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투데이 심혜진 시민기자] 중ㆍ고등학교 때부터 철학은 내게 제일 어려운 과목이었다. 세상에 ‘이과 머리’ ‘문과 머리’가 정말 있다면, 나는 이과 쪽이고 실제로 이과를 택했다. 수업시간에 배운 소크라테스ㆍ칸트ㆍ공자ㆍ맹자ㆍ루소 등, 이들의 사상과 이론은 도무지 외워지지가 않았다. 학자마다 서로 다른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이론을 만들어 설파했다는데, 내겐 그 말이 그 말 같았다.

수학은 어렵긴 해도 공식이 있고, 수식을 잘 풀면 똑 떨어지는 답도 나온다. 그런데 철학의 사상들은 하나하나 외우지 않고는, 어렵게 외우더라도 의미를 이해하지 않고는 문제를 풀 수 없고 답을 유추해내기도 어려웠다. 철학자 이름은 왜 그렇게 복잡하고, 그들이 쓴 책은 제목만으로도 어찌나 심오하기 그지없는지, 암기력 꽝인 내가 이과를 간 건 정말이지 탁월한 선택이었다.

학교를 졸업한 뒤엔 철학과 완전히 담을 쌓았다. 철학으로 내일 날씨를 예측하거나 거스름돈을 계산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니까. 철학을 몰라도 생활이 불편할 건 아무것도 없었다. 책을 읽다 철학자들이 나오면 조금 주눅이 들긴 했지만, 그럴 땐 조용히 책을 덮으면 그만이었다. 좋아하는 분야의 책을 읽기에도 늘 시간은 부족했다.

최근, 한 글쓰기 수업에서 로자 룩셈부르크라는 사상가이자 혁명가의 생애를 다룬 책을 읽었다. 이름을 들어본 것도, 낯선 것 같기도 했다. 특별한 관심이나 기대 없이 과제니까 읽었다. 그래도 만화 형식의 그래픽 노블이라 거부감이 덜했다.

책을 펼치고서 강렬하고 뜨거운 삶에 매료됐다. 과연 실존 인물이 맞는지 의심할 정도였다. 세상에 있었으나 모르고 살아온 한 존재에 뒤늦게 마음을 빼앗겨 가슴이 두근거렸다. ‘철알못’(=철학을 알지 못함)인 내게, 그림이 많다고 해서 내용까지 쉬운 건 아니었다. 어쩔 수 없이 책을 연거푸 두 번 읽었다.

그리고 한나 아렌트라는 또 다른 철학자의 그래픽 노블도 한 권 더 읽었다. 그러고 나서 어렴풋이 깨달았다. 철학은 책 속의 뜬 구름 잡는 사상이 아니라 인간 세상의 펄펄 끓는 용광로에서 건져 올린 밝은 빛 같은 것이라고.

책 두 권을 읽고 감동을 받은 김에, 철학에 대해 조금 알아봤다. 철학의 영어 ‘필로소피(philosophy)’는 필로소피아(philosophia)라는 그리스어에서 유래했다. 필로는 ‘사랑하다’ ‘좋아하다’라는 뜻의 접두사이고, 소피아는 ‘지혜’라는 의미로, 철학은 ‘지혜를 사랑하는 학문’이란 뜻이다.

고대 철학자 소크라테스 이전까지만 해도 철학의 연구 대상은 자연이었으나 이후 인간을 이야기하는 학문이 됐다. 중세시대 신에게 잠깐 자리를 넘겨주긴 했어도 철학은 인간 본성과 행동, 인간적인 삶, 인간의 인식을 꾸준히 탐구해왔다. 현실을 정확히 진단하고 해석하는 도구로써, 더 나은 삶으로 나아가기 위한 이정표를 제시하는 학문이기도 하다.

내 관심사 중 하나인 페미니즘 이론도 철학이었다. 페미니즘을 공부한 후의 삶은 이전과 완전히 달랐다. 남성 중심의 시각에서 벗어나 바라본 세상은, 말도 안 되는 이상한 규율과 억압으로 가득 찬 연극 같았다. 내게 페미니즘은 노예가 아닌 진짜 내 삶에 다가가는 일이었다. 철학을 이해한다는 건 이전과 다르게 사는 것과 같았다. 철학을 최대한 피하고 외면하며 살아왔다고 생각했지만, 삶이 불편하고 힘든 이유를 해석하고 더 나은 삶의 가능성을 제시해 준 건 철학이었다.

