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도의 자부심과 목포 근대거리
진도의 자부심과 목포 근대거리
  • 이보렴 기자
  • 승인 2019.11.12 1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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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얼역사기행 ② 진도 두 번째 이야기와 목포

[인천투데이 이보렴 기자] 기회가 닿아 새얼문화재단(이사장 지용택)이 주최한 제34회 새얼역사기행에 참여했다. 10월 31일부터 11월 2일까지 신안과 진도, 목포를 돌아보는 과정이다. 신안과 진도는 단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는 곳이었고, 목포는 이런 역사기행으로는 처음이었다.

삼별초를 기리는 고려항몽충혼탑. 이 앞에 모여 단체사진을 찍었다. (사진제공 새얼문화재단)
삼별초를 기리는 고려항몽충혼탑. 이 앞에 모여 단체사진을 찍었다.(사진제공ㆍ새얼문화재단)

삼별초 항쟁 근거지, 용장산성

진도는 그림과 글씨의 고장이면서도 용맹한 역사를 지니고 있다. 고려시대 몽골항쟁을 주도한 삼별초가 진도에 근거지를 뒀으며, 이순신 장군의 명량해전도 진도 앞바다 명량해협에서 이뤄졌다. 특히 이순신 장군을 기리기 위해 진도 사람들이 세운 진첩비가 유명하다.

삼별초는 야별초의 좌ㆍ우 별초와 신의군으로 이뤄진 별초군을 총칭한다. 별초(別抄)는 임시 군대조직으로, 대몽항쟁기에 큰 활약을 했다. 최우 집권 초기에 횡행한 도적을 잡기 위해 용사를 선발, 경찰부대를 조직했는데 이를 야별초라 한다. 그 뒤 인원이 늘자 좌별초와 우별초로 나눴다. 이후 최항이 신의군이라는 별초부대를 창설했다. 신의군은 몽고군에 잡혔다가 탈출해온 군사와 장정들로 구성됐다. 이들을 합쳐 삼별초로 구성한 것이다.

몽고군이 고려에 침입하자 최 씨 정권은 1232년에 강화도로 천도한다. 삼별초는 강화도를 수비하고 본토로 파견돼 몽고군과 싸워 전과를 올렸다. 게다가 신의군 중에 전쟁 중 몽고군의 포로가 됐다가 돌아온 사람들은 몽고군에 반감이 매우 컸다.

1259년 고려의 태자 전이 부왕을 대신해 몽고에 입조(入朝)하면서 30년 동안 이어진 몽고와 전쟁은 일단락된다. 그러나 강화도에 남아 환도를 거부하던 무인정권이 1270년 임유무가 살해당하면서 종식되자, 무인정권을 따라 몽고군과 싸우던 삼별초는 고려 정권과 대척점에 설 수 밖에 없었다. 게다가 삼별초 명부를 압수당한 상황에서 이 명부가 몽고군에 넘어간다면 보복을 각오해야했다. 결국 삼별초는 환도를 거부하고 1270년 6월 승화후(承化候) 온(溫)을 고려의 새로운 왕으로 추대한다. 새로운 고려 정권을 선언한 것이다.

그 이후 두 달 동안 삼별초는 강화도와 영흥도를 지나 진도에 닿는다. 이때 삼별초가 재물과 자녀를 싣고 떠난 배가 무려 1000여 척이나 됐다고 한다. 삼별초는 진도에서 용장산성을 개축하고 용장사를 궁궐로 삼는다. 용장이라는 지명도 여기서 유래했다고 한다. 용장(龍藏)은 ‘용을 숨긴다’는 뜻인데, 용은 왕을 상징한다. 용장산성은 삼별초가 고려의 왕을 숨긴 곳이라는 이야기다.

