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념갈등 떠나 김원봉의 진면목과 진실 알리고 싶었다”
“이념갈등 떠나 김원봉의 진면목과 진실 알리고 싶었다”
  • 김갑봉 기자
  • 승인 2019.11.18 12:0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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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이원규 ‘민족혁명가 김원봉’ 저자
“임시정부 파괴 아니라, 헤게모니 다툼”
“국민의 축복 속에 훈장 받는 날 올 것”
책 '민족혁명가 김원봉'(한길사)
책 '민족혁명가 김원봉'(한길사)

[인천투데이 김갑봉 기자] 인천 작가 이원규 선생이 ‘약산 김원봉 평전’을 14년 만에 전면 개작했다. 한길사가 3ㆍ1운동과 의열단 창단 100주년 기념으로 출판한 ‘민족혁명가 김원봉’은 약산의 독립운동 활동과 생애를 엮은 책이다.

이원규 선생은 “2005년 ‘약산 김원봉 평전’을 펴낼 땐 자료가 논문 10편에 책 서너 권에 불과했는데, 그 사이 약산과 관련한 자료가 20배 정도 공개돼 다시 쓸 수 있게 돼 다행이다”라고 말했다.

또, “내가 얻은 자료도 있지만 미국과 소련 자료가 공개됐고, 연구자들의 연구 성과도 상당하다”며 “약산 평전은 늘 마음에 빚으로 남아 죽기 전에 꼭 전면 개작하려했다. 이번에 나와 마음의 빚을 덜게 됐다”고 했다.

약산은 1919년 11월 10일 의열단을 결성해 단장으로 활동했다. 해방 후 월북했기에 그의 삶과 독립운동 기록은 미완성으로 남아있고, 남과 북 양쪽에서 인정받지 못한 비운의 항일 혁명투사다.

약산은 조선의용대를 창설하고 임시정부 군무부장을 맡는 등,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하는 데 앞장섰다. 조국 해방과 민족 화합을 위해 몸 바쳐 투쟁했지만, 북한에서 지냈다는 이유로 제대로 조명 받지 못했다.

조선의용대(광복군과 통합)와 조선의용군(중국 공산당 팔로군 활동)은 서로 다르지만, 뿌리는 둘 다 약산이다. 중국 국공합작(항일을 위한 중국 국민당과 공산당의 합작)과 국공내전 역사와 맞물리면서 한 축은 조선의용대, 다른 축은 조선의용군이 됐다.

중국 국공합작 때 국민당 자금으로 창설한 게 조선의용대다. 약산은 중앙군관학교 출신 조선인 약 150명을 군 장교로 육성해 한반도와 가까운 중국 화북과 동북으로 진출하는 무장투쟁을 준비했다. 중앙군관학교는 중국 광저우 황포도에서 개교했다. 이후 한인 투사들이 황푸와 뤄양, 싱쯔로 이동하며 분교를 만들어 공부했다.

국공합작 때 저우언라이(중국 공산당 간부, 중국 초대 총리)는 조선의용대를 팔로군(=국공합작 시 중국 국민정부가 편성한 공산당 군대)으로 포섭하기 위해 노력했다. 저우언라이는 중앙군관학교 개교 초기 정치부 주임을 맡았으며, 이때 약산이 재학 중이었다.

결과적으로 조선의용대 중 70%는 팔로군을 따라 북상했다. 이들을 기다렸다가 수용한 게 팔로군에서 활약하던 ‘중국 인민해방군 포병부대의 아버지’로 일컬어진 조선인 무정이었다. 이들이 바로 조선의용군이다.

그러나 조선의용대 창설 자금을 중국 국민당이 댔기에, 전체가 화북과 동북으로 갈 순 없었다. 화북에 가지않고 충칭에 남은 약산 등 30%가 조선의용대다. 국공합작이 깨지자, 국민당 정부는 광복군이랑 합치라고 했다. 이에 약산을 비롯한 조선의용대는 광복군으로 통합됐다. 아래는 이원규 선생 인터뷰를 정리한 글이다.

이원규 ‘민족혁명가 김원봉’ 저자.
이원규 ‘민족혁명가 김원봉’ 저자.