결국, 내가 좋아한 과학도 철학을 바탕으로 진지한 성찰을 하지 않는다면, 과학기술이 인간을 인간에게 결코 이롭지 않은 방향으로 몰고 갈 수도 있을 거란 생각을 했다. 과학과 철학은 인류를 새로운 세상으로 이끄는 양 날개와 같은 거였다. 앞으로 정신적으로나 물질적으로, 환경적으로, 생명적으로, 예술적으로, 지적으로, 영적으로, 감성적으로, 모든 면에서 더 나은 삶을 살길 바라는 내겐 철학이 필요했다.

고등학교 1학년 윤리 수업에서 마지막으로 철학을 배운 지 26년이 지났다. 나는 철학을 더듬더듬 공부해 보기로 했다. 여전히 낯설고 어렵지만, 가랑비에 옷이 안 젖고 배길까, 하는 심정으로 그냥 읽는다. 나처럼 철학을 잘 모르고 어려워하는 이들이라면, 웬만한 철학 입문서보다는 우선 매력적인 인물에 푹 빠져보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더군다나 만화 형식의 그래픽 노블이라면 비록 내용이 좀 어렵더라도 그림으로나마 시대 분위기를 파악하고 인물을 기억하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다. 꼭 철학이 아니더라도, 두 인물의 생애를 마치 영화 보듯 들여다보는 것도 무척 흥미롭다. 세상이 원하는 대로 살기보다 신념에 따라 가치 있는 목표를 향해 뚜벅뚜벅 걸어간 이들의 삶에는, 잠시 흔들렸던 내 삶의 주도권을 다시금 내 손으로 가져오게 만드는 힘이 있다. 나를 철학이라는 새로운 세계로 첫발을 들이게 한, 로자 룩셈부르크와 한나 아렌트의 생애를 다룬 그래픽 노블 두 권을 소개한다.

# 레드 로자 | 케이트 에번스 지음 | 박경선 옮김 | 산처럼 펴냄
 

‘레드 로자’는 사회주의 사상가이자 혁명가인 로자 룩셈부르크(1871~1919)의 일대기를 담은 책이다. 로자는 폴란드의 중산층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비슷한 시기에 태어난 우리나라 인물로는 이승만(1875년), 김구(1876년), 안창호(1878년) 등이 있다. 당시 동서양을 막론하고 여성은 시민으로 인정받지 못해 참정권이 없었다. 로자가 태어난 폴란드는 러시아와 독일제국의 지배를 받았다. 유대인이 갈 수 있는 곳은 많지 않았고 늘 엄격하게 제한이 가해졌다. 로자는 엄청난 부와 극도의 빈곤을 마주하며 현실에 눈을 뜬다.

“나는 넉넉히 가진 자들의 양심에 짐을 지우고 싶다. 그 모든 고통과 남몰래 흘리는 쓰라린 눈물의 짐을.”(14쪽)

로자가 열다섯 살에 쓴 시다. 그는 칼 마르크스의 ‘임금 노동과 자본’, 칼 마르크스와 프리드리히 엥겔스가 공동집필한 ‘공산당 선언’ 등을 읽으며 자본과 불평등의 관계에 눈을 뜬다. 고등학교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했지만 ‘태도가 반항적’이란 이유로 졸업식에서 금메달을 받지 못했고, 더 이상 여성으로서 교육받을 곳도 없었다. 그는 곧바로 사회주의 운동에 뛰어들었다.

하지만 러시아 경찰의 방해로 2년 후 정치 참여를 못하게 됐다. 그는 여성 입학을 허용하는 스위스 취리히대학교에 가기로 결심한다. 그 대학에서 법학과 정치경제학을 공부하며 마르크스 사상에 더욱 심취한다. 1989년 박사학위를 받은 후 <노동대의>라는 신문을 창간하고 ‘크루신스카’라는 필명으로 활동한다. 그리고 그해 8월 취리히에서 사회주의 인터내셔널 대회에서 연설을 한다. 당시 그의 모습을 회고한 기록이 있다.