1271년 5월 홍다구(洪茶丘)가 몽고군 새 지휘관으로 임명된다. 바다에서는 삼별초를 이길 수 없었던 여몽연합군은 진도를 기습했고, 결국 삼별초는 무너지고 남은 무리는 제주도로 이동한다. 이때 배중손과 승화후 온도 희생된다. 지금도 진도에는 전라남도 기념물 제126호로 지정된 왕온의 묘가 있으며, 배중손 장군 사당도 있다. 또, 진도 지명 중에는 왕무덤재라는 곳이 있는데, 이 고개를 넘다가 왕온이 죽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충무공 벽파진 진첩비 (사진제공 새얼문화재단)
삼별초를 기리는 고려항몽충혼탑. 이 앞에 모여 단체사진을 찍었다.(사진제공ㆍ새얼문화재단)

진도의 자부심, 충무공 벽파진 진첩비

진도를 여행하는 동안 진도 출신 사람들이 문화해설사로 함께 다녔다. 용장산성을 갔을 때 삼별초의 항쟁을 설명해주는 문화해설사들은 하나같이 목숨을 걸고 대몽항쟁을 벌였던 역사에 자부심을 갖고 있었다. 용장산성에서 바다 쪽으로 조금만 이동하면 진도 사람들의 또 다른 자부심인 충무공 벽파진 진첩비를 볼 수 있다.

충무공 벽파진 진첩비는 귀부와 비문으로 이뤄져있다. 귀부는 거북이 모양을 한 돌비석 받침대다. 이 귀부에도 진도 사람들의 이야기가 스며있다. 진첩비를 받치고 있는 귀부는 다른 곳에서 가져온 게 아니라, 그 자리에 있는 바위를 깨서 만든 거라 한다. 귀부를 만들고 돌비석을 옮기는 것도 모두 진도 주민들이 십시일반으로 노력한 것이라 한다. 충무공 벽파진 진첩비는 명량해전이 벌어진 명량해협을 굽어보고 있다. 진첩비 내용은 이은상이 지었다. 글씨는 소전 선생이 썼는데, 같은 글자여도 같은 모양인 글씨는 없다고 한다.

진첩비에서 바위를 따라 내려오면 벽파정이 있다. 벽파정 앞은 벽파진으로, 배가 자주 들고 나는 곳이었다. 유배 온 사람들이 육지가 그리워 벽파정에서 바다를 바라보다가도 배가 들어오면 모른 척 도망갔다고 한다. 사약을 갖고 왔을까, 염려했기 때문이란다. 벽파정에는 당시 유배 온 사람들의 심경이 담긴 시문들이 걸려있다.

고통에 굴하지 않는 의지는 어디서 나오는 걸까

역사기행 세 번째 날 아침이 밝았다. 마지막 날이라고 생각하니 아쉬움이 앞선다. 진도를 떠나 목포를 둘러보는 일정이다. 목포는 전라남도 서남단에 있으며, 북쪽에는 무안, 서쪽으로는 신안과 접해 있는 항구도시다. 목포항은 1987년 10월 1일 개항했는데, 1932년에는 인구 6만 명으로 당시 전국 6대 도시 중 하나였다.

김대중 노벨평화상기념관 (사진제공 새얼문화재단)
김대중 노벨평화상 기념관.(사진제공ㆍ새얼문화재단)

목포에는 김대중 노벨평화상 기념관이 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대한민국 15대 대통령이자 대한민국 최초로 노벨평화상을 받은 인물이다. 기념관이 목포에 있는 이유는, 그가 유년시절부터 정계에 입문하기까지 활동한 지역이 목포이기 때문이다. 김대중 노벨평화상 기념관은 6ㆍ15 남북공동선언 기념일인 2013년 6월 15일 개관했다.

기념관은 전시동과 컨벤션동으로 구성돼있다. 전시동에는 전시관 4개가 있으며, 컨벤션동에는 기획전시실이 있다. 전시관 4개 중 제1전시실은 ‘한국인 최초의 노벨평화상 수상’이라는 주제로 2000년 노벨평화상 수상 당시 국내외 반응을 보여주고 있다. 제2전시실은 ‘김대중과 노벨상’이라는 주제로 김대중 전 대통령이 노벨평화상을 받은 이유와 민주화 업적을 소개한다. 제3전시실은 ‘동아시아 민주화를 위해 걸어온 길’이라는 주제로 김대중 전 대통령의 인생을 소개하며, 제4전시실은 ‘대통령, 김대중’이라는 주제로 그의 정치적 유산과 대한민국 민주주의 기틀을 마련한 과정을 소개한다.

