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전영우의 맥주를 읽다

[인천투데이] 맥주가 발전하는 데 교회의 역할이 상당히 컸다는 사실은 앞서 맥주 역사에서 수도원의 역할을 보면 잘 알 수 있다. 교회는 얼핏 맥주보다는 와인과 더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성경이 맥주보다는 와인을 더 중요시한 것은 사실이다. 예수가 기적을 행할 때 물을 맥주로 바꾸지 않고 와인으로 바꾼 것은 성경이 맥주를 어떻게 인식하는지 잘 보여주고 있다. 초기 기독교인들은 성경에 의거해 맥주보다는 와인을 마셨다.

유럽 남부에서는 성경의 가르침과는 관계없이 와인을 선호하고 맥주를 천시했다. 그리스인들은 와인을 신이 내려준 선물이라 여겼고, 맥주를 야만인의 음료로 취급했다. 따라서 그리스 문헌에는 맥주를 야만적으로 기록한 내용이 주를 이룬다. 그리스인들이 맥주를 부정적으로 인식하는 것은 로마인에게로 계승됐다. 4세기에 로마가 기독교를 국교로 삼으면서 맥주에 대한 편견은 심화됐다. 와인이 유대인의 기독교와 그리스 로마인의 전통에서 모두 지지를 얻은 발효음료였기에, 그 편견은 더욱 심화되고 고착됐다. 5세기경 알렉산드리아의 성 키릴로스(Kyrillos)는 맥주를 가리켜 불치병을 유발하는 이집트인의 차갑고 탁한 음료라고 폄하했다. 반면 와인을 사람의 마음을 기쁘게 하는 음료로 찬양했다. 이런 전통은 지금까지도 상당 부분 살아남아 와인은 세련되고 고급스러운 이미지로, 맥주는 거칠고 급이 떨어지는 이미지를 갖게 됐다.

와인을 선호하고 맥주를 폄하한 로마인들은 유럽 각지를 정복하면서 이런 인식을 퍼뜨렸는데, 주로 맥주를 마셨던 유럽 북부 귀족들은 차츰 이런 편견에 동화돼 와인을 마셨고, 기후 특성상 와인 양조가 어려운 지역에서는 남쪽에서 수입한 와인을 마셨다. 반면 서민들은 여전히 맥주를 마셨고, 이에 따라 계급에 따른 알코올음료의 분화가 심화됐다.

로마 제국의 영토가 확장돼가고 기독교가 전파되면서 와인의 위상은 점점 더 높아졌고 맥주의 위상은 곤두박질쳤다. 그런데 예외가 있었으니 바로 아일랜드이다. 영국에 진출한 로마는 스코틀랜드까지 점령하고 나서 아일랜드는 그냥 놔뒀는데, 당초 기대했던 만큼 영국 정복에서 실익을 얻지 못했기 때문이다. 덕분에 아일랜드의 켈트족은 로마의 침략을 받지 않고 비교적 평화롭게 살았고, 맥주의 전통도 고스란히 지키고 있었다.

5세기경, 로마가 정복한 영국 브리타니아 태생인 성 패트릭(St. Patrick. 385-461)이 기독교를 전파하기 위해 아일랜드로 건너갔다. 영국 태생이기는 하지만 로마 점령 속에서 로마 문화의 영향을 받았을 성 패트릭이 맥주를 좋아했는지는 기록이 없어 알 길이 없다. 하지만 기독교를 전파하기 위해 아일랜드로 건너간 성 패트릭과 그의 제자들은 아일랜드 사람들이 맥주를 즐기는 전통을 존중했다. 성 패트릭의 맥주에 대한 관대한 태도는 이들이 아일랜드에 기독교를 전파하면서 전통 맥주 문화와 자연스럽게 결합했다. 따라서 아일랜드 기독교에는 맥주의 전통이 살아남았다.

한편, 지금도 성 패트릭 데이(St. Patrick's Day)는 아일랜드의 주요 축제 중 하나인데, 성 패트릭이 죽은 날인 3월 17일을 기리는 의미에서 시작했다. 아일랜드 본토는 물론이고 아일랜드 출신 사람이 많이 거주하는 곳에서는 어김없이 열리는 축제로, 아이리쉬 문화를 상징하는 날이기도 하다.

