를 해, 살아있다면 매일 해가 질 무렵 북루에 하얀 적삼을 걸어 생존을 알리라고 아들과 약속했다. 그러나 이를 수상히 여긴 장수가 적삼을 못 매달게 했다. 이에 자식이 죽은 줄 안 아버지가 목숨을 끊자, 나중에 이를 안장수가 산성 안 이곳에 무덤을 만들게 해줬고 삼년 시묘를 허락했다. 그리고 병사들과 함께 효자를 기리며아침마다 참배했는데, 그 참배 자국이 아직도 남아있다.

한증막, 화개약수터, 간척사업으로 조성된 농지, 화개산 봉수대 하부 석축. (사진 왼쪽부터 시계방향)
한증막, 화개약수터, 간척사업으로 조성된 농지, 화개산 봉수대 하부 석축. (사진 왼쪽부터 시계방향)

화개산 정상에서 조망

화개산은 해발 259.6m의 낮은 산으로 정상에는 정자가 있다. 산정에서 사방으로 움직이며 조망하면 탁 트인 시야에 교동도와 주위 풍경을 파노라마처럼 눈 속에 담을 수 있다. 화개산 표지목에서 왼쪽으로 눈을 돌리면 간척된 드넓은 벌판이 보이고 바로 아래로는 고구저수지와 바다 건너 북쪽 황해도 연안군에 위치한 연백평야가 손에 잡힐 듯 들어온다.

정자 바로 아래에 향교와 읍성, 바다 한가운데 응암(상여바위), 그 뒤로 석모도와 강화도가 보인다. 눈을 오른쪽으로 돌리면 기장섬ㆍ미법도ㆍ서검도, 그 뒤로 주문도ㆍ아차도ㆍ볼음도 등 올망졸망한 섬들이 수평선을 끌어당기며 활짝 펼쳐진다. 일망무제, 거칠 것 없이 섬들이 끝 간 데 없이 뻗어있어 자리를 털고 일어날 수 없다.

화개산 정자에서 오른쪽으로 가다보면 이어진 봉우리 정상에 고려시대부터 사용했다는 봉수대가 있는데 하부 석축이 잘 보존돼있다. 강화군 향토유적 제29호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을 보면, 남쪽으로 강화도 망산(덕산, 내가면) 봉수에서 연락을 받아 동쪽으로 하음산(봉천산) 봉수로 응한다고 돼있다. 현재는 가로 8m, 세로 6m가량의 석단만 남아있는데 봉수대는 과연 어떤 모습이었을까.

※ 천영기 선생은 2016년 2월에 30여 년 교사생활을 마치고 향토사 공부를 계속하면서 시민들과 함께 월 1회 ‘인천 달빛기행’과 때때로 ‘인천 섬 기행’을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