“로자는 뒤쪽 위원석에서 일어나 의자 위에 올라 목소리를 냈다. 여름철 원피스 차림의 자그마한 체구는 매우 가냘파 보였다. (…) 흡인력 있는 목소리와 설득력 있는 문구로 대의를 부르짖었던 로자는 단숨에 의회에서 다수의 지지를 얻을 수 있었다.”(188쪽, 주석)

이 연설로 그는 사회주의 운동에 이름을 알렸다. 곧바로 독일로 넘어가 위장결혼을 한 후 독일 사회민주당 활동을 한다. 그는 혁명가에 의한, 엘리트 혁명이 아닌 노동자 중심의 혁명을 주창하며 레닌에게 각을 세웠다.

이후 러시아 혁명 때 체포돼 투옥됐고, 풀려난 후 ‘자본 축적론’을 집필하며 자본주의가 세계를 집어삼키고 모든 경제를 말살시킬 거라 예측한다. 동시에 자본주의가 군국주의와 결합해 전쟁의 광풍에 돌입할 거란 진단도 한다. 지금 돌아봐도 예리하고 정확한 해석이다. 사회주의 운동만이 인류를 구원할 거란 믿음으로 그는 연설과 집필, 세력을 조직하는 데 몰두했다. 그러나 독일 사회주의자 지도부는 변절해 전쟁을 지지했고, 로자는 결국 감옥에 가게 될 걸 알면서도 온 힘을 다해 반전을 주장했다.

“그녀는 신문 〈적기(赤旗)〉를 창간했고 독일 공산당이 된 마르크스주의자 혁명그룹 스파르타쿠스단을 공동으로 조직해 1919년 1월에 베를린에서 혁명을 기도했으나 실패했다. 그녀의 지도 아래 수행된 혁명은 자유 군단에 의해 진압됐고, 룩셈부르크와 수백 명의 혁명군은 체포돼 고문당하고 살해됐다.”(위키백과)

로자는 죽기 전날 밤, 이런 글을 남겼다.

“지도부는 실패했다. 하지만 민중에 의해, 민중으로부터 새롭게 태어날 수 있으며 또 그래야만 한다. 민중이야말로 핵심 요인이며 (…) 이 패배는 미래 승리의 씨앗이다. 나는 있었고, 있으며, 있을 것이다.”(217쪽, 주석)

책에는 로자의 혁명적 삶을 뒷받침하는 그의 치밀한 사상과 함께 그의 삶에 또 다른 중요한 축이었던 뜨거운 사랑이야기도 담겨 있다. 책 뒤쪽 주석에는 방대한 내용을 추가해놓아 본문과 함께 읽으면 로자의 삶과 사상을 더욱 깊게 알 수 있다.

# 한나 아렌트, 세 번의 탈출 | 켄 크림슈타인 지음 | 최지원 옮김 | 더숲 펴냄
 

20세기 최고의 정치사상가이자 현대 철학과 정치에 빠짐없이 인용되는 인물로 사망 무렵 학자들 사이에서 제한적인 명성을 누렸던 한나 아렌트(1906~1975). 그의 삶과 사상을 그린 그래픽 노블이다. 악의 평범성, 전체주의, 공적영역과 사적영역 등 정치사상사에서 중요한 개념을 정립한 것으로 유명하다.

‘레드 로자’가 로자의 삶과 사상을 깊고 방대하게 다뤘다면, 이 책은 한나 아렌트의 삶에 초점을 맞췄다. 나치의 박해 속에 여러 나라를 아슬아슬하게 탈출하면서도 정치적ㆍ사회적 목소리를 내는 데 주저하지 않았던 한나 아렌트의 삶이 속도감 넘치면서도 생생하게 담겨 있다.

또한 1ㆍ2차 세계대전과 전체주의가 휩쓸어간 격동의 시대와 함께, 일생의 사랑이었던 철학자 하이데거를 비롯해 발터 벤야민, 프로이트, 알버트 아인슈타인, 장 뤽 고다르 등 그 시대를 살았던 지식인들의 모습을 한 편의 영화처럼 보여준다. 그 속에서 인간의 존재 의미, 폭력과 악의 본질을 고민하는 사상가이자 인간 한나 아렌트의 모습을 깊이 이해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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