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우범의 사라진 도시를 찾아서 <58>
페트라, 화려하게 피고 진 실크로드 도시

페트라로 가는 길에 만난 붉은 사막 ‘와디럼’.

[인천투데이 허우범 시민기자] 붉은 사막 속 붉은 바위를 깎아 만든, 고대 실크로드 중심 도시 페트라. 영화 ‘인디아나 존스’ 촬영지로 더욱 유명해진 곳이기도 하다. 페트라는 요르단의 수도 암만에서 남쪽으로 150㎞ 지점에 있다. 페트라는 ‘바위’ 또는 ‘반석’이란 뜻이다. 그래서인가. 페트라에 가까이 가자 갑자기 붉은색을 띤 거대한 바위산들이 나타난다. 반경 4~5㎞의 시크(Siq)협곡지대에 들어선 이 산들은 아론산(해발 1350m)을 필두로 저마다 황소 근육 같은 울뚝불뚝한 모습을 자랑하고 서있다.

페트라의 역사는 구약성서에서 시작한다. 이곳은 이삭의 쌍둥이 아들 중 장자(長子)인 ‘에서’의 땅이다. ‘에서’는 동생 야곱의 꾐에 빠져 팥죽 한 그릇에 장자권리를 넘겼다. 장자권리를 넘긴 ‘에서’는 유산뿐 아니라 아브라함으로부터 이어지는 적통도 빼앗겼다. 적통을 빼앗긴 ‘에서’는 자원은 물론 기후조차 건조해 그야말로 아무런 쓸모도 없는 에돔 황야로 밀려났다. 기원전 12세기 일이다. 페트라는 에돔 황야에 붉은 사암으로 우뚝 선 거대한 협곡지대다.

기원전 6세기, 척박하기 이를 데 없는 페트라에 아라비아 반도에 있던 유목민 나바테아인들이 이주했다. 이들은 상업적 재능이 뛰어났다. 페트라가 당시 대상(隊商)들의 교역 중심지가 될 수 있음도 간파했다. 그것은 파르티아와 인도, 그리고 중국 등에서 오는 무역이 여러 갈래의 길을 거쳐 결국 페트라로 집결됐기 때문이다. 게다가 페트라 반경 100㎞ 안에는 물이 없다. 물은 대상들에게 생명수다. 나바테아인들은 이런 생명수를 오직 페트라만이 제공할 수 있는 이점을 활용했다.

또한, 교역 대상 국가들이 가장 중시하는 상품이 무엇인가를 알아내고 그 상품을 생산하는 국가를 파악해 수요와 공급을 조정함으로써 엄청난 이득을 챙겼다. 아라비아와 인도에서 구할 수 있는 향ㆍ몰약ㆍ향료ㆍ양념 등과 중국 비단 등을 싼 값으로 사서 이집트와 지중해 지역 국가들에게 비싼 가격으로 팔았다. 그들은 교역로를 따라 세력을 확장하고 막강한 경제력으로 나바테아 왕국을 건설했다. 기원전 2세기경이었다.

붉은 사막 속 거대한 실크로드 도시 페트라의 ‘알 카즈네’.

사막의 강렬한 햇빛이 바위산을 내리쬐고 바위들은 저마다 회색ㆍ붉은색ㆍ검은색으로 자신의 색깔을 발산한다. 검은색과 붉은색이 수직으로 교차하는 절벽 사이로 뱀처럼 이어진 길을 걸으면 파란 창공은 손가락 마디보다 작아 마치 지하세계를 걷는 듯하다. 사암의 바위산을 떡 주무르듯 깎아내어 만든 페트라의 절정은 보물창고라는 뜻의 ‘알 카즈네’이다.

높이 43m, 너비 30m 크기에 원형기둥 6개가 받치고 있는 2층짜리 이 건축물은 오로지 자연암석을 그대로 활용해 정교하게 다듬고 파내어 만들었다. 이 건축물은 나바테아인들의 뛰어난 예술성을 잘 보여주는 것이지만, 화려한 겉모습과는 달리 왕의 영묘나 신전으로 사용됐다. 후세 사람들이 이곳에 왕의 보물이 들어있다는 전설을 듣고 ‘알 카즈네’라 부른다.

