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화교협회 손덕준 회장 인터뷰
화교 역사 130여 년, 국내 역사적 아픔 함께 겪어
청나라-인천 무역 오가던 화상, 한국전쟁 때 정착
짜장면은 대표적인 서민음식, 국내 외식문화 선도
“인천 차이나타운 세계적인 관광지 될 수 있어”

[인천투데이 류병희 기자] 화교(華僑)가 인천에 정착한 역사는 짧게는 130년이 넘었다. 화교는 시기적으로는 1883년 제물포항 개항을 전후해 국내에 정착한 사람들과 그 후손들을 일컫는데, 본래 조선을 오가던 청나라 무역상(華商)들이었다.

청나라는 태조 누르하치가 1616년 여진족을 통일하고 세운 후금에서 출발했다. 이후 주변국과 중국 동북부, 만주 등을 통일하고 숭덕제가 국호를 청(淸)으로 바꾸면서 중국 본토를 가장 오래 지배했던 장구한 역사를 이어간다.

화상들은 조선과 비단, 인삼, 수산물 등을 교역하기 위해 조선을 상시적으로 오고갔다. 특히, 제물포는 중국 산동과 인접한 거리에 있어 배로 오고가는데 편리하고 수도 한양이 가까웠기 때문에 무역이 활발했다. 그리고 1883년 제물포항 강제 개항으로 더욱 활발한 활동을 이어갔다.

화상들은 개항 후 일본, 유럽 열강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며 인천에 정착해 치외법권 지역인 조계지에서 권리를 누리고 살았으나, 청일전쟁 후 패하면서 일본에 주도권을 넘겨주게 됐다.

인천 차이나타운 청일조계지 경계에 가면 왼쪽은 청나라, 오른쪽은 일본인들이 거주했다. 개항 당시의 모습은 사라졌지만, 차이나타운에는 그 후손들이 아직 많이 살고 있다.

현재 인천에 살고 있는 화교는 3500여 명으로 추산된다. 대한민국 국적을 취득한 사람은 500~600명으로 추산된다. 많은 수의 화교들이 국내 정착과 생계 등의 이유로 귀화하고 있는 추세다. 국내에 정착해 살고 있는 화교는 2만여 명이다. 국적은 대만이다.

짜장면은 ‘중화요리’이다. 일상적으로 화교와 중국인들을 보면 ‘음식’으로 자연스럽게 연상하는 인식이 있는 편이다. 공중파 방송국에서 화교 출신 중화요리 대가가 부각되면서, 세계적으로도 널리 알려졌다. 

인천화교협회는 인천은 물론 수도권과 국내 화교들과 교류하며 권익 증진을 위한 활동을 하고 있다. 협회를 이끌고 있는 손덕준 회장을 만나 화교들의 역사와 삶에 대해서 인터뷰를 진행했다.

손 회장은 음식으로 화교 문화를 단정하는 것을 경계하면서도, 국내 외식 문화를 중화요리가 선도한 점에 대해서는 자부심을 표현했다. 

인천화교협회 손덕준 회장

 

130년 기록된 화교 역사, 책자로 발간할 것
화교 역사, 젊은 세대들에 잘 전달됐으면

화교들이 인천에 와서 정착한 것은 기록에 남겨진 것만 130여 년이다. 중국 왕조의 마지막 청나라 시절 왕래가 많았다. 인천화교협회는 옛 청나라 영사관 터에 있다.

청나라 시절에는 조선과 배 무역을 많이 했다. 화상들은 중국 특산물인 비단 등을 가져오고, 조선에서는 강화 인삼과 말린 생선 등을 중국으로 가져갔다.

개항 전에는 큰 배보다는 돛단배 등 작은 배들도 오갔을 것이고, 개항 후에는 큰 배들이 제법 교류하면서 화상들이 하나둘씩 늘어났다. 영사관이 있을 정도면 현재보다도 많은 인원이 상주했다는 말이다.

당시 화상들은 상해와 산동, 그리고 홍콩에서도 무역선들이 상시적으로 제물포를 드나들었다.

당시 무역과 화교들의 삶에 대한 기록들은 자료를 수집 중이다. 발행된 책자는 아직 없는데, 자료를 취합해 일정 시점에 책으로 발행할 예정이다. 화교협회 뒤 당시 영사관 회의청도 그대로 보존돼있어 역사적인 장소로 활용할 계획도 있다. 오래된 유물들도 제법 있다.

