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영기 선생의 인천 섬 기행
연평도(하)

[인천투데이 천영기 시민기자]

연평도 구리동해변.

연평도 등대공원으로

연평도 서남단 언덕 위에 등대공원이 있다. 입구 양쪽에 사라호 태풍을 배경으로 한 노래비 ‘눈물의 연평도’와 ‘풍어의 연평도’가 서있고 공원 안에는 놀이터와 체육시설, 조형물이 펼쳐 있다. 이곳을 지나 계단 위로 올라가면 사각형으로 3층을 올린 하얀 등대가 나온다. 연평도가 조기파시로 유명해 국내 각지에서 배 수천 척이 몰려들었는데, 1959년 사라호 태풍으로 수많은 어부가 희생당했다. 이에 해무청은 1960년 3월에 조기잡이 어선들 길 안내와 안전을 목적으로 이곳에 등대를 설치했다.

그런데 남쪽으로 귀순한 북측 사람이 연평도 등대 불빛을 따라왔다고 진술하면서 간첩 침투용으로 활용될 수 있다는 판단에 따라 1974년 7월에 소등했고, 1987년 4월 등대로서 용도를 폐지하면서 이 일대를 공원으로 만들었다. 그리고 올해 5월 17일 남북 간 긴장이 완화되자 등대에 다시 불을 밝혔다.

등대 오른쪽 뒤로 바다를 바라볼 수 있는 꼭대기에 ‘조난어업자위령비’가 서있다. 이 비는 1934년 6월에 발생한 폭풍으로 인한 희생자들의 영혼을 달래고 유가족들을 위로하기 위해 그해 9월 황해도수산회에서 세웠다. 원래 연평어업조합 서쪽에 있던 것을 이곳으로 옮겼다. 글씨는 황해도지사 정교원이 썼다. 피해 어선 수가 323척, 사상자가 204명에 달했다.

주민은 굴을 따고 중국 어선군단은 그물을 드리워 어족자원을 싹쓸이한다.(사진 위) / 조기역사관 2층 전망대에서 바라본 가래칠기해변. 북녘의 땅이 손에 잡힐듯 가깝다.

조기역사관에서 조망

위령비에서 오른쪽으로 돌아들면 조기역사관으로 갈 수 있다. 입구에는 조기섬 조형물이 있고, 조기파시때 우리 어선의 모습을 만들어 올렸다. 역사관 왼쪽 마당에 연평도 고유의 민속 소리인 ‘니나나나’와 ‘배치기소리’를 양면에 적은 비석이 서있다. 삶의 애환과 풍어를 노래하는 가사가 흥미롭다.

조기역사관 1층은 역사관, 2층은 전망대다. 역사관에는 연평도 역사부터 조기파시와 조기에 관한 자료들이 전시돼있다. 조기는 회기어종으로 제주도 남서쪽에서부터 발해만까지 이동하고 양쯔강 하구에서 겨울을 난다고 한다. 봄철에 연평어장에 도착하는데 ‘10억 조기떼의 이동’이라고 한다. 이중 수억 마리가 연평도 앞바다에서 잡혀 소금에 절여 팔려나갔다. 배 3000여 척이 해변을 따라 정박한 장관을 사진으로밖에 볼 수 없는 아쉬움에 발길이 쉽게 돌려지지 않는다.

2층 전망대에 오르면 북서쪽으로 병풍바위를 비롯한 기암괴석 절경인 가래칠기해변을 내려다볼 수 있다. 연평도에서 제일 멋있는 장관을 마주할 수 있는 곳이다. 해안 절경만이 아니라 날이 맑으면 북녘 땅이 손에 잡힐 듯 가까이 보인다. 발걸음이 쉽게 떨어지지 않는다.

전망대 뒤쪽으로는 구지도가 보인다. 마치 분화구처럼 생겨서 이국에 온 느낌이다. 구지도는 한자말이 분명할 텐데 이곳에서 바라보면 거북 형상과는 영 다른 모습이다. 그래서 계속 의문을 품고 있었는데, 이번에 거북의 모습을 딴 이름이라는 것을 확인했다. 백로 서식지 해변에서 보니 거북의 모습이 그대로 나온다.

다시 불을 밝힌 등대공원의 등대. / 해안철책 너머로 보이는 구리동해변. / 가래칠기해변 통문. / 조기역사관. (왼쪽 위부터 반시계 방향)

연평도 평화공원

연평도 평화공원은 제1ㆍ2연평해전 교전 장소가 멀리 바라다 보이는 곳이기도 하고 북녘 땅이 코앞에 보이는 곳에 조성했다.

연평해전 전사자를 기리고 교전 상황을 살펴볼 수 있는 추모ㆍ기억의 벽과 추모비, 군수장비 전시마당, 광장, 산책로, 전망ㆍ휴게 공간 등으로 구성돼있다. 추모의 벽은 높이 2m, 폭 25m의 화강석판 위에 제2연평해전 전사자 6명과 연평도 포격 전사자 2명의 흉상이 동판으로 부조돼있고, 그 옆에 설치된 ‘기억의 벽’에는 제1ㆍ2연평해전 상황도가 상세히 나와 있다. 그리고 공원 한가운데에는 연평도 해안 방어를 위해 설치된 구조물과 같은 모습으로 ‘용치(龍齒)’를 상징하는 추모비 25개가 서있다. 제2연평해전에서 용감히 싸운 해군 사상자 25명을 기억하고 기리기 위한 것이다.

