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하연 시민기자의 ‘사연이 있는 클래식’
루트비히 판 베토벤 (5편 - 마지막)

[인천투데이 문하연 시민기자] 

베토벤의 단독 상속자 ‘카를’

베토벤은 기질이 온순한 사람은 아니었지만, 조카 양육권 다툼으로 지난한 법정 소송을 벌일 때부터는 괴팍한 정도를 넘어 주변 사람들로부터 제정신이 아닌 사람으로 취급당했다. 남동생의 아들인 ‘카를’에 대한 지나친 집착은 그를 점점 황폐하게 했다. 남동생이 사망하자 카를을 그의 어머니인 요한나로부터 빼앗아오는 일을 마치 카를을 구조하는 행위라 믿으며 그것이 영웅적이고 신성하고 정당한 임무라고 여겼다.

베토벤은 요한나를 품행이 단정하지 못한 여자로 판단하고 경멸했다. 그러니 그런 여자 밑에서 조카를 자라게 할 수는 없다는 주장이다. 당시 그의 일기장에는 “K(카를)를 너 자신의 자식으로 간주하라. 이 성스러운 목적 외에 모든 쓸데없는 소리나 사소한 일에는 신경쓰지 마라”라고 썼으며, 자신이 실제로 카를의 아버지가 됐다고 상상했다.

카를을 요한나와 떼어놓기 위해 베토벤은 법정 소송은 물론, 요한나의 행실이 나쁘다는 말을 퍼트리는 등, 자신의 모든 인맥을 동원해 노력했다. 이 과정에서 가장 큰 피해자는 당시 10세 남짓한 카를이었다. 카를은 법정에서 베토벤이 어머니의 부정한 행동을 비난하는 말을 들어야했고, 때때로 증언대에 서야 했다. 이 분쟁은 1816년부터 1820년까지 계속됐다. 법원이 베토벤의 손을 들어주고, 요한나가 다른 사람과 사이에서 딸을 낳으면서 일단락됐다.

성인이 된 카를은 베토벤과 사사건건 부딪쳤다. 통제하려는 베토벤과 자유롭고 싶은 카를은 점점 접점을 찾기 어려워졌고, 베토벤의 지나친 간섭에 깊은 우울증을 느낀 카를은 1826년에 권총 자살을 시도한다. 총알이 관자놀이를 비켜 가 큰 문제는 발생하지 않았지만, 이로 인해 베토벤은 큰 충격을 받는다.

이 끔찍한 사건은 빈 사람들의 입방아에 올랐고, 카를이 설 곳은 없었다. 이에 대해 궁정 군무국에서 높은 위치에 있던 베토벤의 친구 슈테판 폰 브라우닝은 “군대는 자유를 감당할 수 없는 자를 길들이는 데 최고의 곳이며, 그곳에선 최소한의 자유로 살아가는 법을 가르친다”라고 베토벤을 설득했다.

베토벤은 카를을 군대에 보내는 게 마음에 내키지 않았으나 별다른 도리가 없었기에 그를 보내기로 결심한다.

베토벤이 병원 치료를 끝낸 다음 둘은 다시 만났고, 카를은 건강이 급속도로 나빠진 베토벤 옆에서 그가 생의 마지막 작품인 F장조 현악 4중주(op. 135)와 B플랫장조 사중주(op130.) 마지막 악정을 마무리하는 것을 도왔다. 다음 해인 1827년, 해가 바뀌자마자 카를은 “새해에 행복하시길. 그런데 새해 첫날부터 큰아버지를 불쾌하게 만들었다니 유감스럽네요”라는 말을 대화수첩에 남기고 입대했다. 이 말은 베토벤을 향한 마지막 말이 됐다. 카를이 떠나자마자 베토벤은 자신의 유언장을 공증하게 했고, 카를을 단독 상속자로 지정했다. 그로부터 12주 후, 베토벤은 영원히 눈을 감았다. 부고가 늦게 도착하는 바람에 카를은 베토벤의 장례식에도 참가하지 못했다.

고귀한 미치광이?

베토벤은 마음에 들지 않으면 귀족과 법정, 황제까지도 서슴지 않고 욕했는데, 한 예로 오스트리아 화폐가 평가 절하돼 돈의 가치가 떨어지자 화가 난 베토벤은 프란츠 황제를 두고 “그런 불한당은 목을 매달아야한다”고 말했다. 경찰조차 그런 그를 조사하지 않았는데, 그가 그 유명한 음악가이기도 했고 황실에 인맥이 있기도 했지만, 그를 정상이 아닌 사람으로 봤기 때문이기도 했다. 1819년 독일 작곡가 카를 프리드리히 첼터는 괴테에게 보낸 편지에 “그(=베토벤)가 미치광이라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라고 썼다.

베토벤은 자신에 대한 주변의 이러한 평가와 시선을 잘 알고 있었다. “빈 사람들은 내가 미쳤다고 생각하는데, 그 때문에 오해하지 말라. 자주 있는 일이지만 진지하고 독자적인 견해를 말하면 그들은 내가 미쳤다고 생각한다네”라고 자신을 숭배한 빌헬름 크리스티안 뮐러 박사에게 한탄했다.

