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수연 인하대 프런티어학부대학 교수

[인천투데이] 2010년대 후반, 최대의 문제작을 꼽으라면 첫 번째로 언급되는 것이 조남주 소설가의 ‘82년생 김지영(민음사, 2018)’일 것이다. 이 책을 둘러싼 대립은 생각보다 거셌다. 대부분의 여성이 소설 속 김지영이 겪는 모든 사건을 자신의 일처럼 공감했지만, 일부 남성은 원색적인 공격과 조롱을 가했다. 실제로 이 책을 읽었다는 이유만으로 인기 걸그룹 멤버가 온갖 협박과 악성댓글로 공격당하기까지 했으니, 그 정도를 가히 짐작할 수 있다.

그런데 최근 이 작품을 원작으로 한 영화 ‘82년생 김지영’이 개봉되면서, 작품을 향한 원색적인 비난과 악의적인 공격은 오히려 소강된 분위기다. 물론 문자보다 영상이 감정이입이 더 용이하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배우들의 연기로 전달되는 ‘실감’이 파급력이 더 셌던 것만은 사실인 것 같다. 작품을 읽지도 않고 자행하던 공격들을 어느 정도 잠재우는 데 성공했을 뿐만 아니라, 책에 대한 관심도 다시금 환기했으니 말이다.

‘82년생 김지영’은 페미니즘 소설의 대표주자로 여겨진다. 하지만 최근 퍼져나가고 있는 탈(脫)코르셋 운동과 비교한다면 사실 그 내용은 상당히 온건한 편이다. 소설 속 김지영은 자신을 둘러싼 현실에 억압받지만, 어떤 지점에서 볼 때 그녀는 굉장히 체제 순응적인 인물이기도 하다. 가부장적 가정에서 자라, 남성 중심적 기업에서 일했고, 결혼해서 경력단절과 육아라는 현실 조건에 부딪힌다. 그 과정에서 이뤄진 그녀의 선택은 실질적으로 자신에게 주어진 현실 조건을 그대로 수용하는 것이었다.

이처럼 ‘82년생 김지영’에서 그려진 김지영은 지극히 평범한 삶과 행복을 추구하는 인물이다. 저항하기보다는 순응하기를 선택했다는 점에서 그녀는 페미니스트라고 규정되기도 어렵다. 그런데 이 작품을 매력적인 텍스트로 만드는 지점은 바로 여기다. 가장 평범한 보통의 한 여성이 처한 상황 자체가, 지금 이 시대에 왜 우리가 페미니즘을 논해야만 하는가를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이 작품이 문제 삼는 것은 김지영의 매순간 선택이다. 작가는 묻는다. 자발적인 것처럼 보이는 그 선택은 과연 자발적인 것일까? 김지영의 모든 선택과 수용은 사실상 강요되는 것이며, 한 인간으로서 여성의 욕망이 억압되는 과정이라는 점에 주목한다. 작가가 직접적으로 평가하지 않지만, 작품에 뒤따르는 각종 통계는 독자로 하여금 자연스럽게 그것이 결코 자발적인 선택의 결과일 수 없음을 깨닫게 한다.

이 작품은 페미니즘에 대한 혁신적 사상을 담고 있지 않다. 오히려 페미니즘이 자연발생적으로 등장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환기하는 것에 가깝다. 그것은 지금 여기의 여성들이 처한 사회적 생존조건에 다름 아니다. ‘82년생 김지영’에 대한 여성들의 열광 역시 거기서 나온다. 페미니즘이란 사상의 맥락을 몰라도 여성으로서 처한 삶의 풍경 자체가 자연스럽게 문제의식에 공감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러니 이 작품을 읽은 수많은 ‘김지영’들이 ‘어쩌다 보니 페미니스트’가 된 것은 결코 우연일 수 없다. 관념이 아닌 현실이, 그 위에서 생존하는 것이, 지금 이 순간의 페미니즘을 향한 가장 절박한 필요를 일깨우기 때문이다.

저작권자 © 인천투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