첫 평전, 자료 적어 픽션 많아

2003년 무렵 소설가협회가 자금을 지원해 102명의 위인전을 출판할 때다. 그때 김원봉 평전을 쓰겠다고 해서 1차 지명 작가로 지정됐다. 의열단 투쟁 현장을 꾸준하게 취재했기에 자신이 있어서 쓰겠다고 했다.

약산에 관한 자료는 별로 없었지만 역사를 공부한 만큼 수월할 것으로 생각했는데, 나중에 쉽지는 않았다. 당시 약산 관련 자료는 지금 공개된 자료의 15분의 1에 불과했고, 금기의 대상이라 조심스러웠다. 한편, 약산 평전을 쓴다고 하니 보수진영에서도 고마워하고 인정도 했다. 처음 책이 나왔을 때(2005년) 지금처럼 이념갈등이 민감하진 않았다.

평전을 쓰기 위해 공부하면서 한국 독립운동사와 중국 공산당사, 한국 공산당사 등을 공부했다. 하지만 자료가 많지 않으니 추정한 것도 있다. 그래서 첫 평전은 픽션이 많다. 나중에 부끄러움과 빚으로 남았고, 새 자료가 나올 때마다 다시 쓰기 위해 모아뒀다.

약산 체포는 미군정의 명령

처음 쓸 때 약산 막내 여동생 김학봉 여사가 생존해 있었다. 약산은 금기의 대상이라 그에 대한 책이 나오는 걸 상상하지 못할 때, 자기 오빠에 관한 책을 쓴다고 하니 반신반의했다. 김학봉 여사는 약산이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고 했다. 그래서 이번에 그렇게 썼다. 그리고 김학봉 여사는 약산이 월북 전 서울 청계천 인근 수표동 집에서 노덕술(=친일 악질경찰)한테 끌려갔다고 했다. 그러나 최근 공개된 미군정 자료를 보면, 미군정 경찰이 약산을 서울역에서 체포했다. 약산을 미행하고 괴롭힌 것도 미군정이었다.

약산이 항일투쟁에 발 담그기 전인 조선 말기 의병장 중에 이조참판을 지낸 허위라고 있다. 경북관찰사 장승원이 이조참판이던 허위를 찾아가 ‘잘 봐 달라’며 20만 냥을 내밀었다. 허위는 ‘나중에 나라가 위태로우면 쓰자’며 거절했고, 나라가 망하자 의병장이 됐다. 허위는 수락산과 도봉산 일대에서 13도 의병군을 지휘했는데, 결국 실패했다.

훗날 살아남은 의병 중 박상진 대한광복회장이 장승원을 찾아가 허위한테 주기로 했던 돈을 독립자금으로 내놓을 것을 요구했다. 하지만 내놓지 않자 죽이고 허위 장군부터 시작한 경위를 써서 붙였다.

장승원의 아들이 바로 미군정 수도경찰청장 장택상이다. 당시 장택상은 에든버러대학 유학중이었다. 의열단의 척살 대상에는 노덕술이 포함돼있었다. 첫 평전을 쓸 땐 장택상이 자기 아버지를 죽인 원한을 품고 노덕술을 앞세운 줄 알았는데, 미군정의 작품으로 드러났다. 당시 미군정 내무부장 안재홍은 미군정의 주문이었다고 했다. 공개된 미군정 문서에 약산 체포에 대해 “내 손도 떠나있었다. 미군정의 명령이었다”는 안제홍의 증언이 나온다.

임정 파괴가 아니라, 헤게모니 다툼

이원규 ‘민족혁명가 김원봉’ 저자.
이원규 ‘민족혁명가 김원봉’ 저자.

보수진영은 약산을 공산주의자요, 임시정부(이하 임정)를 파괴하려했다고 주장한다. 나 또한 임정을 파괴했을 거라고 심정적으로 기술했는데, 나중에 관련 자료가 공개됐다. 임정을 파괴한 것처럼 보이는 자료가 나왔는데, 파괴했다고 보기보단 헤게모니 다툼이 치열했다고 봐야한다.

화북으로 올라간 조선의용대는 조선의용군이 됐지만, 충칭에 남은 조선의용대는 임정의 대한광복군에 통합된다. 조선의용대엔 이념이 사회주의가 아닌 사람들이 남았다. 민족혁명당(약산이 이끌던 당)도 임정의 한 정치세력으로 들어갔다.

