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영기 선생의 인천 섬 기행
백아도

[인천투데이 천영기 시민기자]

흔들바위에서 바라본 백아도 전경 / 산등성이로 해는 뜨고 만조에 방파제가 잠기다 / 만조 때 잠겼던 마을 선착장 (사진 위부터 반시계 방향)

만조에 잠긴 선착장

새벽에 무엇에 홀린 듯 선착장으로 향한다. 선착장 너머로 해가 뜨는 것 같다. 기차바위를 배경으로 한 컷 담아보고 싶었는데 만조의 파도가 선착장으로 가는 길을 찰랑이며 넘어온다. 물길을 자박자박 밟으며 길을 뚫어보지만 에구, 선착장이 온통 잠겨 접근할 수가 없다. 물길은 점점 잠겨오고 일렁이는 물결이 등산화 위로 들이친다. 일출의 장관을 담을 수가 없다. 해가 산등성이로 오르는 순간, 바람과 파도가 갑자기 거세진다. 마을 선착장 방파제를 치고 흩어지는 포말에 온몸이 홀딱 젖는다. 물에 빠진 생쥐 꼴이 됐다. 더 있다간 파도에 휩쓸릴 것 같아 아쉬움을 파도에 실어 보내고 민박집으로 발걸음을 돌린다.

고인돌 추정 돌을 보다

오늘은 티브이 예능프로그램 ‘1박2일’ 촬영지였던 흔들바위로 향할 예정이다. 마을 뒤로 길이 있는데 풀들이 너무 우거졌으리라는 생각에 선착장에서 오르기로 했다. 예전에 마을 사람들이 걷던 길이다. 수많은 섬사람이 지나간 이 길을 이방인인 나도 걷고 있다. 수천 년 세월의 흐름이, 사람들의 바쁜 걸음들이 순간에 겹친다. 계단을 오른다. 옛길 계단이 조금씩 무너지고 있다. 이렇게 세월은 인간이 만든 모든 것을 허물고 있다. 오르는 옛길 주변에는 산부추가 지천에 피어있다. 조금씩 땀이 배어나온다. 숲이 우거져 지금 가는 길이 맞는 것인지. 방향만 잡고 오른다.

봉화대도 있다는데 짐작되는 돌무더기는 영 아닌 것 같다. 군인들이 산에 쌓은 참호같이 보인다. 풀들이 우거져 사진만 찍고 통과한다. 2000년에 발간한 ‘군사보호구역 문화유적 지표조사보고서 경기도 편’을 보면, 백아도에 고인돌이 1기 있어 사진까지 실려 있다. 있는 곳은 ‘작은마을’이 위치한 섬의 작은 만 서쪽 산정으로, 고인돌의 북동-남동 간은 바다로 이어지는 절벽이다. 이곳은 지금 올라가는 곳과는 정반대 방향으로, 조망대 쪽이다. 그리고 사진에서 본 백아도 고인돌과는 확연히 다른 모습의 고인돌로 추정되는 돌들을 보았다.

능선에 올라 걷다 보니 예전에 왔을 때 고인돌로 추정했던 돌이 보인다. 주변을 훑어보았다. 전에는 한 기만 보였는데 주변에서 한 기 더 찾았다. 강화도 고려산 능선에서 보았던 고인돌군이 생각난다. 주변에 돌들이 깔려있다. 돌이 자연스럽게 무너졌다고 하기에는 무리가 따른다. 받침돌이 확실하게 있고, 돌도 깎은 흔적이 보인다. 나만의 착각일까. 학계에 보고되지 않은 고인돌을 누가 이곳 능선에다 만들어 놓았을까. 그리고 어떻게 그들은 이곳까지 건너왔을까. 오만가지 상상의 나래를 펼쳐본다. 집에 돌아온 후 고고학을 하는 분에게 사진을 보내니, 고인돌로 추정된다고 한다. 시급한 조사가 필요하다.

