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의 항일 언론인, 청년의 든든한 후원자
박창한과 최진하

[인천투데이]인천의 항일운동가를 좇다보니 10대 후반에서 20대 초ㆍ중반 청년ㆍ학생이 중심이었다. 해방 후 반독재투쟁에서도 대학생과 청년노동자들이 선두에 섰으니, 시대는 달라도 연령으로 보면 무척 자연스럽다.

일제강점기 인천의 청년운동, 항일운동에 어른이라고 할 만한 사람이 두 분 있다. 언론인이자 사회운동가인 박창한(朴昌漢)과 최진하(崔晋夏)다. 1900년 전후에 태어난 이들이 1920년대 중반 청년ㆍ사회운동을 본격적으로 열었다면, 그들보다 적어도 10여 세 연상인 두 사람은 때로는 앞에서, 때로는 뒤에서 청년들이 의지하는 존재였으리라.

박창한(1928.12.3. 촬영) / 최진하(1931.9.27. 촬영)

‘일제감시대상 인물카드’를 보면, 박창한은 1889년 6월 13일생으로 부모는 박병옥(朴炳玉)과 한청하(韓淸河)이다. 본적은 인천부 율목리(栗木里) 57번지, 출생지는 서울 동대문이고, 주소는 인천부 송림리(松林里) 247번지다. 키는 159cm가량이며, 1928년 체포됐을 때 직업은 인천거래소 중매인이었다.

1928년 11월 30일 경기도 경찰부에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체포됐다. <동아일보> 1928년 12월 1일 기사에서도 체포 사실을 확인할 수 있는데, 재판 관련 내용이 없다. 사진도 형사과에서 찍은 것으로 보아 기소되지 않고 풀려난 것으로 추정된다.

민립대학 설립 운동에 인천 발기인으로 참여했고, 1924년 9월 1일 인천공회당에서 열린 관동 대지진 피해 조선인 추도회에서 인천노동총동맹 회장으로 개회사와 애도사를 했다. 1924년 11월 25일 경성부 재동 해방운동사에서 개최한 사회주의 계열의 북풍회 창립총회에 참석해 집행위원으로 선출됐으며, 1925년 1월 11일 오후 7시 인천노동총동맹 회관에서 열린 인천철공조합 창립총회에 인천노동총동맹 위원장으로 참여해 인천철공조합 임시의장으로 선출되기도 했다.

이런 활동 때문에 1926년 4월 19일 종로경찰서의 사상요시찰인 명부에 올랐는데, 당시 <조선일보> 인천지국장이었다. 고일의 ‘인천석금’에는 박창한의 생애를 다음과 같이 묘사해 놓았다. “조선일보 지국의 전성시대는 지국장 박창한 시대였다. 본사장 월남 이상재 선생, 신석우 씨 시대에 인천지국을 발전했으니 지국도 애관 옆자리에서 내동, 율목동 그리고 인현동으로 세 번 옮겼다. 미두(米斗-期米=경제부) 기자에 최진하 씨요, 사회부에는 김태현ㆍ정수일씨요, 객원으로 백대진 씨 외 필자였다. (중략) 한쪽으로 미두취인소(米斗取引所) 중매점의 바다찌(場立:중매 담당자)로도 있어 돈욕심 사업욕심이 대단하던 호사가였다. 각종 운동경기 주최, 강연ㆍ연극ㆍ음악회 등 주최, 한편으로 노동총동맹을 조직하고 노동운동ㆍ청년운동ㆍ보이스카우트운동에도 가담하였으니 그의 야심적 명예욕을 비방하던 동업자가 상당히 많았다. 그러나 미두에 실패한 후 그는 사업욕을 잃고 세상을 떠났다. 박창한 씨의 계씨(=동생) 박정규(朴鼎圭) 씨가 지국을 계속하다가 최진하 씨가 다시 지국장이 되어 폐간 시절까지 계속했다.” 잡지 <삼천리> 제12호(1931년 2월 1일) 사고(社告)를 보면, 인천부 금곡리 소재 <삼천리> 인천지사의 책임자였다고 한다.

고일은 박창한이 동업자로부터 ‘야심적 명예욕’을 가진 사람으로 비방 받았다고 했으나, 개인의 안위만을 생각하는 사람이었다면 일제의 감시 대상이 되는 노동운동ㆍ청년운동에는 관여하지 않았을 것이다. 활발하기 그지없는 다양한 활동을 시기어린 시선으로 보는 사람이 많았으리라.

사망 시점은 분명히 알 수 없지만 <매일신보> 1937년 2월 13일에 공제무진 주식회사 인천지점에서 외무사원 박창한이 사퇴했다는 광고를 냈고, <조선일보>가 1940년 8월에 폐간됐으며, 동생과 최진하가 지국장을 이어 그 시점에 이르렀다는 점을 생각하면 1937년 또는 1938년에 세상을 뜬 것으로 추정된다.