임정은 의정원(=국회)과 내각으로 구성된다. 의정원은 약 50명이고, 내각은 15명 정도다. 의정원과 내각에 약산 세력은 한 명도 없었다. 조선의용대와 통합하기 전까지 지분을 안 줬다.

조선의용대는 전장에서 싸우던 젊은 사람들인 반면, 임정 인사들은 나이가 지긋한 분들이었다. 서로 헤게모니 다툼이 치열했다.

일례로 1944년 무렵 장준하ㆍ김준엽(고려대학교 총장) 등 일본군 부대에서 탈출한 조선인 학병 50명이 충칭에 도착했다. 임정 내 각 정치세력은 이들을 서로 포섭하기 위해 미인계와 술로 유혹할 정도였다.

이들이 임정을 찾았을 때 백범 김구 주석이 환영 연설을 했다. 김구 주석 다음으로 이시영ㆍ조소앙ㆍ김규식 같은 인사들이 연설해야하는데, 김준엽 회고록을 보면 김구 다음으로 40대 김원봉이 연설했다. 이때 2인자로 올라선 것으로 파악된다. 의정원 50명 중 24명을 김원봉 세력이 차지했다. 우익진영에선 이를 임정 파괴로 해석했다.

백범과 약산, 임정에서 경쟁했지만 항일에 한 뜻

미국 전략첩보국(OSS)는 중국 시안에서 국민당 정부의 협조를 받아 학병을 대상으로 무전과 낙하산 훈련 등을 교육했다. 김우전ㆍ김준엽ㆍ장준하 등이 교육에 참여했다.

1945년 일본 패망 직전 수료식이 열렸고, 김구는 이청천과 함께 수료식에 동행했다. 그래서 김구와 이청천, 이범석(OSS와 임정 합작 국내정진군 대장)은 시안에서 8ㆍ15해방을 맞이했다. 나머지 인사는 충칭에 있었다.

기록을 보면, 약산은 일본 패전 소식을 듣고 빨리 국내 진공을 해야 한다고 주창했다. 약산은 김구의 영도력으로는 광복군이 국내 진공을 못할 것이라고 여겼을 것이다. 약산은 황푸군관학교 출신인 데다 중국 국민당 군부에 아는 이도 많아 자신이 국내 진공에 적임자로 판단했을 것이다.

김준엽의 장인 민필호의 회고록에 “김구는 ‘내가 없는 사이에 약산이 의정원과 내각을 흔들어서 주석을 폐위하고 다른 사람 뽑자고 했다. 괘씸하다’”고 기술한 부분이 나오는데,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을 보면 이는 사실과 다를 가능성이 높다.

지금 보수우파는 김원봉을 두고 빨갱이이자 김구의 방해꾼으로 규정하고 있다. 그러나 조선의용대가 화북으로 가기 직전 조선의용대 제2인자 윤세주가 김구를 만나 나눈 얘기를 보면 백범과 약산이 임정에서 헤게모니 다툼을 했을지라도, 항일에는 한 뜻이었고 인간적 유대를 유지했다.

윤세주는 약산과 같은 밀양 사람으로 약산 옆집에 살았다. 의열단 2인자이며, 의용대 2인자였다. 의용대 내 약산의 지휘력이 약해질까 봐 2인자인 윤세주가 일부를 통솔해 화베이로 가는데, 윤세주는 가기 전에 김구를 방문했다. 이때는 의용대가 광복군과 통합하기 전이다.

윤세주는 김구를 만나 ‘어르신 한동안 못 뵈게 됐습니다. 약산의 결정에 따라 화베이 전선으로 갑니다. 언젠가 항일통일전선에서 만나게 될 테니 건강하십시오. 광복군도 같이 싸울 날이 있을 것입니다’라고 인사했고, 김구는 그의 등을 두드리면서 ‘잘 싸우고, 다치지 마라. 광복군도 기회가 닿으면 화베이로 가겠다’고 답했다.

백범이 약산 결혼식 주례 설 정도로 ‘인간적 유대’

윤세주는 김원봉을 대신해 전면에서 김구랑 많이 다퉜다. 그러나 약산이 충칭에서 부인을 잃은 뒤, 다시 결혼할 때 주례를 백범이 설 정도로 인간적 유대는 유지했다.