사람들이 그를 미치광이라고 생각한 이유는, 항상 헝클어진 긴 머리칼을 하고 마치 비명처럼 들리는 웃음소리에, 지나치는 사람들에게 욕설을 퍼붓고 알이 하나뿐인 안경을 쓰고 음정도 맞지 않는 노래를 부르다가 상형문자 같은 글씨를 공책에 쓰곤 했기 때문인데, 이런 상황과 무관하게 그 무렵 그의 주변에는 그를 열렬히 추종하는 집단도 늘어났다.

베토벤의 장례식 추도사를 썼던 그릴파르쳐는 그를 이렇게 표현했다.

“생애 후반에 대가가 처했던 서글픈 여건으로 인해 그는 실제로 일어나는 것과 그냥 상상의 소산인 것을 명확하게 구별하지 못하게 됐다. 그런데도 그가 취하는 온갖 괴상한 태도에도 불구하고, 거의 공격이라 해야할 지경까지도 갔음에도 그에게는 뭔가 표현할 길 없이 너무나 감동적이고 고귀한 면모가 있어서 그를 높이 평가하고 그에게 이끌리지 않을 수가 없다.”

이렇게 베토벤에게는 점차 새로운 친구들이 생겼으며, 그들은 베토벤이 무슨 요구를 하든 달려올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멀리서 그를 흠모하며 바라보기만 했던 슈베르트를 포함해 음악 출판업계에 몸담은 사람들과 슈판치히나 체르니와 같은 음악가, 홀츠와 같은 작가들이었다.

현악 사중주 악장의 제왕 ‘카바티나’

베토벤은 말년에 이르러 귀뿐 아니라 시력에도 문제가 생겼다. 눈 통증 때문에 아주 짧은 시간 동안만 작업할 수 있었으며, 햇빛에 민감해져 빛을 견디기 힘들었다. 그래서 늘 이중안경을 들고 살았고 정기적으로 안경사를 방문했다.

이런 상황에서 베토벤은 인류 최대 걸작으로 불리는 교향곡 9번 ‘합창’(그의 자필 악보는 2001년 유네스코 세계기록 유산으로 등재됐다)과 현악 사중주 다섯 곡을 만들어냈다. 특히 제13번 현악 사중주 B플랫장조 op. 130번 5악장인 카바티나는 베토벤에게 “모든 현악사중주 악장의 제왕이자 가장 좋아하는 곡”이었으며, 그는 이 곡을 만들면서 진정으로 슬픔의 눈물을 흘렸다.

1824년 5월 7일은 베토벤 교향곡 9번을 초연한 날이다. 이 곡이 완성되고 초연에 이르기까지 방대한 규모와 고난도 합창 부분 때문에 많은 일이 발생했다. 첫 번째 리허설을 끝내고 악장이었던 슈판치히는 베토벤의 대화수첩에 “적당히 해치울 수 있는 음악이 아니네요”라고 썼으며, 실제로 자기 파트를 완벽하게 소화해내는 연주자도 없었다. 합창단원들은 너무 어렵다며 고쳐달라고 수도 없이 요구했고, 독창자들도 너무 높이 올라가는 부분에 수정을 요구했지만 모두 관철되지 않았다. 결국 테너와 바리톤이 다른 가수들로 교체됐다.

쉰들러는 “그래도 그들이 여러 부분을 마음대로 쉽게 고쳤고, 베토벤은 그 자리에 있으면서도 그것을 들을 수 없었다”고 했다. 쉰들러의 주장이 사실이라면, 매우 슬픈 일이다. 작곡가가 자신의 모든 것을 갈아 넣어 만든 곡을 연주자가 연주하기 쉽게, 합창대가 부르기 쉽게 마음대로 고쳐 연주하고 노래하는데, 아무것도 들을 수 없는 작곡가는 그것도 모르고 그 자리에 서있다니.

이런 우여곡절 끝에 지휘자 미하엘 움라우프의 책임 아래 지휘자 세 명이 포디엄에 섰다. 당시에는 지휘자 두 명이 음악회에 서는 게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이날 베토벤은 생애 최고의 순간을 경험한다.

2악장 스케르초가 끝나자마자 박수갈채가 쏟아졌다. 연주에 집중하느라 청중에게 등을 돌리고 있던 베토벤은 아무것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누군가 그를 돌려세웠을 때 그는 너무 이른 경탄에 어쩔 줄을 몰랐다. 3악장이, 4악장이 끝났을 때 청중은 미친 듯이 환호했고, 베토벤이 듣지 못한다는 것을 안 청중은 모자와 손수건을 흔들었다. 베토벤은 다섯 번이나 무대로 불려나왔고 열광적인 갈채와 환호에 감동했다.

1977년, 무인 우주 탐사선 보이저호가 발사됐다. 보이저호는 목성과 토성, 그리고 다른 여러 위성을 관찰했고, 이 탐사선에는 우주인에게 보내는 메시지와 자연의 소리, 인간의 목소리 등이 담긴, 황금으로 만든 LP디스크 세 장이 들어있었다. 이 디스크에는 베토벤 교향곡 5번 ‘운명’ 중 1악장과 현악 사중주 13번 중 카바티나가 포함됐다.

[참고서적] 베토벤(얀 카이에르스, 홍은정, 도서출판길) / 루트비히 판 베토벤(메이너드 솔로몬, 김병화, 한길아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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