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형 한국이주인권센터 사무국장

[인천투데이] 올 한 해를 되짚어보니 기쁘고 슬펐던 기억이 떠오른다.

첫 번째는 고(故) 딴저테이 씨 아버지 깜친님과 고(故) 김용균 씨 어머니 김미숙 님의 만남이다. 지난해 8월 단속으로 인해 사망한 딴저테이 씨의 아버님은 올해 1월 2일 김용균 씨 분향소를 찾았다. 슬픔 속에서 매순간 용기가 필요한 어려운 발걸음이었다. 의지로 이뤄낸 이들의 만남에는 서로 위로하는 것을 넘어 당신들의 자식과 같은 죽음이 다시는 일어나지 않길 바라는 메시지가 있었다. 이들이 어루만지고자하는 자식은 인종과 국적을 넘어섰다. 아직도 그 만남의 순간을 생각하면 울컥해진다.

하지만 딴저테이 씨는 근로복지공단에서 산재 불인정을 받고, 1심에서도 패소 판결을 받았다. 언론 보도를 보면, 재판부는 딴저테이 씨의 도주 방식이 “이례적이고 무리한 방법”이었다고 했다. 급작스러운 단속 시 이주노동자들은 단속반원들이 쫓아오기 어려운 곳으로 탈출한다. 이 때문에 위험이 따르고 상당수 이주노동자 사고는 높은 옹벽 등에서 뛰어내리다가 발생한다. 창문으로 도피하는 것이 “이례적이고 무리한 방법”이라고 판단한 것은 이주노동자 단속을 재판부가 잘 모르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들이 생각하는 ‘상식과 평범함’에는 미등록 이주노동자의 삶이 포함돼있지 않다는 점에서 깜칫 아버님과 김미숙 어머님의 만남과 대비된다.

두 번째는 내가 좋아하고 응원한 난민 신청 한부모 가족과 이별이다. 지속되는 상담에 지쳐있을 때쯤 그녀를 만났는데, 민주화를 향한 신념과 함께 아이들을 지켜내려는 그녀의 에너지에 기운이 났던 기억이 있다. 그녀가 하고 싶은 활동을 하게 한동안 주말에 아이들을 집에 데려가 같이 밥을 먹고 만화를 보고 그림도 그리면서 놀았다. 그렇게 정이 쌓였다.

그런 그녀가 올해 여름 한국을 떠났다. 그녀의 깊은 곳에 있던 불안을 나는 잘 포착하지 못했다. 독립된 활동가로 존중했기에 내면의 불안을 스스로 극복할 것이라 생각했던 것 같다. 그녀는 경찰 정보관으로부터 지속적으로 연락을 받았다. 심각한 내용은 없었다. 한번 만나 얘기를 나눠보고 싶다는 거였다. 하지만 본국에서 생긴 경찰에 대한 트라우마는 그녀를 괴롭혔다. 동료들이 난민 인정을 받지 못하고 불안정하게 살고 있는 것도 아이들을 혼자 키워야하는 그녀를 더욱 불안하게 했다. 결국 그녀는 나에게도 떠난다는 말을 하지 않고 제3국에 가고 나서야 한국을 떠났음을 알렸다. 그녀를 떠나게 만든 것은 난민 신청한 한부모 가족 하나 품지 못하는 한국사회였다.

마지막은 내가 활동하고 있는 ‘와하’ 공동체 구성원과 이별이다. 그녀는 일찍 결혼해 남편과 함께 한국에 왔다. 항상 신중했고 수줍음이 많았지만 호기심으로 눈이 반짝거렸다. 그런 그녀가 언제부터인가 아파서 센터에 나오지 못했다. 병원에서 만난 그녀의 얼굴이 매우 수척했다. 곧 좋아져서 다시 만나자고 했다. 그 후 센터에 한 번 왔다. 젊으니까 금방 회복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다시 급속도로 악화돼 재입원했다. 그녀는 가족이 있는 이집트로 돌아가려했다. 하지만 질환을 이유로 항공사에서 탑승을 거부했다. 그렇게 가족의 품으로 가지 못하고 12월 16일 세상을 떠났다. 혈액암이었다. 사람들이 모여 추모했다. 침울한 분위기에 떼를 쓰던 아이들도 조용했다.

많은 사람이 올 한 해 소중한 만남과 슬픈 이별을 경험했으리라. 만남과 이별 모두 소중하게 마음속에 담은 새해는 같지만 조금 다르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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