백아도 고인돌 추정 / 지하벙커 위의 송전탑 / 해무에 감춰진 발전소마을 가는 길 / 흔들바위 (사진 왼쪽 위부터 반시계 방향)

흔들바위 앞에 앉아

드디어 흔들바위에 도착했다. 바위를 밀어본다. 슬쩍 밀었을 뿐인데 흔들흔들. 바위가 흔들리는지 내가 흔들리는지 분간을 못하겠다. 역시 흔들바위 맞다. 여기서 끝이 아니다. 흔들바위 뒤로 돌아가면 백아도의 절경을 한 눈에 담을 수 있다. 눈앞에 펼쳐지는 백아도의 산세와 파란 하늘과 바다의 절묘한 조화, 아래로 보이는 포실한 마을과 해안 호선이 한 컷 한 컷 나뉘어 눈에 차곡차곡 쌓인다. 이래서 섬의 능선에 오르나 보다. 섬과 맞닿은 파란 하늘과 바다의 완만한 곡선. 부드러운 그 선의 울림에 가슴조차 편안하다. 어제 올랐던 남봉도 보이고, 그 숨겨진 절경들이 눈앞에 뚜렷하게 스쳐지나간다. 마음을 내려놓고 한정 없이 앉아있었다. 시간이 하염없이 흘러간다. 내려가기가 싫다. 자리를 깔고 마냥 햇살을 희롱하다 망부석이 될 뻔했다. 절절히 사랑하던 연인을 보내는 안타까움과 아쉬움이 이런 것 아닐까. 숲과 풀이 우거져 흔들바위에 오르는 길을 찾지 못할까봐 선착장으로 올랐는데 내려와서 보니 보건소 옆길로 올라가면 한결 수월하다. 산으로 들어가는 길이 잘 닦여 있고 흔들바위까지 한 고개만 넘으면 선착장까지 완만한 경사를 쉽게 내려올 수 있다.

백아도 옛길

해안도로가 만들어지기 전에 보건소 마을에서 발전소 마을로 가려면 산을 넘어 다녀야했다. 그 길을 걷기로 했다. 폐지된 백아분교를 조금 지나면 오른쪽으로 조망대로 오르는 길이 있다. 경사가 가파르지 않고 천천히 오르니 활짝 핀 분꽃이 반기는 듯하다. 잠시 후 바로 능선에 도착, 해풍에 크게 자라지 못한 소사나무 군락지가 눈앞에 펼쳐진다. 잔가지들이 구불구불 절묘한 자태를 뽐낸다. 기기묘묘하다고 할까.

군락지 바로 밑으로는 가파른 절벽과 우뚝 솟은 바위가 있다. 해무가 밀려오며 자태를 감추고는 실체를 잘 드러내지 않는다. 조망대에서 섬의 뒤편, 해안절벽과 바다를 감상한 후 다시 송전탑으로 향한다. 능선을 따라가며 해안절벽이 나오면 절경에 취해 무의식적으로 사진을 찍는다.

잠시 걷다가 너럭바위가 있어 휴식을 취한다. 처음 능선에서 보았던 우뚝 솟은 바위가 이곳에서 보니 마치 사자가 웅크리고 앉아있는 모습으로 보인다. 사자바위라 명명하자. 이름을 누가 붙이든 무슨 상관이 있으랴. 자연은 말없이 그 자리에 그냥 있는 것을. 누구든 붙이는 사람 마음이지. 어떤 이름을 붙이든 자연의 본질이 변하겠는가. 그냥 이런 자그마한 재미를 즐기는 것도 인간의 한 모습인 것을.

송신탑은 폐허가 된 해군부대 지하벙커 위에 우뚝 솟아있다. 벙커에 문이 없어 호기심에 깜깜한 어둠 속으로 들어간다. 벙커 안에는 배기구, 철판, 형광등 본체가 벌겋게 녹슨 채 세월의 무상함을 알려준다. 벽에는 아직도 해군부대의 흔적인 ‘제2함대 사령부’라는 포스터가 한쪽 귀퉁이가 떨어진 채 붙어있고, 벽시계가 11시 50분에 멈춰있다. 기행을 다니다보면 군부대가 철수한 곳도 가보게 된다. 군대는 아군의 전력이 노출될 수 있기 때문에 절대 흔적을 남기지 않아야한다고 교육한다. 그런데 부대가 철수할 때 하나같이 원상복구하지않고 흉물로 방치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하다. 선견지명이 있어 미래의 관광자원을 위해 그대로 남겨두는 것으로 착각하는 것은 나만의 무지일까.

