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우은실 문학평론가

[인천투데이] 최근 테드 창의 소설 ‘데이시의 기계식 자동 보모’를 읽었다. 과학자 데이시는 자신의 아들 라이어널이 보모에게 학대당한 사실을 알게 된 후 기계식 자동 보모를 고안한다. 그러나 기계 보모를 구입한 한 소비자의 아기가 기계의 오작동으로 인해 사망했다는 소식이 알려지면서 기계 보모는 다시 대중화되지 못한다. 라이어널 데이시는 아버지의 기계 보모가 틀리지 않았음을 입증하기 위해 자신의 아들을 대상으로 삼아 기계 보모의 정당성을 입증하려하지만 실패로 결론 내리고 만다.

후일 램셰드 박사가 한 요양병원에서 그의 아들 에드먼드를 발견하고, 에드먼드는 오히려 기계 보모의 영향 아래에서 제대로 성장할 수 있음을 알아낸다. 그러나 이에 대해 라이어널은 자기의 전 생애야말로 기계가 아닌 아버지의 애정이 아들에게 미치는 영향임을 증거한다고 말한다.

소설은 기계가 대체할 수 없는 인간성에 관해 말하고 싶었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이 이야기를 읽으며 떠올린 생각은 이런 주제와는 조금 다른 종류의 것이었다. 정보통신기술의 융합을 토대로 하는 4차 산업혁명 시기를 맞이하는 현시점에 기계에 의한 노동 평등은 과연 젠더 평등을 담보할 수 있을까? 요컨대 데이시가 기계 보모를 도입하는 것이 양육의 적격자를 찾는 일 이상의 의미를 지녀, 무급으로 처리돼온 돌봄 노동을 기계가 대신 수행함으로써 젠더 해방을 도모할 수 있는가.

기계가 인간의 노동을 대리 수행해 인간이 필요 이상의 소모적 노동을 할 필요가 없다면, 즉 이른바 ‘기계 평등’이 실현된다면 여러 노동 현장을 비롯해 사회 곳곳에서 종용돼온 여성 억압 내지는 여성의 이중 부담이 사라질까?

일군에서는 계급 문제가 젠더 문제에 앞서므로 ‘기계 평등’에 의해 노동의 부담이 사라져 계급 구조가 완화되면 젠더 문제도 자연스럽게 해결될 것이라고 예측하는 듯하다. 그러나 계급과 젠더 문제는 말끔하게 분리되지 않으며 계급과 젠더는 각각 상대방을 참조하거나 서로 근거가 되기도 한다.

따라서 계급과 젠더를 별개로 두고 둘 사이의 우선순위를 정할 수 있는가는 보류적일 수밖에 없다.

계급 문제가 해결되면 젠더도 해방된다는 주장은, 만약 ‘기계 평등’을 이뤄 가사 노동을기계가 대신하면 주방이 더 이상 여성의 ‘사적 공간’으로 의미화 되지 않는다거나 나아가 여성혐오범죄까지도 해결된다는 의미를 내포한다. 그러나 끼니를 제때 챙겨주지 않는다는 이유로도 발생하는 가정 폭력이나 여성혐오범죄 사례를 떠올려볼 때 여성이 아닌 기계가 밥을 해준다고 해서 이러한 문제가 극복될 수 있다고 단언할 수는 없다.

관련해 영국 드라마 ‘휴먼스(Humans)’의 한 장면을 본다. 드라마는 인공 지능이 탑재된 인간 형상 로봇 ‘휴머노이드’가 가정에 보편화된 미래를 배경으로 한다. 드라마 도입부에 한 부부가 휴머노이드를 집으로 들이는 장면이 나온다. 그들은 휴머노이드가 가사 노동과 돌봄 노동을 대리 수행해주기를 기대한다.

그런데 이러한 노동을 수행할 휴머노이드는 여성의 모습을 하고 있다. 기계 평등이 젠더 평등까지도 이뤄낼 수 있다면 우리는 돌봄 노동을 수행하는 로봇이 구태여 여성의 모습을 하고 있는 이러한 장면을 어떻게 이해하고 받아들여야 하는 걸까? 젠더 문제 해결은 젠더를 소거한 채 정량화된 노동 평등 또는 계급 평등만으로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은 아닐지, 고민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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