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피플] 50년 이발사 인생, 버팀목은 가족사랑
[인천피플] 50년 이발사 인생, 버팀목은 가족사랑
  • 류병희 기자
  • 승인 2019.11.14 14:0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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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경식 현대이발관(강화군 강화읍) 이발사
강화산성 옆 이발소, 80년대 모습 그대로
이발은 신뢰관계서 이뤄지는 성스러운 일

[인천투데이 류병희 기자] ‘목욕을 하면 일주일이 즐겁고 이발을 하면 한 달이 즐겁다’는 말이 있다. 한국전쟁 후 산업화시기에 빈곤한 삶 속에서 누린 ‘소확행(小確幸, 작지만 확실한 행복)’을 일컫는 말이다.

30여 년 전만 해도 남성은 이발관에서 머리를 다듬었다. 주말은 물론 평일에도 이발ㆍ염색ㆍ 면도 등을 하기 위해 의자에 줄지어 앉아있는 풍경을 볼 수 있었다. 어린 아이들은 키가 작아 팔걸이에 나무판을 올려 앉게 했다.

“상고머리로 해주세요.” “스포츠머리로 깎아주세요.” “내일 예식이 있습니다.” 등, 주문을 한다. 그러면 ‘사각사각’ 숙련된 가위질 소리가 귓가로 전해진다. 옛날 이발소에선 전동 이발도구를 사용하지 않고 가위로만 머리카락을 잘랐다. 세월이 흘러 세대ㆍ유행 등이 변하면서 이발소를 찾는 사람이 줄어들었다. 한 때 직원을 둘 정도로 성업했던 동네 이발소는 하나둘씩 사라졌다.

강화군 강화읍에 가면 30년 전 옛 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이발소가 있다. 강화산성을 지나 강화문화원 건너편에 있는 현대이발관은 이발 경력 50년 이상을 자랑하는 이경식 선셍이 운영한다.

이곳에 들어가면 가본 사람만 아는 이발소 특유의 냄새가 풍긴다. 옛 기억이 되살아난다. 또, 오래된 이발도구들과 의자를 보면 세월의 변화도 느낄 수 있다.

현대이발관 이경식 이발사는 50여 년 경력의 숙련된 기술을 가졌다.
강화군 강화읍에 있는 현대이발관 주인 이경식 이발사는 50여 년 경력의 숙련된 기술을 가졌다.

한 손님 당 가위질 2000번

희끗한 머리에 반듯한 인상의 이경식 선생은 강화도에서 나고 자랐다. 조상 대대로 강화도에서 지낸 토박이다. 1953년 7남매의 넷째로 태어났는데, 중학생 나이부터 이발기술을 배웠다.

“날짜도 기억한다. 1965년에 6학년이었는데, 방학 때였다. 그해 12월 25일 크리스마스라서 교회에 갔다가 돌아오는데 아버지께서 어디를 가자고 하셔서 따라갔더니 이발소였다. 당시 강화도에는 직물공장이 많이 있었는데, 아버지께서는 내가 직물보다 이발 기술을 배우길 원하셨다. 그 때부터 시작했으니 벌써 50년 넘게 지났다. 천직이라고 생각한다.”

의자 바닥 주위에는 오랜 세월의 흔적을 알 수 있는 발길 자국이 선명하게 남아 있다.
이발의자 주위 바닥에는 오랜 세월의 흔적을 알 수 있는 발길 자국이 선명하게 남아 있다.

이 선생은 오직 전통 방식인 가위와 빗을 가지고 이발한다. 머리를 다듬는 데 10여 분, 면도하고 머리를 감고 정리하면 20분가량 걸린다.

“한 명당 가위질을 2000번 정도 하는 것 같다. 그런데 여태 손가락이 아픈 적은 없다. 다만 계속 서있는 직업이라 다리가 아픈 적은 있는데, 아직은 거뜬하다. 손님과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보면 하루가 그냥 지나간다. 요즘엔 하루에 손님 10명 정도 받는다.”

