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학수 인천문화재단 인천역사문화센터 연구원

[인천투데이] 좋아하는 게 무엇인가에 따라 그 사람의 됨됨이를 파악할 수 있고, 좋은 것은 눈에 보이는 사물 그 자체가 아니라 사물을 보는 내 마음에 있는 것이라고 했다. 산을 유람하려는 사람은 천마산과 성거산 경치부터 찾아본다는데, 그 이유는 “더할 수 없이 높고 커서 만물이 나란히 할 수 없는 것을 천(天)이라 하고, 더할 수 없이 신령스럽고 조화로워서 그 공이 천(天)과 견줄 수 있는 것을 성(聖)이라 한다. 천하에 천과 성보다 존엄한 것이 없는데, 두 산이 천과 성으로 이름을 삼았으니 뭇 산과 다를 것은 따져보지 않아도 분명”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1572년(선조 5년)에 태어나 1631년(인조 9년)에 세상을 떠난 조찬한(趙纘韓)은 30세에 생원시에 합격했고 34세인 1605년(선조 38년) 특별 과거인 정시(庭試)에서 장원해 곧바로 최종 시험인 전시(殿試)에 응시할 수 있는 특전을 받았다. 그는 그해 가을, 이듬해 치러질 증광시를 앞두고 머리를 식히기 위해 개성의 명산인 천마산과 성거산 일대를 사흘간 유람한 것으로 보인다.

유람 첫째 날은 천마산 일대를 둘러봤다. 박연폭포 아래에 있던 운거사에서 출발해 박연ㆍ관음굴ㆍ태종대ㆍ마담ㆍ기담ㆍ대흥암ㆍ적멸암을 돌아보고 지족암에서 잤다. 둘째 날은 성거산 일대를 둘러봤다. 지족암을 출발해 현화사와 화장사를 본 후 다시 현화사에 와서 잤다. 셋째 날은 현화사를 출발해 차일암과 주암을 본 후 운거사로 돌아왔다.

일행은 조카 조전과 조칙, 박생 형제, 우봉현에 사는 젊은 선비 최아무개, 앞길을 인도하며 지휘한 우봉 아전 이희주 등 6명이고, 가마꾼은 운거사 승려 법찬 등 11명으로, 모두 18명이 함께 움직였다.

조찬한은 ‘운거사에서 서쪽으로 5리 정도 들어가면 박연이 있다’는 것처럼 행선지 간 거리를 꼼꼼히 기록했으며, 천마산과 성거산 봉우리와 계곡, 연못과 폭포, 사찰과 암자의 풍광과 느낌을 독자가 그려볼 수 있게 상세하게 묘사했다. 이 기행문은 그의 문집 ‘현주집(玄洲集)'권 15에 ‘유천마성거양산기(遊天磨聖居兩山記)’라는 제목으로 실려 있다. 조찬한은 이 기행문 외에도 영암이나 영천 등의 지방관을 역임하거나 명승지를 유람한 후‘낭주록(朗州錄)’과 ‘영주록(榮州錄)’ 같은 지지적(地誌的) 시문이나 ‘유두류산록(遊頭流山錄)’과 같은 유람기를 남겼다.

조찬한이 산 시대에는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정묘호란이 일어났다. 1618년(광해군 10년) 누르하치의 후금이 요동을 공격하자 명이 후금을 정벌하려고 조선에 징병을 요구했을 때 그는 파병에 반대한 인물로 알려져 있다. 조정 대부분이 부모지의(父子之義)와 재조지은(再造之恩)을 들먹이며 명분론에 빠져있을 때 조찬한은 기우는 명과 떠오르는 후금의 형세를 냉철히 관망해 중립적인 태도를 취했다. 급변하는 국제정세를 한 발 물러나 바라보는 객관적 자세는, 분주한 일상 중에도 시간을 쪼개 산수를 유람하며 생활의 여유를 찾고자했던 데서 나오지 않았을까.

필자가 평소 존경하는 연구자가 들려준, 외교관이었던 자신의 부친께 받았다는 편지 글이 머리에 맴돈다. “바쁜 가운데서도 잠깐씩이라도 주변을 돌아보며 생활의 여유를, 여유를 만들 수 있다는 자세를 가져야한다. 바쁘다는 이유로 남의 양해가 필요한 사람은 바쁜 일을 할 능력이 없는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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