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우범의 사라진 도시를 찾아서 <57> 암만, 왕의 대로

홍해에서 페트라, 암만을 거쳐 다마스쿠스까지 이어지는 왕의 대로.

[인천투데이] 요르단은 성경의 땅이다. 아브라함, 소돔과 고모라, 모세의 출애굽 등 구약뿐 아니라 예수의 세례지, 요한과 바울의 세례 운동과 사역 등 신약의 역사 무대도 요르단과 관계가 깊다. 또한 성서에 나타난 고대 왕국인 암몬ㆍ아모리ㆍ모압ㆍ에돔도 요르단이다. 암몬은 요르단의 수도인 암만이 중심지였던 왕국이다. 암만의 남쪽에는 아르논 골짜기 주변 아모리 왕국, 아르논 강부터 세렛 강 지역에는 모압 왕국이 있었고 홍해와 맞닿은 아카바, 페트라ㆍ와디럼 주변에는 에돔 왕국이 있었다. 고대로부터 이러한 왕국들을 연결하는 길이 있었다. 그 길은 ‘왕의 대로(King's Highway)’라고 불렸다.

왕의 대로는 홍해의 아카바 항에서 페트라와 요르단의 수도인 암만을 거쳐 시리아의 수도 다마스쿠스까지 이어진다. 이 길은 고대 이집트의 파라오들이 제국주의 정책을 확산하기 위해 건설했다. 그 후로 이 대로는 시리아ㆍ히타이트ㆍ바빌로니아ㆍ페르시아 등 여러 제국의 군대가 이동하는 통로가 됐다. 또한, 모세가 애굽 땅인 이집트를 나와 가나안으로 가기 위해 에돔 왕에게 이 지역을 통과할 수 있게 요청한 길이기도 했다.

‘청컨대 우리로 당신의 땅을 통과하게 하소서. 우리가 밭으로나 포도원으로나 통과하지 아니하고 우물물도 공히 마시지 아니하고 우리가 왕의 대로로만 통과하고 당신의 지경에서 나가기까지 좌편으로나 우편으로나 치우치지 아니하리다.’ (민수기, 20장 17절)

요르단의 수도 암만 옛 시가지 모습.

왕의 대로가 고원임에도 불구하고 차 안 온도는 내려갈 줄 모른다. 거센 바람이 열기를 식혀줄 것 같지만, 태양은 더욱 강렬한 햇살을 내리 꽂는다. 황무지 벌판의 꼭대기에서 좌우로 거침없이 너른 지형이 눈에 들어온다. 그리고 그 사이로 왕의 대로가 구불구불 뱀처럼 이어져있다. 수천 년간 수많은 사람이 오고간 길이기에 그보다 더 많은 흔적이 배어있다. 그래서인가. 보이는 것 모두 역사다. 그것도 정오의 햇살처럼 촘촘하다. 아니 겹겹이 쌓여 먼지를 펄펄 날리며 흘러넘친다.

모세와 그의 추종자들은 에돔 왕의 반대로 이 길을 가지 못하고 우회했다. 하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왕의 대로를 차지했다. 이스라엘 역사에서 황금시대라 할 수 있는 솔로몬 시대의 번성도 왕의 대로를 오가는 무역상들의 통행세 수입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왕의 대로는 군사적 목적으로 만들어졌지만, 대상(隊商)들이 이용할 수밖에 없는 국제 무역로로 발전했기 때문이다. 보다 나은 삶을 살고 싶은 인류 공동의 생각과 실천이 어김없이 왕의 대로 위에서도 펼쳐졌다. 그리고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그 길은 왕국과 제국의 권력 유지를 위한 길목이 됐다. 하지만 그뿐, 그들은 대로의 영원한 주인이 될 수 없었다.

11세기 말. 왕의 대로는 또 한 번 소용돌이쳤다. 서유럽 기독교인들이 성지 예루살렘을 이슬람 교인들로부터 탈환한다는 미명 아래 십자군전쟁을 일으켰다. 십자군전쟁은 2세기 동안 여덟 번에 걸쳐 일어났다. 이로 인해 왕의 대로는 기독교인과 이슬람교인의 피로 물들었다. 그것은 왕의 대로가 생긴 이후 최고로 참혹한 시기였다.

고대 모압 왕국의 도성이었던 카락성.
카락성 내부 박물관 모습.

