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투데이 심혜진 시민기자] 3년 전, 나를 따라온 길고양이에게 멸치를 한 번 삶아서 준 뒤로 멸치육수를 낼 때마다 그 고양이가 생각났다. 그땐 고양이를 무서워할 때라 물 먹을 곳을 찾기 어려운 길냥이에게 짠 마른멸치를 주면 안 좋다는 정도만 겨우 알았다. 한동안 육수에서 건진 멸치를 냉동실에 모아두기도 했다. 고양이에게 줄 만한 상황이 생기면 줘야지 싶었다.

하지만 그런 기회는 저절로 오지 않았다. 고양이가 다니는 길목에 내놓았다면 좋았겠지만, 고양이를 동네에서 쫓아내고 싶어 눈에 쌍심지를 켜고 있는 이웃들에게 찍히는 게 두려웠다. 축축한 멸치를 버리기가 날이 갈수록 불편했다.

처음엔 아까웠고, 좀 더 지나니 그들 역시 하나의 생명이라는 인식을 조금씩 했다. 급기야 물에 불은 멸치떼가 시체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더는 멸치를 먹긴 어려웠다. 그러나 오랜 세월 멸치육수에 입맛이 길들어 다시마와 표고버섯만으론 만족할만한 된장찌개를 끓일 수 없었다.

ⓒ심혜진

비 오는 날이면 애호박과 감자를 썰어 넣고 멸치국수 끓여 먹는 걸 좋아했다. 그러자면 멸치를 두 주먹은 넣어야하는데 생각만 해도 마음이 울렁울렁했다. 그 생명들을 어찌 또 버리나. 죄가 쌓이는 느낌이었다.

한동안 지인이 대안으로 추천한 참치진국을 국에 넣어 먹었다. 아쉬운 대로 그냥저냥 먹을 만했다. 그러다 바로 며칠 전 조미료 생각이 났다. 음식솜씨 없는 엄마의 맛없는 미역국이 어느 날 화려한 맛으로 둔갑했던, 30년도 더 된 그 날의 놀라움을 나는 아직도 잊지 못한다.

‘고향의 맛’ 조미료의 힘이었다. 조미료 안쓰는 집이 없을 정도로 인기를 끌다가 MSG 유해성 논란으로 조미료는 한순간 저질 식재료 취급을 당했다. 여태껏 단 한 번도 내 손으로 조미료를 산 적이 없었다. MSG가 소금만큼도 유해하지 않다는 걸 알면서도 한 번 생긴 기피증은 힘이 셌다.

엊그제 집에 오는 길, 마트에 갔다. 조미료뿐만 아니라 맹물에 소스만 풀면 부대찌개가 되고 된장찌개가 되는, 별놈의 양념과 소스가 다 있었다. 그래도 소고기가 들어간 조미료는 사고 싶지 않았다. 소의 눈망울을 아끼고 사랑하기 때문에. 하여튼 조미료를 한참 동안 들여다보다가 통통한 병에 담긴 액상조미료가 눈에 띄었다. 성분표를 살펴보니 육류가 전혀 들어가지 않았고 심지어 국산 콩으로 만든 것도 있었다. 나의 비건 지향과 잘 맞았다. 액상조미료를 바구니에 넣었다.

오늘 생협에서 주문한 채소들이 왔다. 콩나물을 꺼내 맹물에 넣고 불을 붙였다. 조미료 세 숟갈 쪼록쪼록, 고춧가루도 한 숟갈 넣었다. 시금치나물에도 조미료를 조금 넣어봤다. 오래전, 엄마의 음식에서는 뭔가 비슷한 맛이 났는데 다행히 콩나물국과 시금치나물에선 그런 느낌이 나지 않았다. 아직 새 조미료 맛을 내 혀가 감지하지 못하는 걸 수도 있다. 물론 그 옛날 엄마가 음식마다 ‘고향의 맛’을 과하게 때려 넣은 탓 일 수도 있지만.

조미료에 의지해 끓여낸 콩나물국은 맛있었다. 기대보다 훨씬. 참기름과 소금만 넣어도 맛있는 제철 시금치나물에 조미료의 감칠맛까지 더해졌으니 말해 뭐해. 생협 재료와 조미료의 조합도 허락할 만큼, 먹는 것에 예민함을 많이 내려놓았다. 책을 두 권이나 내느라 미치게 바빴던 올해 인스턴트 음식과 배달 음식으로 배를 채우는 날이 많았다. 빠르고 간단히 맛을 내는 조미료는 건강과 생존을 위한 타협이랄까. ‘바깥 음식’보다야 조미료를 조금 넣은 음식이 더 나을 테니까.

내친김에 이 조미료를 활용한 레시피를 인터넷으로 찾아봤다. 계란찜은 물론 마늘오일파스타에 한 숟갈 넣어도 좋다고 한다. 밥을 조금 덜 먹었더라면 바로 해서 맛보는 건데. 오랜만에 집에서 만든 국과 나물의 훌륭한 맛에 흥분해 목구멍까지 차도록 밥을 먹은 게 아쉽다. 앞으로 오랫동안 내 밥상은 통통한 몸집의 조미료, 너한테 빌붙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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