기원전 1세기경 헬레니즘 양식으로 지은 알 카즈네는 물류와 함께 동서양 문화가 함께 이동했던 당시의 세계에서 페트라가 국제교역의 중심지였음을 알려주는 상징물이기도 하다.

페트라의 주거지 유적.
사막을 건너온 대상들로 북적였을 원형극장.

페트라 안쪽에는 대신전을 비롯해 크고 작은 신전이 가득하다. 신전과 함께 이곳에는 대형 원형 극장과 각종 상점, 주거지역이 거대한 도시를 이루고 있다. 사막을 건너온 카라반들의 낙타 수천마리가 북적대던 페트라, 이제는 전 세계에서 몰려온 관광객으로 북적인다.

모든 것은 흥망성쇠를 거치기 마련. 막강한 경제력을 자랑하던 페트라도 화려한 전성기는 100년에 불과했다. 서기 105년, 페트라는 제국 역사상 가장 강력한 국력을 갖춘 로마의 트라야누스 황제의 동진(東進)전략에 힘을 잃고 속주로 전락했다. 페트라가 로마에 합병되자 로마인들이 몰려들었다. 로마인들은 제일 먼저 돌을 다듬어 포장도로를 만들었다. 그리고 공중목욕탕을 지었다. 거대한 바위산을 통째로 깎아내어 야외극장도 만들었다. 마차를 탄 로마인들이 포장도로를 달려와 목욕으로 피로를 푼 다음, 야외극장에서 그들만을 위한 공연을 보며 제국의 특권을 마음껏 누렸으리라.

로마 제국은 해상교역로를 개척해 동방과 교역을 시도했다. 페트라는 급속히 쇠퇴했고, 그 이후 육상교역로의 중심지는 북쪽에 위치한 팔미라와 알레포로 이동했다. 6세기경, 이 지역을 휩쓴 지진은 페트라를 완전히 폐허로 만들었고 그때부터 이곳은 사라진 역사가 됐다.

고대 상인들의 길은 이제 관광길이 됐다.

잊힌 도시가 다시 모습을 드러낸 것은 19세기 초였다. 스위스의 젊은 탐험가 루트비히 부르크하르트가 다마스쿠스에서 카이로로 가던 중 페트라에 엄청난 고대 유적이 숨겨져 있다는 말을 듣고 아랍인으로 변장해 이 도시를 발견했다. 그리고 자신의 여행기로 신비의 도시 페트라를 전 세계에 알렸다.

영국의 시인 존 윌리엄 버건은 페트라를 보고 ‘영원의 절반만큼 오래된, 장밋빛 같은 붉은 도시’라고 노래했고, 유네스코는 1985년에 페트라를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했다. 페트라는 영화 ‘인디아나 존스-마지막 성배(1989년)’의 촬영지로 더욱 유명해졌다. 이에 힘입어 요르단 정부는 이 영화를 국민영화로 지정해 오늘도 페트라를 알리는 데 널리 활용하고 있다.

나바테아인들은 기록을 남기지 않았다. 그토록 번성한 왕국이었건만 어째서 기록은 전해지지 않는 것일까. 그래서 더욱 더 페트라는 세계 7대 불가사의이기도 하다. 페트라는 현재까지 10분의 1밖에 발굴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르단 정부는 나바테아 왕국 페트라 입장료를 한화 10만 원 정도로 올렸다. 신비하고 불가사의한 페트라를 보고 싶으면 그 정도는 내라는 배짱이다. 앞으로도 페트라는 계속 발굴될 것이고, 세계의 여행자는 줄곧 찾아올 것이다. 요르단은 페트라 덕분에 장부 정리하기도 바쁘게 생겼다. 그야말로 나바테아인들보다 더한 상술이 아닐 수 없다.

페트라 유적지에서 만난 악사.

※ 허우범은 실크로드와 중앙아시아 곳곳에 있는 역사 유적지를 찾아가 역사적 사실을 추적, 기록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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