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수연 인하대 프런티어학부대학 교수

[인천투데이] 2020년 새해가 밝았다. 지난 연말 <교수신문>은 올해의 사자성어로 ‘한 몸에 두 개의 머리를 가진 새’를 의미하는 ‘공명지조(共命之鳥)’를 뽑았다. 시샘이 많았던 한 머리가 다른 쪽의 먹이에 독약을 넣었고, 한 몸을 가지고 있었던 두 머리 모두 죽고 말았다는 이야기를 가진 성어다. 그런데 이 화두는 그리 새삼스러운 것도 아니다. 지난 우리의 근대사에서 ‘공명지조’ 현상은 너무나도 많았기 때문이다.

‘먼 옛날 이 연못엔 예쁜 붕어 두 마리 / 살고 있었다고 전해지지요. / 깊은 산 작은 연못 // 어느 맑은 여름날 연속에 붕어 두 마리 / 서로 싸워 한 마리는 물위에 떠오르고 / 그놈 살이 썩어 들어가 / 물도 따라 썩어 들어가 / 연못 속에선 아무것도 살 수 없게 되었죠.’( 양희은의 ‘작은 연못’ 일부분)

1997년 양희은의 ‘아침이슬’이란 앨범에 실린 ‘작은 연못’이란 곡은 이 화두의 의미를 보다 쉽게 설명해준다. 동화 한 편 같은 느낌을 주는 이 노래는, 민중가요의 대표주자 중 한 사람인 김민기가 작사ㆍ작곡한 곡이다. 김민기 자신이 ‘어린이를 위한 노래’라고 이름붙인 서정적인 곡이지만, 그 안에 담긴 메시지는 상당히 묵직하다.

공생과 공존의 가치를 잃어버린 공동체는 어떻게 되는가? 이 노래는 거기에 대한 답이다. 작은 연못에서 일어난 붕어들의 다툼은 처음부터 비극은 아니었으리라. 이 작은 연못의 맑음은 어쩌면 두 붕어가 일으키는 물결에서 비롯한 것일지도 모른다. 실제로, 논쟁이 한 사회의 모순을 수면으로 끌어올리는 정화로써 기능한다는 것을 떠올린다면 이 다툼 역시 건강성을 지닐 수도 있었다.

문제는 그것이 이기적인 몽니로 변질될 때 발생한다. 맑은 연못을 더러운 물구덩이로 만드는 파국처럼, 논쟁의 타락은 사회 전체의 건강성을 해치는 결정적 장애가 되기도 한다. 실제로 2019년 우리는, 현실 정치의 곳곳에서 이러한 몽니를 수도 없이 목도했다. 민생법안을 볼모로 필리버스터가 악용된 것이 대표적 사례라 할 것이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것은 이러한 어려움 속에서도 공수처(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 법안이 무사히 통과됐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적어도 고인 채로 썩고 있는 물을 내보낼 수 있는 물꼬를 텄다는 의의를 가진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니다. 권력의 비리를 직접적으로 수사하는 공수처의 기능이 제대로 수행되기 위해서는 정교한 제도적 장치들이 뒤따라야한다.

동시에 맑은 물이 들어올 수 있게 물길을 대는 과정도 병행해야한다. 국민소환제는 그 답이 될 수 있다. 현행 국민소환제는 지방자치단체장과 지방의원에게만 적용된다. 국민을 대리하는 국회는 대통령 탄핵소추권을 갖는다. 그런데 정작 국회의원을 견제할 수 있는 방법은 요원하다. 그 때문에 단 4개월 고개 숙이고, 3년 6개월간 국민에게 위임받은 권력을 자기 것처럼 사용하는 국회의원이 넘쳐난다. 그들을 제재할 길이 없기 때문이다. 국회의원 국민소환제 필요성은 이 지점에서 절실해진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시민들의 인식이다. 공수처 법안 처리과정을 반추해보자. 일부 언론은 법무부 산하기관인 검찰을 사법부와 동일시하는 의도적 오류를 자행했고, 인터넷에는 그것을 악용해 진실을 왜곡하는 가짜뉴스가 넘쳐났다. 입법부를 직접적으로 겨냥하고 있는 국민소환제가 넘어야할 산이 이보다 더 높고 험난할 것은 자명하다. 따라서 새해의 기쁨을 마냥 즐길 수만은 없다. ‘포스트 2019’의 과제는 아직 진행 중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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