나는 인천에서 나고 자란 토박이다. 제물포 개항장에는 할아버지와 아버지께서 함께 오셨다. 무역 거래를 위해서 오셨는데, 나는 내가 경영하고 있는 ‘태화원’ 자리에서 태어났다. 이후 아들을 낳았고, 손자도 있다. 5대째를 이어가며 인천에서 살고 있다.

인천의 화교는 주로 2·3세대인데, 3500여 명 있는 것으로 추산된다. 서울은 8000여 명 되고, 한국 전역으로 치면 2만 명이 넘지 않을까 생각한다.

한국 국적으로 귀화한 사람들이 많이 있다. 물론 대만 국적을 지닌 사람들도 많지만, 귀화하는 것에 대해서는 자연스럽게 보고 있다. 다만, 젊은 세대로 갈수록 화교의 역사에 대해서 잘 모르는 것 같아 아쉬운 점이 많다.

화교는 한국에서 최초의 다문화 민족이다. 요즘 다문화에 대한 인식이 확산되고 단일 민족을 강조하던 한국 정책이 변화하고 있다. 다문화를 이루며 한국 사람들과 역사의 오욕을 겪으며 살았던 사람들이 화교라고 할 수 있다.

화교 학교는 118년의 전통을 가지고 있다. 자녀를 낳으면 화교학교를 보내는데, 특히 정체성이라고 할 수 있는 중국어를 가르치고, 자연스럽게 한국어도 습득한다. 교육과정을 마치면 한국 대학에 진학하는 등 인재들이 많다.

한국에서 살아가다보니 역사를 잊고 살아가는 젊은 사람들이 많이 있다. 한국문화에 익숙하게 되는 것은 자연스럽게 보지만, 한편으로는 옛 중국 역사에 대한 관심도 가져주길 바라고 있다. 그런 점에서 인천화교협회가 할 일이 많다.

화교협회는 화교들의 주민등록 사무 등을 맡아하고 있다. 일종의 자치활동인데, 예전에는 사법권도 인정을 해줬다. 거리에서 싸움을 하는 등 문제를 일으키면, 협회에서 우선 처리했다. 대만으로 문제를 일으킨 사람을 추방시킨 적도 있다.

지금은 대만과 한국이 국교를 단절해서 그렇게는 못하지만, 인천화교협회가 화교들의 구심점 역할을 하면서 뒤이은 세대들에게 화교의 문화와 역사에 대해서 전달해 주고 싶다.

손덕준 회장은 화교역사관 전시 자료를 보며 옛 이야기를 풀어냈다.

 

한국 전쟁 후 생계 위해 음식사업 본격화
‘화교 = 짜장면’, 슬픈 역사의 한 단면

화교들이 인천에 정착하기도 하면서 중국과 왕래를 많이 했는데, 어느 순간 한국에만 머물 수밖에 없는 사정이 생겼다.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해 한국과 중국이 단교했다. 왕래를 할 수 없다보니 타향살이를 어쩔 수 없이 하게 됐다.

그리고 여기 인천에 머물면서 한국 사람들과 함께 전쟁도 겪고 현대사의 굴곡도 함께 겪었다. 우리는 외국인 신분이었기 때문에 사실 더 고생을 많이 했다.

부동산 거래에 제한이 있었고, 가게 빌려서 장사하는 것조차 쉽지 않았다. 화교들은 농사도 짓고, 무역도 하고 가게를 내고 거래를 하면서 살았다. 그렇지만 외국인 신분이었기 때문에 살아가는데 큰 어려움이 많았다.

요즘 중국 또는 중국인 하면 떠오르는 인식이 ‘음식’이다. 중화요리하면 ‘화교’, ‘중국인’ 이런 등식이 있는 것은 자연스럽게 형성된 인식인데, 앞서 말한 것처럼 할 수 있는 것인 음식점 정도였기 때문에 그렇게 인식된 것이다.

음식을 잘 만들어서, 음식이 맛이 있어서 ‘화교는 중화요리’라는 인식은 슬픈 역사의 한 단면이다. 개항장 시절부터 화교들이 ‘짜장면’ 장사만 하고 살았겠나. 바로 잡을 필요가 있다.

여기 개항장에 조성한 대불호텔 건물은 일본사람이 10년 경영하다가 화상에게 넘겨졌다. 최초의 근대식 호텔이라고 하는데, 대불은 일본식 표현의 명칭이고, 이를 화상이 이어받았을 때는 ‘중화루’라는 새 이름을 붙였다.

중화루는 음식점이 아니다. 호텔이었다. 음식점으로 표기하는 것은 잘못된 역사 기록이다. 대불호텔이 경영한 것처럼 호텔식 경영을 한 곳이다. 당시 주주만 해도 40명이나 된다. 그건 공화춘도 마찬가지였다.