이발소에 있는 물건 대부분은 오래됐다. 가위와 빗은 물론, 이발의자ㆍ면도기ㆍ비누거품기ㆍ헤어드라이 등에서 오랜 세월이 묻어난다.

가장 눈에 띄는 것은 두 대가 나란히 놓인 이발의자다. 30여 년 전 개업하면서 들여놓았는데, 바닥에는 의자 주위로 둥그렇게 이 선생의 발길 자국이 선명하다. 정성스럽고 수고스런 발길이다.

이경식 선생은
이경식 선생은 "가위질은 손가락 중 엄지만 움직여야 한다"며 기술을 보여줬다.

이발은 신뢰가 기본인 성스러운 일

먼저 온 사람이 머리를 다듬는 사이 노인 한 명이 더 들어왔다. 이 선생과 익숙한 분위기로 말을 주고받는다. 노인은 이발소 한 쪽에 있는 무 자루를 보며 이야기를 건넨다.

“어디서 샀어?” “오늘 장날이어서 사왔다.” “아, 그 박아무개 있잖아. 얼굴이 반쪽이 돼서 돌아왔어. 밥을 먹을 수가 없다나. 뺀뺀하더니만.” “나이가 있어서 이제 얼먹는다. 벌써 80인디.”

이제 노인 차례다. 이발의자에 앉았다. 이 선생은 노인과 대화를 간간히 이어가며 헤어드라이로 머리모양을 잡는다. 노인의 머리가 번쩍거리며 빛을 낸다. 이발소 벽에 붙은 텔레비전에서는 <SBS> 예능프로그램 ‘불타는 청춘’이 방영되고 있다. 머지않아 노인은 떠났다.

“강화에는 예전에 이발소가 120여 곳이 있었다. 지금은 40여 곳 있다. 손님이 줄고, 다양한 형태의 미용업이 발달했다. 나는 정통으로 이발기술을 배웠는데, 엄지손가락만 움직여 가위질을 한다. 1965년에 배우기 시작해서 1973년에 면허 취득하고 1988년 이곳에 내 가게를 냈다.”

강화 현대이발관은 80년대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강화도 현대이발관은 1980년대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손님이 또 들어왔다. 의자에 앉자, 보자기로 몸을 두르고 머리에 분무질로 물을 뿌렸다. 두상을 살피더니 가위질을 시작했다. 능숙한 가위질에 머리가 정리됐다. 떨어진 머리카락이 이리저리 흩어져있다. 아쉬움과 시원함이 공존하는 순간이다.

“이발소는 이발과 면도, 염색, 드라이 요금이 정해져있다. 요즘에는 따로 하는 사람이 거의 없는데, 예전에는 이발은 안 하고 면도만 하거나 드라이만 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리고 이ㆍ미용실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지금도 급여를 일당으로 받는 문화가 있다.”

급여를 일당으로? 좀 더 자세한 설명을 들어보니, 하루 매출이 나오면 정산을 하는데 재료비 등을 제외하고 절반은 주인이 가져가고 나머지는 일하는 사람들이 나눠서 가져가는 방식이다. 하루벌이가 ‘들쭉날쭉’이다.

이발이 끝나면 턱수염을 깎는다. 손님을 뒤로 젖힌 뒤 비누로 거품을 내고 턱 주위에 바른다. 이어 날카로운 면도날로 수염을 제거한다. 면도날이 턱 선을 따라 목과 입 주변을 오간다. 믿음이 없다면 몸을 다른 사람에게 맡기는 게 어렵다.

“예전에는 이발이 다 끝나지도 않았는데 거울로 보고 있다가 ‘여기 머리는 왜 들어가고 길이가 맞지 않냐’, 머리 감을 때는 ‘가려운 곳도 좀 잘 긁어라’ 하며 면박을 주는 이른바 진상손님도 있었다. 지금은 그런 손님 없지만.”

말없이 묵묵히 진행하는 이발 작업을 보면 성스러운 마음마저 생긴다. 이발을 하는 내내 서있어야 하기 때문에 다리가 아플 텐데, 이 선생의 두 다리는 굳게 버티고 있었다. 그 모습이 ‘강직한’ 성품을 말해주는 듯했다.