조선의용대 시절부터 약산을 따라다닌 부하 중 최석순에게 딸 최동선이 있었다. 약산과 스물한 살 차이였다. 당시 의용대는 구이린(계림) 전선에 있었고, 의용대 가족은 충칭에 머물렀다. 구이린이 함락되자, 의용대도 충칭으로 이동했다. 이때 가족들이 환영대회를 열었고, 조선의용대 신문에 환영사가 실리는데, 바로 최동선의 환영 연설이었다. 최동선은 나중에 김원봉의 부인이 된다. 일본이 충칭을 폭격하는 와중에도 최동선은 혼자 사는 약산 집을 찾아가 빨래하고 청소하며 약산을 도왔다. 약산 나이 47세 무렵이다. 약산은 남자 혼자 있는 집에 오는 게 바람직하지 않다며 오지 말라고 했다. 최동선이 ‘좋은 걸 어떡하느냐’고 하자, 야단쳐서 쫓아냈다. 그런데 최동선이 식음을 전폐했다. 충칭의 독립운동가 부인들이 물어보니, ‘김원봉 장군님이 좋아서 그러는데 야단맞았다’고 했다. 최 씨 집안에서도 난리가 났다. 충칭에 젊은 장교도 많은데, 하필 나이 많은 약산이냐며 한숨을 쉬었다. 최동선의 고집이 셌다. 김규식 등 임정 인사들은 다들 웃었다. 애가 식음을 전폐하니, 결국 부모가 승낙했다.

당시 김구가 약산한테 ‘이 사람아 뭘 망설여’라며 결혼식 주례를 섰다. 김구는 주례를 서기 전 며칠 전에도 임정 내 권력다툼을 하며 약산과 싸웠을 것이다. 애국지사 정정화의 ‘장강일기’에 이 얘기가 기록돼있다.

동북 3성을 먼저 차지한 조선의용군

약산은 미군정과 악질 경찰의 만행을 참다못해 월북했지만, 그보다 결정적 이유는 몽양 여운형 암살이었을 것이다. 좌우합작으로 분단을 막기 위해 분주했던 여운형 선생이 암살(1947년) 당하자 생명에 위협을 느꼈을 것이다.

북한 자료가 거의 없는데, 60년 지나면 해제되는 미국의 기밀문서가 2013년에 공개됐다. 평양 주재 소련 대사 알렉산드르 푸자노프 일지였다. 무슨 회의에 누가 참여해 어떤 결정을 내렸다는 간략한 기록이다. 알렉산드로 푸자노프의 1958년 10월 1일 기록에 김원봉이 북한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에서 해임됐고, 같은 해 10월 24일 기록에는 남쪽으로 도망가려다 체포됐다고 나온다.

약산은 북한에서 검열상(=감사원장)을 하다가 노동상을 지냈다.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부위원장을 지냈는데, 1958년에는 상임위원에 불과했다. 푸자노프의 10월 1일 일지는 마지막 상임위원 자격까지 박탈했다는 기록이다.

약산이 상임위원에서 해임되기 전인 1958년 2월, 김일성은 제324군부대를 방문했다. 김일성은 여기서 ‘조선인민군은 항일빨치산에 연원을 두고 그 계통을 이어받았다. 의열단이라든가 의용군, 독립군(=광복군)이 있었는데 그건 다 지주자본가들을 위한 독립투쟁이었다’며 자신의 항일빨치산을 제외한 나머지는 부정했다.

조선의용대에서 화베이로 올라가 팔로군에 결합해 훗날 조선의용군이 된 이들은 충칭에서 떠날 때 130여 명이었다. 이들은 일본 패망 소식을 듣고 조국으로 빨리 가게 해달라고 중국 공산당 지도부를 설득했다. 그러자 중국 공산당은 국민당이 오기 전에 동북 3성을 먼저 차지해달라고 주문했고, 조선의용군은 재빠르게 진격해 차지했다. 이때 조선의용군은 약 2만3000명까지 늘어났다.

조선의용군 초기 130여 명은 모두 중앙군관학교 출신으로, 팔로군과 함께 항일전쟁을 치러 실전 경험이 풍부했고, 동북으로 진군하면서 병력이 2만3000명으로 늘었을 땐 모두 장군에 해당했다.

