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희에게(Moonlit Winter)│임대형 감독│2019년 개봉

[인천투데이 이영주 시민기자] “윤희에게. 잘 지내니? 오랫동안 이렇게 묻고 싶었어. 너는 나를 잊었을 수도 있겠지. 벌써 20년이나 지났으니까. 갑자기 너한테 내 소식을 전하고 싶었나봐.”

일본 오타루로부터 날아온 편지의 수신인 윤희(김희애)는 남편 인호(유재명)와 이혼하고 매일 공장 식당에서 일하며 고3 딸 새봄(김소혜)을 키우고 있는 싱글맘이다. 삶에 지친 듯 무표정한 얼굴, 꼭 필요한 말 외에는 굳게 닫고 있는 입, 사람들의 눈을 피해 구석에서 움츠리고 담배를 피우는 굽은 등…. 윤희의 모습은 쓸쓸하기만 한데, 정작 전 남편은 “엄마와 왜 헤어졌냐”고 묻는 딸에게 “(윤희는) 사람을 외롭게 하는 사람”이라 답한다. 옆에 있는 사람을 외롭게 하느라 자신도 외로워진 걸까?

사실 윤희에게 온 편지는 윤희보다 딸 새봄이 먼저 읽었다. 엄마 몰래 편지를 읽고 편지의 발신인 준(나카무라 유코)이 20년 전 엄마의 첫 사랑일 거라 확신한 새봄은 엄마에게 오타루 여행을 제안한다. 준의 편지를 읽고 무미건조했던 마음에 작지 않은 동요가 생긴 윤희는 새봄과 여행을 떠난다. 윤희와 새봄의 여행엔 새봄의 남자친구 경수(성유빈)도 윤희 몰래 따로 또 같이 동행한다.

임대형 감독의 두 번째 장편영화 ‘윤희에게’는 여행으로 20년간 회피했던 과거를 직면하며 자신의 과거와 화해하고 성장하는 윤희의 성장담이자, 도통 애틋함과는 거리가 멀어 보이는 엄마와 딸이 인간 대 인간으로, 같은 여성으로 서로 지지하고 연대하는 모녀 서사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가족과 사회의 그릇된 편견으로 어긋날 수밖에 없었지만 여전히 절절하게 남아 있어 삶을 지속하게 만드는 ‘사랑’에 관한 영화다.

영화를 보고 난 뒤 가슴에 커다란 구멍이 뚫린 것처럼 외롭고 쓸쓸한데 이상하게도 마음이 따뜻해졌다. 윤희의 20년이 외롭고 쓸쓸해 마음에 찬바람이 불면서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윤희와 준을 보며 사랑은 여전히 삶의 이유란 걸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고나 할까. 뻥 뚫린 마음 한 구석에서 따뜻한 온기가 번져왔다.

윤희는 여자여서 차별받고 (부모가 아들 대학 보내느라 딸은 대학에 보내지 않았다.) 여자를 사랑한 여자여서 정신병원에 보내졌고 사랑하지 않는 사람과 원치 않는 결혼을 했다. 결국 이혼했지만 중년의 고졸 여성이 할 수 있는 일은 변변치 않았다. 윤희의 삶은 고달픔의 연속이었다.

삶에 떠밀려 윤희 자신조차 까맣게 잊고 살았을, 반짝반짝 빛나는 윤희의 모습을 기억하는 이는 어쩌면 멀리 타국에 있는 준뿐이었다. 윤희가 준을 다시 만나는 것이 첫사랑과 재회일 뿐 아니라 온전히 빛나던 자신을 찾기 위한 여정일 수밖에 없는 이유다. 이것은 아마 모든 감정을 닫고 사는 준에게도 마찬가지였으리라.

이 여행을 가능하게 한 조력자는 엄마에게 온 편지를 먼저 읽은 딸 새봄과 준의 고모 마사코(키노 하나)다. 준은 윤희가 생각날 때마다 편지를 썼지만 차마 부치지 못하고 매번 처음 쓰는 것처럼 편지를 써왔다. 함께 살던 고모가 우연히 그 편지를 읽고 한국의 윤희에게 부친 것이 여행의 시작이 됐다.

엄마가 오로지 자식 때문에 책임감으로 꾸역꾸역 사는 게 싫었던 독립적인 딸 새봄과 씩씩해 보이지만 좀처럼 마음을 드러내지 않는 조카의 모습에서 외로움을 읽었던 지혜로운 고모 마사코. 그들의 도움으로 윤희는 지워버렸던 과거인 준을 마주했고 그 시절의 사랑을 인정했다. 그것은 가족과 사회로부터 부정당했던 자기 존재에 대한 뜨거운 긍정이었고, 어제와는 다른 내일을 살아갈 이유가 됐다. 이러니 어찌 사랑을 믿지 않을 수 있겠는가. 다만, 사람이 사람을 사랑하는데 대통령이 나서서 ‘사회적 합의’ 운운하는 것이 2019년 작금의 현실이라니 울화가 치밀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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