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주 시민기자의 영화읽기 - 미안해요, 리키(Sorry We Missed You)
[인천투데이 이영주 시민기자]
켄 로치 감독│2019년 개봉
내 집 마련이 꿈인 평범한 아빠 리키(크리스 히친)는 평생 불안정하고 위험한 건설 현장에서 일해 왔다. 좀 더 편안하고 안정적인 직장을 찾던 리키는 친구를 통해 택배회사와 계약을 맺는다. 택배 일을 효율적으로 하려면 자기 차가 있어야 해서 새 차 보증금을 위해 아내가 타고 다니던 차를 판다. 그 덕에 간병인인 아내 애비(데비 허니우드)는 쉬는 시간도 없이 버스를 몇 차례나 갈아타며 간병 일을 다니게 된다.
새 차 할부금을 갚기 위해 리키는 하루 14시간, 주 6일을 일하고 차가 없어 이동 시간이 길어진 애비 역시 밤늦게까지 일하니, 아직 10대인 아들 세브(리스 스톤)와 딸 라이자(케이티 프록터)를 돌볼 여력이 없다. 첫째 세브는 그래피티(벽에 낙서하듯 그린 그림)에 빠져 학교를 밥 먹듯 빠지고 동생 라이자는 어린 나이에 불면증에 시달리지만, 아이들과 얼굴 마주할 시간조차 내지 못하는 리키와 애비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휴대전화에 메시지를 남기는 것뿐이다.
켄 로치 감독 신작 ‘미안해요, 리키’는 엄청난 노동량에 짓눌려 사는 평범한 노동계급 가족의 모습을 통해, 신자유주의라는 말도 이미 낡게 느껴지는 지금 영국 사회의 민낯을 찬찬히 들여다본다.
노동계급이라 했지만, 리키와 애비는 전통적인 의미의 노동계급과는 다르다. 리키의 새로운 직업 택배기사는 직접 고용이 아니라 회사와 계약을 맺고 배달 업무를 대행하는 개인사업자.
택배회사 간부는 남에게 고용되는 게 아니라 자신이 모든 걸 ‘선택’할 수 있는 ‘사장’이라며 택배기사의 지위를 치켜세우지만, 막상 일을 하려니 택배를 위해 필요한 차도 알아서 구입해야 하고 일이 생겨(심지어 택배 일을 하다 사고를 당해 병원신세를 지게 되더라도) 자신이 맡은 구역 배달을 못하게 될 경우엔 대리기사 채용에 벌금, 사고로 인한 택배물품 손실까지 모두 택배기사의 책임이다.
간병인 애비의 처지 역시 위태롭기 짝이 없다. 누군가를 돌보는 일에 소명의식을 가지고 진심을 다해 간병하지만 성실한 애비에게 돌아오는 것은 (잘한다는 이유로) 초과노동과 감정적인 상처다. 하루 14시간씩 일하고 있지만 노동자로 인정받지 못하는 존재들. 전통적인 계급 개념이 사라지면서 노동자로서 당연히 누려야할 권리는 휴지조각이 돼버린 21세기 노동현장. 그곳에 위태롭기 짝이 없는 리키의 가족이 있다.
하루하루 열심히 일해도 답이 없는 삶. 일하면 일할수록 더 가난해지는 삶. 출구 없는 미로에 갇혀버린 리키와 애비, 그런 부모를 보며 각자의 방식으로 애달파하는 세브와 라이자. 켄 로치 감독의 영화답게 영화는 격정적인 클라이맥스도 없이 리키 가족의 일상을 담백하게 보여주지만, 그들의 일상이 차곡차곡 쌓이며 심장이 쪼그라드는 것 같은 통증이 느껴진다.
리키의 가족은 특별하게 불행한 이들이 아니다. 영국(한국으로 바꾸어도 무방하다.) 보통의 사람들이다. 그것이 더욱 큰 절망으로 다가온다. 누구보다 성실하고 누구보다 선하고 누구보다 서로를 아끼는 이들이 불행할 수밖에 없는 절망의 늪. 리키가 부지런할수록 애비가 자신의 일에 소명을 가지고 정성을 다할수록 리키의 가족이 아름다울수록, 절망은 증폭된다. 이것이 현.실.이.다.
켄 로치 감독은 2014년 ‘지미스홀’ 이후 은퇴선언을 했다가 2년 뒤 ‘나, 다니엘 블레이크’로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을 수상하며 ‘이것이 진짜 은퇴작’이라 했다. 그도 그럴 것이 80이 넘어 더 이상 영화를 만들기는 쉽지 않을 것 같았다. 그러나 그로부터 3년이 지난 지금, 다시 ‘미안해요, 리키’를 내놓았다. ‘미안해요, 리키’는 83세 노장 감독이 은퇴선언을 번복할 수밖에 없던 이유 그 자체다. 지금 이대로 전혀 괜찮지가 않다고, 지금 이 시스템에서는 리키와 애비 같은 선한 개인들이 절망의 늪에서 헤어 나올 수 없다고, 누군가는 계속 말해야하니까.
세상은 원래 그런 거라고 포기하고 타협하기엔 그런 세상에서 간신히 버티고 있는 리키 가족의 삶이 너무나 눈물겹게 아름답지 않느냐고, 지금과는 다른 내일을 위해 뭐라도 해야 하지 않느냐고, 영화는 내게 묻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