2만3000명 중 1000여 명이 먼저 내려와 북한인민군 창설에 주도적 역할을 했고, 나머지 2만1000여 명은 중국 국공내전이 정리되지 않아 만주에 주둔했다. 이들은 중국의 항미원조(=1951년 1.4후퇴) 때 조선인민군에 가담했다. 그래서 조선의용군은 한국에서 남침 주역으로, 대접을 못 받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북한 인민군의 기본 골격은 항일무장투쟁을 이끈 의용군이었다. 그런데 1958년 김일성이 다 정리했다. 1958년 2월 군부대를 방문해 ‘의용군은 일본 놈만 보면 도망갔다’고 연설했다. 아마 김일성이 이렇게 얘기해도 될 정도로 이때 북한 인민군 수뇌부 내 의용군이 모두 정리된 상황이었을 것이다. 이 얘기는 김일성 ‘저작집’에 나온다.

이원규 ‘민족혁명가 김원봉’ 저자.
이원규 ‘민족혁명가 김원봉’ 저자.

김원봉은 자살했을 가능성이 높다

조선의용군 출신이자 북한 인민군 출신 소설가 김학철 선생의 진술이 있다. 김학철은 노동신문 기자를 했는데 약산이 조선의용대를 이끌 때 직계 대원이자 의용군 출신이다.

김학철은 북한에서 연안파(=조선의용군)를 숙청할 때 목숨을 건져 옌볜에서 생활했다. 다리 한 쪽이 없었던 터라 중국에서 사는 정도는 북한이 용인해줬던 것 같다. 새얼문화재단 초청으로 인천에도 왔는데, 그를 옌볜에서 여러 차례 만났다. 김학철은 죽기 전 구술할 때 김원봉이 자살했다고 몇 번이나 얘기했다.

김원봉의 막내 동생 김학봉 여사도 오빠가 자살했다고 누차 얘기했다. 누가 얘기했냐고 물으면, ‘믿을 만한 사람’이라고만 하고 누구라고는 얘기 안 해줬다. 그래서 이번 평전에 10월 24일(소련 대사 기록) 이후인 11월 초에 자살했을 것이라고 썼다. <동아일보>에는 북이 숙청했다고 나온다. 그러나 그 기록은 자세하지 않다. 나중에 또 다른 자료가 공개돼 처형이라고 나오면 그때 고치겠다.

밀정 김규흥은 아직도 현충원에

약산과 인천의 인연은 그리 많지 않다. 약산이 북한 검열상을 5년 하고 검열부가 검열위원회로 바뀐 후 인천 영흥도 출신 리승엽이 검열위원장을 맡았다. 리승엽은 1956년 처형됐다. 남로당 출신인데, 해제된 미국 기밀문서에 미국 간첩으로 나온다. 약산은 공산당에 입당한 적이 없으니, 리승엽과 직접적 관계는 없다.

인천과 인연은 의열단이다. 친일파 김활란의 형부 김달하의 얘기다. 김달하는 밀정이었고, 대외적으로는 단기서라고 하는 위안스카이(=원세개)의 베이징 북양군벌 정부에 몸담고 있었다.

도산 안창호 선생이 해방 후 민주당 창당 주역 중 한 명인 심산 김창숙한테 ‘김달하를 조심해야한다’고 하자, 심산은 되레 ‘무슨 소리냐. 사람 좋던데’라며 믿지 않았다. ‘나라 장래에 걱정이 많은 사람’이라고 했을 정도였다. 그러나 심산 회고록을 보면, 베이징에서 심산을 만난 김달하가 ‘심산 선생은 호구지책이 뭐냐’고 물었다. 심산은 ‘독립운동가가 참고 견디는 게 일이지’라고 답했는데, 김달하가 ‘조선총독부와 의논해 자리를 마련해놓았으니 경성으로 가보시오’라고 했다. 그 뒤 김달하는 의열단에 의해 처형됐다.

약산 평전을 처음 쓸 때는 심산 회고록을 토대로 김달하가 밀정이라는 것을 추정했다. 심산이 베이징에 머물던 농업학자이자 의열단 고문인 유자명 선생에게 김달하 관련 얘기를 전했고, 유자명은 당시 상해에 머물던 약산에게 보고한 뒤 처형했을 것으로 추정했다.