이 기념관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점은 김대중 전 대통령의 일생이다. 특히 정계에 입문한 이후에 겪은 고초가 오래 기억에 남았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일본에서 당한 교통사고 후유증 치료를 위해 1972년 일본 도쿄에 체류하다가 10월 유신 소식을 듣고 해외로 망명한다. 그러나 1973년 8월 8일 김대중 납치사건이 발생했고, 그는 가택연금에 처한다. 또, 1976년 3ㆍ1 민주구국선언 사건으로 구속돼 대법원에서 징역 5년을 선고받는다.

1979년 10ㆍ26 사건으로 박정희 대통령이 사망하고 12월 9일 최규하 대통령이 긴급조치 9호를 해제하면서 김대중 전 대통령 가택연금은 해제된다. 그러나 곧 전두환이 정권을 잡으면서 내란음모 혐의로 긴급 체포돼 옥중생활을 이어간다. 이때 사형이 선고됐다. 미국 지미 카터-로널드 레이건 행정부는 사형 집행을 저지하기 위해 전두환 정권을 압박했고, 요한 바오로 1세 역시 선처를 호소했다. 세계 인사들의 압박으로 무기징역으로 감형됐다.

이밖에도 김대중 전 대통령은 대선에서 네 번이나 낙선했으며, 그를 둘러싼 정치 음모와 조작사건이 판을 치는 와중에도 행보를 굽히지 않았다. 수없는 고통에도 뜻을 굽히지 않는 원동력은 대체 어디서 나온 것일까.

목포근대역사관 1관 (사진제공 새얼문화재단)
목포 근대역사관 1관.(사진제공ㆍ새얼문화재단)
목포근대역사관 2관 (사진제공 새얼문화재단)
목포 근대역사관 2관. (사진제공ㆍ새얼문화재단)

목포 근대거리가 부러운 점

김대중 노벨평화상 기념관을 다녀온 후 점심을 먹고 목포 근대역사관을 자유롭게 둘러봤다. 목포 근대역사관은 1관과 2관으로 나뉘어있다. 1관은 옛 목포 일본영사관 건물이다. 2관은 목포 동양척식주식회사 목포지점 건물이다. 2014년 이전에는 동양척식주식회사 목포지점 건물이 본관이었지만, 현재는 목포 일본영사관 건물이 1관이자 본관으로 쓰이고 있다. 이 두 건물은 서로 가까이 자리하고 있으며, 과거 일본인 거류지에 있었다.

목포 일본영사관 건물은 신고전주의 양식을 따르고 있으며, 건립 당시 외관을 잘 간직하고 있어서 대한민국 사적 제289호로 지정돼있다. 동양척식주식회사 목포지점 건물은 르네상스 양식이며, 1920년대에 지어진 건축 양식으로는 목포에서 유일하다. 전라남도 기념물 제174호이기도 하다. 특히 동양척식주식회사 목포지점 건물은 남한에서 부산과 더불어 단 두 곳뿐인 동양척식주식회사였으며, 규모 면에서는 부산보다 앞서 있다.

목포 근대역사관은 주로 근대 시기 사진자료를 전시하고 있다. 1관에서는 목포진부터 시작해 개항장의 대중문화, 저항운동을 사진 자료로 전시하고 있다. 특히 호남 최초 성당인 목포 산정동 성당에서 사용한 라틴어 미사 경본이 전시돼있다. 또, 목포 조선면화공장에서 사용한 조면기도 전시돼있다. 이 조면기는 일본 오사카 아시아철공소에서 제작됐다.

근대 건축물을 근대역사관으로 활용하는 방안은 고전적이다. 인천에도 유사한 사례가 있다. 인천 중구에 있는 옛 일본제1은행 인천지점 건물은 현재 개항박물관으로 활용되고 있으며, 옛 일본제18은행 인천지점 건물은 인천 개항장 건축전시관으로 이용 중이다. 또, 일본 우선주식회사 인천지점 건물은 인천 아트플랫폼 자료실로 사용되고 있다.

목포 근대역사관이 부러운 점은 따로 있다. 주변 거리 풍경이다. 우선 높은 건물이 별로 없다. 일본 적산 가옥을 활용한 카페도 있으며, 그 주변 옛 건물들에는 독립서점과 독립영화관이 들어서 있다. 이에 반해 인천 동구는 ‘신일철공소’를 철거하는 등, 남겨진 근현대 산업유산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고 있다. 안타까운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