아일랜드의 또 다른 수호성인 중 한 명인 성녀 브리지다(Brigida. 451-525)는 목마른 여행자에게 물을 맥주로 바꿔줬다고 한다. 또한 성녀가 보낸 맥주 한 통이 가면서 자꾸만 불어나 교회 열여덟 곳에서 충분히 마셨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다른 지역 기독교의 기적이 주로 물을 와인으로 바꾸는 것이었던 것에 비해 아일랜드에서는 맥주로 바꾸었던 것이다. 그녀는 기도할 때 “왕 중의 왕께 크나큰 맥주의 호수를 바치오니 천상의 가족이 그 맥주를 영원히 마실 수 있기를 바라옵니다”라고 할 정도였으니, 아일랜드의 맥주 전통은 기독교와 확실하게 결합했다.

기독교가 전파된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아일랜드는 곧 독실한 기독교 국가가 됐고, 유럽 전역에 선교사를 가장 많이 파견하는 나라가 됐다. 아일랜드 교회가 지켰던 맥주의 전통은 당연히 선교를 떠난 아일랜드의 선교사들도 지켰던 전통이었다. 이 아일랜드 선교사들이 유럽에 파견돼 선교활동을 하면서 아일랜드 교회의 맥주 전통을 함께 전파했다.

540년에 아일랜드에서 태어난 성 콜룸바누스(St. Columbanus)는 여러 수도원에서 수도 생활을 하다가 49세가 되던 해에 유럽으로 선교활동을 떠났다. 그는 유럽의 종교 상황에 실망하고 교리의 순수함을 회복하고자 노력했는데, 그가 설립한 수도원은 다른 수도원들이 모범으로 삼았을 정도로 교리를 엄격하게 지켰다. 그런 그에게 예외가 있었는데 바로 맥주였다. 그는 와인보다 맥주를 훨씬 더 귀하게 여겨 맥주를 쏟는 실수조차 용납하지 않았기에, 그가 설립한 안느그레 수도원에는 맥주를 쏟은 수도사에게 내리는 벌칙을 구체적으로 정해놓았을 정도였다.

콜룸바누스와 관련해서는 많은 이야기가 전해져 내려온다. 퐁텐느 수도원을 방문한 콜룸바누스는 수도사들이 고된 들일을 마치고 돌아오자 “주여, 우리 형제들에게 풍성한 음식을 내리소서”라고 축원했다. 그러나 먹을 것이라고는 빵 두 덩어리와 약간의 맥주밖에 없다는 말을 듣고는, 기도를 시작했다. “빵 다섯 덩어리로 5000명을 먹이신 예수 그리스도여, 이 빵과 맥주도 그렇게 풍성하게 만들어주소서!” 그러자 기적이 일어나 모두 배불리 먹고 마셨는데도 남은 빵과 맥주가 원래 있던 양의 두 배나 됐다.

콜룸바누스를 수행한 수도사 성 갈루스(St. Gallus)도 맥주 역사에 발자취를 남겼다. 갈루스는 콜룸바누스를 수행하다가 병이 나서 스위스 북부에서 요양했는데, 그곳이 마음에 들어 아예 정착했다. 그가 죽고 나서 그를 기념하는 교회가 세워졌고, 훗날 성 갈렌 수도원이 됐다. 820년에 작성된 성 갈렌 수도원 설계도는 중세 초기와 중기 유럽 수도원 건축의 모델이 됐다. 성 갈렌 수도원은 아일랜드 전통을 따라 건축됐고, 당연하게도 맥주 양조를 중요시했다. 따라서 수도원 설계도에는 곡물 창고, 곡물 건조장, 방앗간, 맥아용 곡물 창고, 그리고 양조장까지 상세하게 표시돼있다.

수도원에는 양조장이 세 곳 있었다. 제일 큰 양조장에서는 수도원에서 자체적으로 소비할 맥주를 양조했고, 두 번째 양조장에서는 손님 접대용 맥주를, 세 번째 양조장에서 순례자나 거지들에게 나눠줄 맥주를 양조했다. 그 이후 성 갈렌 수도원의 양조장 설계를 많은 수도원이 따랐고, 많은 수도원이 양조장 3개를 수도원 안에 만들어 성 갈렌 수도원의 맥주 양조 전통을 이어갔다. 성 패트릭이 아일랜드 맥주 전통을 존중하며 시작한 교회의 맥주 양조 전통은 이렇듯 유럽 전역의 수도원으로 퍼져나갔다.

※ 전영우는 오랜 동안 인천대 신문방송학과 교수로 일했다. 지금은 직접 재배한 홉을 사용해 맥주를 만드는 등, 맥주의 세계에 흠뻑 빠져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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