2002년 부산아시안게임 성화봉송 사진
2002년 부산아시안게임 성화봉송 사진.

밥벌이 지겨움, 등산과 마라톤으로 극복

이 선생의 오랜 경륜을 손님이 익히 알고 있는 듯했다. 손님은 의자에 앉은 순간부터 모든 것을 이 선생에 맡기고 편안함을 맛보는 것 같았다. 손님이 이발을 마치고 세면대에서 머리를 감는 사이 또 다른 손님이 들어왔다.

“8년간 일을 배우고 면허증을 취득했다. 일이 너무 지겨워 한동안 친구들과 놀러 다닌 적도 있다. 개업 초창기에 한창 일할 때는 새벽 5시에 나와 저녁 9시에 일을 마쳤다. 한 달에 세 번 10일 단위로 쉰다. 얼마나 지겹겠나. 막노동을 한 적도 있었는데, 나에게는 기술이 있지 않나. ‘배운 게 도둑질’이라고 결국 다시 돌아왔다.”

이 선생은 50여 년간 한 가지 일만 했다. 비교적 고된 일이지만 삶의 전부나 마찬가지가 됐다. 몸에 이상은 없었을까.

“어느 날 보니까 다리가 가늘어져있더라. 그래서 아침 일찍 일어나 뒷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왕복으로 1시간 되는 산길을 걷기도 하고 뛰기도 했다. 그러다 산악회 활동도 했다. 마니산을 1000번 이상 올라갔고, 마라톤에도 흥미가 있어 했다.”

이 선생은 일상 스트레스에서 잠시나마 벗어나는 방법으로 등산을 하고 마라톤을 했다. 마니산을 일주일에 세 번씩 20년을 올랐다. 마라톤도 10년 이상 하다가 3년 전에 그만뒀다. 요즘은 자전거를 타고 강화나들길을 걷기도 한다.

“마라톤으로 강화도 창후리에서 강릉 경포대까지를 58시간 40분 만에 완주했다. 제한시간이 64시간인데, 2시간 자고 달렸다. 그때 성취감이란 이루 말할 수 없다. 그걸 했더니 모든 일에 자신감이 생겼다. 사람은 한계가 없고 못할 일은 없다고 생각한다. 인생은 마라톤이다.”

강화 현대이발관 이경식 이발사
환하게 웃어준 이경식 이발사.

“강화는 내 고향 ··· 가족이 항상 고마워”

“강화도는 내 고향이다. 어디 다른 데 가볼 생각은 안 해봤다. 강화도에서 사는 게 좋다. 그리고 기술이 있기에 나이 들어서도 계속 일할 수 있다. 아버지 말씀대로 기술 배운 게 잘 한 것 같다.”

이 선생은 슬하에 남매를 뒀다. 첫째는 딸이고 둘째는 아들이다. 그는 가족 얘기를 하면서 미안함과 고마움을 전했다.

“아내가 고생 많이 했다. 딸아이는 발달장애가 있다. 어느 시설에 기거하는데, 생활해야하니 가끔 찾아간다. 딸 생각하면 울적하다. 그리고 딸아이 때문에 아들이 많이 섭섭해 할 수도 있다.”

가족이어서 고맙고 미안할 때가 있다. 이야기를 듣는데 이 선생의 가족사랑이 진하게 다가왔다. 가족 생계를 위해 묵묵히 일했고, 자신과 싸움에서도 두 다리만큼 꿋꿋하게 버텨왔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래서 더 운동을 열심히 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가족이 없었으면 이 일을 지금까지 할 수 없었을 것 같다. 가족에게 항상 고맙다.”

70세에 가까운 이 선생의 눈이 촉촉하게 빛났다. 때마침 이발소 텔레비전에서 가수 문정선의 ‘나의 노래’가 흘러나왔다.

‘(…) / 이 세상에 태어나 당신을 사랑하고 / 후회 없이 돌아가는 이 몸은 낙엽이라 / 아아 떠나는 이 몸보다 슬프지 않으리 / 뚜루루 뚜루루루 슬프지 않으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