그러다 올해 <KBS>가 방영한 다큐멘터리 ‘밀정’에 김달하의 기록이 등장했다. ‘어떤 밀정’의 보고서에 ‘김달하와 저의 작업이 잘되고 있다. 저에게는 2만 엔을 김달하에게는 3만 엔을 달라’고 했다. 여기서 어떤 밀정은 김규흥으로, 아직도 현충원에 있다.

<KBS> 다큐멘터리로 김달하가 밀정이라는 게 확실하게 드러났다. 김달하는 처제 김활란을 아껴서 우월(又月)이라는 호를 지어줄 정도였다. 김달하ㆍ김애란 부부가 김활란을 앞에 두고 찍은 사진이 있는데, 책에서는 김활란과 김애란을 뺐다.

의열단이 베이징에서 김달하를 처형할 때 필요한 자금을 마련한 이들이 인천 장봉도 출신 이을규ㆍ이정규 형제다. 둘 다 인천상업학교(현재 인천고교) 출신으로, 조선인 미망인 집을 털어 자금을 마련했다.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인천에 온 날

약산이 해방 후 처음 인천을 찾았을 때 비가 내렸고, 삐라가 뿌려졌다. 삐라는 죽산 조봉암이 전향했다는 소식이었다. 죽산은 해방 후 인천CIC(미군 군사정보부대, 현재 인천여상 자리)에 끌려갔다. 해방 정국은 혼란과 정치적 경쟁이 지속됐다.

약산이 인천을 처음 방문한 1947년 6월 22일, 홍예문 아래 인천공회당에서는 임정에서 탄핵 당한 이승만이 이끌던 독립촉성협의회가 민중대회를 열었고, 공설운동장(현재 도원 축구장)에서는 민전(민주주의민족전선)이 한반도 단일 정부 구성을 위해 미소공동위원회 개최를 촉구하는 대회가 열렸다.

이날 약산과 이강국이 인천을 방문했고, 시민들은 김원봉을 보려고 몰려갔다. 미군정은 약산이 등장하는 게 달가울 리 없었다. 약산이 연설을 막 시작할 때 삐라 뭉치가 공설운동장에 뿌려졌다. 죽산이 전향했다는 소식이었다. 약산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인천에 온 날, 우익진영에서 이를 훼방 놓기 위한 삐라를 뿌렸다.

국민의 축복 속에 훈장 받는 날 올 것

약산은 1947년 7월 몽양 여운형 선생이 암살당하자 신변에 위협을 느꼈을 것이다. 약산은 공산당에 들어간 적이 없다. 장제스가 이끌던 중국 국민당 정부가 용인하는 수준의 사회주의자이고 민족주의자였는데, 몽양이 암살당하자 다음은 자기 차례라고 느꼈을 것이다. 결국 월북으로 이어진다.

약산은 남과 북에서 모두 버림받은 항일혁명투사다. 2005년 첫 평전이 나왔을 때만해도 독자들에게 약산은 이렇게 대립적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2005년에는 보수진영도 약산을 안타까워했는데, 오히려 지금 더 조심스럽다.

내 나이 72세. 어쩌면 마지막 평전이다. 남북이 통일된 다음에 ‘가감 없이 잘 썼다’는 말을 듣고 싶은 마음으로, 동호직필 사관의 자세로 썼다. 약산이 훈장을 못받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이런 대립과 갈등 속에서 받으면 뭐하나. 나중에 국민들에게 감사와 축복을 받는 날이 올 것이다. 그때 받으면 된다.

약산에 대해 많은 사람이 제대로 알지 못한다. 독립운동사가 분단돼있으니 더욱 그렇다. 약산이 소외돼있으니, 썼다. 처음엔 연민 때문에 썼다. 이념 속에 쓴 책이 아니다. 지금 이념 갈등이 심한데, 오히려 이럴 때일수록 약산의 진면목과 진실을 알리고 싶었다. 그래서 전면 개작했다. 약산만의 얘기를 다루지 않았다. 등장인물이 약 200명이다. 무명용사가 더 많다. 독립운동사에 그들을 뺄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