왕의 대로 핵심 요충지에 있는 카락성에 들렀다. 한눈에 보아도 철옹성임을 알 수 있다. 고대 모압의 수도에 세워진 이 성은 당시에는 ‘길하레셋’성이라고 불렀다. 해발 933미터 고원에 위치한 성에 오르니 주변 언덕과 멀리 떨어져있는 계곡들이 선연하게 보인다. 그야말로 천연 요새가 아닐 수 없다.

십자군전쟁은 이슬람으로부터 성지인 예루살렘을 탈환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들에게 성지탈환은 그럴듯한 명분에 불과했다. 봉건영주들은 기사(騎士)들을 이끌고 영토 확장에만 목멨고, 상인들은 왕의 대로를 차지함으로써 얻을 상업적 이익에만 관심을 집중했다. 농민들에게는 봉건사회의 폭압에서 벗어나는 창구가 됐다.

하지만 누구나 할 것 없이 십자군전쟁에 뛰어들게 한 것은 따로 있었다. ‘십자군전쟁에 참가한 자는 모두 죄를 면할 것이다’라는 교황의 면죄부가 있었기 때문이다. 단지 십자군전쟁에 참가함으로써 그동안 지은 죄가 모두 용서된다는 마력(魔力)에 모두 불나방이 돼 달려들었다. 이렇게 조직된 십자군은 각자 면죄부를 갖기 위한 욕심으로 원정에 나섰다. 시작이 이와 같았기에 종교적 신앙심은 처음부터 없었다. 호기심과 모험심만 가득했으며, 그것은 무분별한 약탈과 살인으로 번졌다. 죄를 용서 받기 위해 더 큰 죄를 짓는 것. 이것이 십자군전쟁이었다.

전쟁터인 왕의 대로는 광분의 도가니 그 자체였다. 그러나 광분은 필망(必亡)으로 가는 지름길일 뿐이다. 그러하매 다분히 정치적이고 식민지적 영토 확장을 노린 십자군전쟁은 실패로 끝날 수밖에 없었다.

아모리 왕 시혼의 도성이었던 헤스본.
유적 복원 작업이 한창인 아즐론.

교황권 강화를 위해 제창된 십자군전쟁은 결과적으로 교황권 약화를 가져왔고, 오히려 귀족과 영주들의 영토가 왕의 영지로 편입됨으로써 왕권 강화에 기여했다. 하지만 가장 큰 이익을 얻은 것은 이탈리아 도시들이었다. 상업이 발달했던 이 도시들은 십자군전쟁으로 엄청난 부를 창출했다. 이는 중세 유럽을 변혁하는 촉매제 역할을 했다.

이슬람교도는 그들의 영웅 ‘살라딘’이 직접 행했듯이 관용 정신이 강했다. 하지만 십자군은 그렇지 않았다.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무슬림과 유대인 수만 명을 학살했다. 그렇게 십자군이 자행한 만행은 아무렇지도 않게 지나갔다. 역사는 시간이 흐를수록 이를 더 낱낱이 밝혀냈다. 그러자 교황은 십자군이 저지른 학살과 만행을 공식 사과하기에 이르렀다. 무려 900년이 지난 서기 2000년이었다.

오늘도 왕의 대로는 건재하다. 영광과 오욕의 역사는 모두 대로 옆에 나지막이 엎드려 있다. 대로만이 역사의 승리자가 돼 오늘도 새로운 역사를 만들어가고 있다. 하지만 새로운 역사는 왕의 대로도, 족장의 길도, 술탄의 길로도 불리길 거부한다. 그러한 이름 위에서 자행된 지난 시간이 몸서리치게 진저리나기 때문이다.

이제 대로는 인류가 풍요로운 삶과 문화를 향유하게 하는 전령사로서 길, 동ㆍ서와 남ㆍ북을 아우르며 함께 행복으로 나아가는 풍요의 길로 불리길 바란다. 그것은 누가 해야 하는가. 오직 지구촌의 인류가 해야 할 일이다. 길은 다만 역사를 반추하며 오늘도 미어지는 마음을 누르고 묵묵히 지켜볼 뿐이다.

※ 허우범은 실크로드와 중앙아시아 곳곳에 있는 역사 유적지를 찾아가 역사적 사실을 추적, 기록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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