또 한 사람, 최진하는 1887년 11월 5일생으로 본적과 출생지는 경상북도 김천군 개녕면(開寧面) 광천리(廣川里) 1-134번지이고, 주소는 인천부 용강정(龍岡町) 1번지이다. 1931년 9월 27일 서대문형무소에서 사진을 찍었는데, 그해 7월에 만보산 사건 영향으로 인천에서 발생한 화교 배척 사건 관계자로 체포ㆍ수감됐다가 1심에서 징역 1년을 받았으나 1932년 6월 2일 2심에서 무죄 판결을 받았다.

최진하 역시 1920년대 초반부터 활발히 활동했는데, 1924년 9월 1일 인천공회당에서 박창한이 개회사와 애도사를 한 관동 대지진 피해 조선인 추도회에서 <조선일보> 인천지국 소속으로 추도문을 낭독했다.

1927년 6월 9일 <동아일보> 기사를 보면, 인천의 전 계층을 망라해 구성된 신정회(新正會) 창립총회에서 위원에 선임됐고, 1934년 8월 1일 발간된 잡지 <삼천리>에는 <조선일보> 인천 주재 기자로 나온다. 앞서 고일이 ‘인천석금’에서 박창한의 뒤를 이어 <조선일보> 인천지국을 맡아 운영했다는 이야기와 연결된다.

이렇듯 최진하는 1920년대 중반에 이미 30대 후반의 나이로 인천의 여러 사회단체 활동에 나섰으며, 언론사 기자로도 활동했다. <매일신보> 1936년 1월 14일 기사는 조선인으로 구성된 인천체육회 창립을 전하며 이사 중 한 명으로 최진하가 선임됐다고 했다.

최진하가 신문 기자가 되고 사회운동에 뛰어든 계기를 짐작하게 하는 진술이 1949년 7월 13일 반민족행위특별재판부에 출석한 일제 고등경찰 출신 이중화(李重華)의 입에서 나왔다. 전후 맥락을 볼 때 3ㆍ1운동 당시 최진하는 인천공립보통학교 교사였는데, 만세운동에 참가한 학생 수십 명이 체포되는 걸 보고 교사를 그만두고 신문 기자가 됐던 것 같다.

해방 후에도 최진하는 활동을 계속했다. <한성일보> 1946년 5월 8일 기사를 보면, 이승만ㆍ김구 등이 참여해 결성한 민족주의 세력의 연합체인 대한독립촉성국민회 경기도 지부 결성식에서 부지부장 두 명 중 한 명으로 선출됐다. <대한일보> 1948년 1월 7일 기사에는 당시 권한과 의무가 불명확했던 인천부고문회를 해체하고 새로 재편하기로 결의하며 선출한 준비위원 일곱 명 중 한 명이었고, 같은 신문 2월 4일 기사에는 인천 부내 각 동회장이 참여한 선거로 뽑은 인천부 고문 25명 중 한 명이었다. 1949년 3월 1일 <대중일보>는 3ㆍ1운동 30주년을 맞아 인천 각계 인사의 발언을 실었는데, 최진하는 이승만 계열의 한국독립당 인천지부 상임위원이었다.

1949년 3월 10일 <대중일보>에는 반민특위 인천지부의 서기관 최진하가 자진 사퇴했다는 기사가 실렸는데, 일제강점기 인천부회 의원을 역임한 친일파 김윤복의 동상 건립에 최진하가 발기인으로 참여했다는 논란에서 비롯한 것이다. 본인은 계림자선회란 단체의 이사였기 때문에 이름을 가져다 쓴 것이라 해명하면서도 ‘서기관 자리를 깨끗이 하기 위하여 단연 은퇴’한다고 선언했다.

이 두 사람은 1920년대와 1930년대 인천 사회운동의 동지로 좌우 구분 없이 활동했다. 그 과정에서 여러 계층, 입장의 사람들과 맺은 넓은 관계는 이들의 활동을 뒷받침하기도 장애가 되기도 했던 것 같다. 최진하가 환갑에 가까운 나이에 맡은 반민특위 서기관에서 물러나게 되는 과정이 그렇다.

새가 양쪽 날개로 날고, 자전거 바퀴가 두 개여야 굴러가는 것처럼 특정 세대, 특정 입장의 힘만으로 사회를 끌어가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 젊은이의 패기만으로도, 장년의 경륜만으로도 부족하다. 경륜과 패기가 조화를 이룰 때 비로소 큰 혼란 없이 사회는 진보한다.

섣부른 판단이지만, 박창한과 최진하는 젊은이들이 앞장서 외치는 일제 타도와 조선 독립, 생존권 확보에 절반 이상 발을 걸쳐 놓되, 사상적으로 경도되지 않으면서 지역 내 다양한 단체에 속해 활동을 전개했다. 양쪽으로부터 비판받기 딱 좋은 행보였다. 한 쪽에서는 개량주의ㆍ기회주의로, 한 쪽에서는 좌익으로 비판 받았을 가능성이 크다. 그렇기에 더더욱 이 두 사람은 인천의 항일운동에서 소중하고 중요한 존재가 아닐까? 현실과 이상을 두루 아우르는 삶이란 말처럼 쉬운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김락기 인천문화재단 인천역사문화센터장

※ 이번 회를 마지막으로 연재 ‘일제가 감시한 인천의 독립운동가’를 마무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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