관우는 화교들에게 재물을 가져다주는 신이다.
화교역사관에는 청나라 시절 유물들도 있다.

 

한국식 ‘짜장면’ 역수출, “세계화 됐다”
“짜장면은 서민의 음식”, 외식 문화 선도

‘짜장면’은 중국음식이지만, 한국음식이다. 중국에도 짜장면이 있고 한국에도 있다. 짜장면이 지금처럼 인기를 누린 것은 전적으로 한국 요리법이 사람들 입맛에 맞고 대중적으로 선풍을 일으키고 있기 때문이다.

중국에서 만들어졌지만, 오히려 한국식 짜장면이 중국으로 역수출되는 현상도 있다. 본토에서는 짜장면 맛잇게 하는 방법이 무엇이냐고 물어보는 사람들도 있다.

한국식 짜장면이 한국을 넘어 세계적인 입맛으로 자리했다는 말이다. 중국식 짜장면이었다면 사실 그렇게까지 인기를 누리지 못했을 것이다.

짜장면은 서민의 음식이다. 개항장 항만노동자들이 점심을 손쉽고 빠르게 먹고 다시 일하기 위해 먹던 음식이었다. 수타면을 뽑아서 물이 삶고 이를 장에 비벼서 먹었다. 비싸고 고급스러운 음식이 아니었다.

그런데 한국 사람들이 이를 찾기 시작했다. 돈을 주고 먹기 시작했다. 장사가 잘 됐고, 팔아야 하는 음식이 됐다. 그리고 발전을 이룩한 것은 단순히 장에 면을 비벼먹는 게 아니라 고기와 야채 등을 넣고 함께 조리를 했기 때문에 맛이 더욱 좋아졌다.

당시 배고푼 시절이었다. 외식이라는 말은 현대적인 개념이다. 물자도 풍부하지 않은 시절에 재료를 넣고 음식을 만들어야 하다 보니 비싼 음식이 돼서 연중 특별한 날만 먹을 수 있는 음식이 됐다.

나는 이러한 과정이 한국의 외식 문화에 변화를 가져온 지점으로 본다. 한국 외식 음식은 설렁탕, 국밥 정도 아닌가. 궁중음식을 서민이 먹었을 리 없고, 한국전쟁 후 경제개발 시기에 물자가 풍족해지면서 대표적인 외식 문화로 중국요리가 자리 잡게 된 것이다.

현재 짜장면은 거의 평준화 됐다. 특이하게 하려고 예전처럼 수타면을 뽑는 곳도 있는데, 일단은 장맛이 좌우하기 때문에 맛이 대동소이하다. 이것은 춘장 때문이다. 춘장은 Y식품 한 곳에서 생산된 것만 사용한다.

손덕준 회장은 인천 차이나타운이 세계적인 관광지로 발전할 수 있다고 했다.

 

다른 나라와 비교하면 인천 차이나타운 ‘낙후’
세계적인 관광지로 거듭 날 수 있게 지원 필요

나는 이제 은퇴할 나이가 됐다. 태화원과 중화루를 아직 경영하고 있지만, 중화루는 아들에게 이미 물려줬다. 바라는 점은 화교에 대한 권익을 증진하는 한편, 인천의 대표적인 관광지인 차이나타운이 좀 더 많은 지원을 통해 발전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세계 각지의 차이나타운을 가본 적이 있다. 특히 미국과 일본을 가보면, 인천은 낙후된 편이다. 인천의 대표적인 관광지로서 차이나타운이 성장하면 인천 경제는 물론이고 세게적인 관광지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관할 지자체에도 전문위원이 있어야 한다. 이 지역에 대한 역사와 전통을 누구보다 잘 아는 사람이 행정과 민간의 가교 역할을 해주길 바라고 있다.

차이나타운에는 옛 건축물들도 많이 남아 있다. 협회 뒤의 영사관 회의청도 오래된 건축물이다. 민간 차원에서 이를 보존하려고 하면 한계가 있다. 인천시와 중구에서 적극적인 관심을 기울려주길 부탁드린다.

나는 인천 토박이다. 태어나고 자라고 커서 가족들 부양하고 장사하고 세금도 낸다. 보이지 않는 차별도 느끼긴 하는데, 중국과 한국의 가교 역할을 할 수 있다고 본다. 세계 어디에 내놔도 손색없고 자랑스러운 인천 차이나타운에 대한 발전을 위해 노력하겠다.

인천화교협회는 인천 중구청에서 청일조계지 계단을 지나 차이나타운으로 올라가는 길목에 위치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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