이중 6개는 산화한 용사 6명의 넋과 희생정신을 위로하고 후세에 영원히 기억되게 하기 위해 색이 변치 않는 두랄루민 재료를 사용했으며, 나머지 19개는 생존한 장병들의 용맹무쌍함을 기리기 위해 코르덴강판을 사용해 시간이 지날수록 더 짙은 색이 배어나오게 했다. 이곳을 돌아 아래로 내려가면 2012년 11월 24일 북한의 포격으로 산화한 고(故) 서정우 하사와 문광욱 일병을 기리는 ‘연평도 포격전 전사자 위령탑’이 연평도 앞바다를 묵묵히 내려다보고 있다.

그런데 평화공원에 연평도 포격으로 희생된 민간인들을 기리는 위령탑은 보이지 않는다. 과연 평화는 우상화에서 올 수 있는 것인지, 혹시 우상화는 또 다른 위험이나 더 격한 모험을 하게 만드는 것은 아닌지. 언제까지 우리 군인과 민간인은 국가에 의해 희생을 강요당해야 하는 것인지, 평화의 가치는 오히려 가엾다는 공감을 가질 때 다시는 이런 비극이 없어야 한다는 자각이 오는 것은 아닐지. 그래서 희생된 민간인들도 기리는 장이 평화공원에 추가돼야할 것이라 생각한다. 그래야 희생자를 진정으로 애도하고, 누구도 희생당하지 않는 평화를 기릴 것이다.

구리동해변으로 가는 길

‘연평도 포격전 전사자 위령탑’ 왼쪽 아래로 조금 급한 경사를 내려가면 가래칠기해변으로 들어가는 통문이 보인다. 낮에는 개방해 일반인이 출입할 수 있다. 해변은 온통 몽돌이 깔려있는데 바닷가 끝 암초 위에서 사람들이 낚시를 하고 있다. 왼쪽 절벽 위에는 조기역사관이, 오른쪽으로는 병풍바위가 보인다. 병풍바위 너머에도 해안절경이 펼쳐져있다. 밀물 때 이 해안을 따라 계속 걸으면 구리동해변까지 갈 수 있다는데, 정확하게 물어볼 사람이 없어 통문을 나와 철책을 따라 걷기로 했다.

철책을 따라 구리동해변으로 가는 길은 경사가 완만해 힘들지 않다. 연평도 포격으로 다른 산등성이는 불에 타 거의 민둥산처럼 됐는데, 이곳은 자연숲길이 그대로 보존돼있다. 다만 군사시설이 곳곳에 있어 철책 길을 계속 갈 수 없는 것이 조금 아쉽다. 구리동해변 가까이에서 차도로 방향을 틀어 내려가야 한다.

구리동해변은 연평도에서 유일하게 북녘 해안이 바로 보이는 해변이다. 길이가 1km이고 폭이 200m나 된다. 하얀 자갈과 고운 모래사장, 좌우로 기암괴석이 나란히 펼쳐져 있다. 해송이 시원한 그늘을 만들어준다. 해변 좌우에 배의 정박을 막는 용치가 있어 보기에 흉하지만, 여름에 해수욕하기엔 그만이다. 다만 해가 지면 해수욕을 할 수 없고, 텐트도 칠 수 없으며, 주변에 민가도 없어 마을로 돌아와야만 한다. 여름에는 마을로 다니는 버스가 정기적으로 있어 시간표를 보고 움직이면 된다.

구지도. 백로서식지 해변에서 보면 거북모양으로 보인다. / 해안철책 너머로 본 구리동해변. / 백로가 떠난 백로서식지. / 평화공원 추모·기억의 벽과 추모비. (왼쪽 위부터 반시계 방향)

북쪽 통문에서 보는 중국 어선군단

봄에 왔다가 늦가을에 떠나는 백로 서식지를 보려고 통문으로 들어갔다.

백로는 떠나 볼 수 없지만, 북쪽 철책 너머로 굴 따는 주민들이 보여 내려가니 통문이 열려있다. 열려있는 것은 참으로 좋다. 자유로운 공간이 조금 더 확대되는 느낌이랄까. 그런데 멀리 수평선에 중국 어선들이 마치 섬들처럼 보인다. 중국 어선들이 우리 해역에서 물고기를 싹쓸이해가고 우리 주민들은 굴이나 따고 있다. 낭만적인 풍경이 아니다.

망향전망대에서 볼 때는 느끼지 못했는데, 바로 눈앞에 펼쳐져있는 중국 어선들이 섬뜩함을 자아낸다. 이곳이 진정 우리 바다가 맞는가. 약탈당하는 어족자원과 황폐화되는 바다를 바라만 봐야하는 우리 어민들의 심정은 어떠할까. 정부는 무엇을 하는 것인지.

※ 천영기 선생은 2016년 2월에 30여 년 교사생활을 마치고 향토사 공부를 계속하면서 시민들과 함께 월 1회 ‘인천 달빛기행’과 때때로 ‘인천 섬 기행’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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