해무에 가려진 조망대 바위 / 적벽으로 바뀐 남봉 절벽 / 사자바위라 이름을 붙였다. / 밀물에 잠긴 백아도항 길 (사진 왼쪽 위부터 반시계 방향)

발전소 마을 선착장으로

송전탑 앞에서 발전소 마을을 바라보니 해무가 남봉을 휘어 감고 산자락을 타고 올라온다. 그 사이로 길이 희끗희끗 보일 듯 말 듯 드러난다. 이것이 꿈에도 그리던 선경이 아니던가. 갑자기 삿갓에 지팡이를 짚은 내가 보인다. 흥얼대며 안개 속으로 사라지는 도포의 끝자락을 펄럭이며 나도 안개가 돼 잠겨간다.

헬리콥터장과 대숲을 지나니 마을이 나오는데 깔끔한 집 몇 채를 제외하고 중간 중간 허물어진 집터와 1968년 11월 8일 상량식을 했던 폐가가 된 교회가 쓸쓸함을 더한다. 과거의 성세를 말해주기도 하지만 현재의 몰락을 보여주기도 한다. 세월이 흐르면 모든 것이 낡아가게 마련이다. 사람도 이와 같지 아니한가. 자연속에서 태어난 만물이 낡아서 사라지듯 우리도 그렇게 서서히 사라질 것이다.

마을 초입에 기왓장이 벗겨 떨어진 한옥이 있다. 기울어가는 햇살이 쓸쓸하게 기와집으로 떨어지고 있다. 과거에 이곳의 유지로 떵떵거리며 살았다는 황 부자네로 알고 있다. 덕적군도의 끝 섬인 백아도에 기와를 실어와 집을 지은 것만 봐도 얼마나 세도를 부리던 집이었는지 알 것 같다. 그러나 시간은 과거를 모두 삼켜버렸다.

어장 쇠퇴와 해군부대 철수로 사람들도 떠난 섬, 이곳에 100% 청정에너지를 공급하기 위한 탄소제로섬을 조성하기위해 최첨단 과학시설인 풍력발전소와 태양열 발전소가 들어섰다. 퇴락과 최첨단의 대비에 묘한 느낌이 든다. 시간이 지나 최첨단 시설도 폐허가 되면 어떤 모습으로 변할까. 과거와 현재의 대비로 미래를 상상해보는 것도 재미있지 않을까.

과거에 유일한 선착장이었던 발전소 마을 백아도항에 가니 매표소 건물만 남아있다. 이곳에서 남봉의 절벽이 한 눈에 들어온다. 해가 질 때 가면 말로 표현하기 힘든 멋진 풍광을 볼 수 있다. 기울어가는 햇빛에 온몸을 불사르는 절벽의 모습이 장관이다. 점점 짙어가는 적벽을 바라보며 손수 빚은 청주를 한 잔 한 잔 넘긴다. 시시각각 붉은 칠을 하는 너를 바라보며 술에 익어가는 내 가슴도 하나가 된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앉아있다 물에 잠길 뻔했다. 어느새 물이 밀려와 도로를 덮쳤다. 누구를 원망하랴. 등산화를 벗고 바지를 무릎 위로 올린 후 후다닥 선착장을 벗어났다. 숙소로 돌아오는 차량을 얻어 타지 못했으면 도중에 길이 끊겨 오도가도 못하는 신세가 됐을 것이다. 밀물 때 해안도로 일부가 바다에 잠길 줄 누가 알았겠는가.

전에 백아도에 왔을 때는 해삼종묘장에서 일하는 잠수부들에게 낙지와 해삼을 한 상 가득 얻어먹었는데, 이번에는 공사를 하러온 팀에게 염소구이를 대접 받는다. 백아도는 내게 푸짐한 먹거리를 제공하는 섬인 것 같다. 서로 정담을 주거니 받거니 하며 밤을 밀어낸다. 이렇게 백아도의 밤은 깊어만 간다.

이제 백아도를 나온다. 기차바위는 여전히 바다를 향해 기적만 울린다. 떨어지지 않는 발길, 섬을 찾는 이에게 이 섬의 아름다움을 전하고 싶다. 지금 내 가슴 속에는 섬들이 오롯이 들어앉았다. 눈을 감으면 둥실둥실 떠 있는 섬들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계속해서 섬으로 떠돌아야할 것 같은 예감에 몸과 마음이 무엇엔가 홀린 듯 흔들린다.

※ 천영기 선생은 2016년 2월에 30여 년 교사생활을 마치고 향토사 공부를 계속하면서 시민들과 함께 월 1회 ‘인천 달빛기행’과 때때로 ‘인천 섬 기행’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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