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먼 인 할리우드(This Changes Everything)│톰 도나휴 감독│2019년 개봉

[인천투데이 이영주 시민기자] 톰 도나휴 감독의 다큐멘터리 ‘우먼인 할리우드’는 한국판 제목 그대로할리우드 영화 미디어 산업의 여성들 이야기다. 그리고 원제가 말해주듯 할리우드는 여성들이 모든 것을 바꾸고 있다. 출연진만 보자면 블록버스터 급이다. 메릴 스트립, 나탈리 포트만, 지나 데이비스, 케이트 블란쳇, 리즈 위더스픈, 클레이 모레츠, 샤론 스톤, 산드라 오, 질리언 앤더슨 등 총 96명의 인터뷰가 담겨 있다.

‘우먼 인 할리우드’는 한국 관객들에게도 익숙한 배우, 감독, 제작자의 인터뷰로 할리우드영화 제작시스템 내 공공연한 불평등을 폭로한다. 합리적인 시스템을 갖춘 것으로 알려진 할리우드에서 설마 불평등이 있겠어? 저렇게 화려하고 당당한 여배우들이 설마 억울한 일을 당했겠어? 우리의 ‘설마’는 그녀들의 증언으로 어김없이 무너진다.

“디렉팅을 줄 테니 무릎에 앉으라는 감독도 있어요. 톰 행크스도 감독 무릎에 앉나요?”(샤론 스톤) “세상 사람들이 내 생각보다 내 몸을 더 중요시한다는 걸 알게 됐다고 상상해보세요. 어릴 때부터 객체가 되는 느낌을 받았어요.”(나탈리 포트만)

‘우먼 인 할리우드’에 출연한 이들의 90% 이상은 할리우드 영화와 미디어 산업에서 지금도 활발히 활동하고 있다. 최고의 인기를 구가하는 여배우, 흥행성과 작품성을 인정받은 감독, 어마어마한 규모의 블록버스터를 제작하는 대형 스튜디오의 고위직 임원…. 도무지 차별이라고는 근처에도 안 가봤을 것 같은 그녀들이 경험한 성차별, 고용 불평등, 성희롱, 유리천장은 놀라울 정도다. 2017년 할리우드에서 시작한 ‘미투(me too)’운동과 ‘타임즈 업(Time’s Up)은 어느 날 갑자기, 희대의 악마 하비 와인스타인의 성추문이라는 특수한 사건 때문에 일어난 것이 아님을 ‘우먼 인 할리우드’는 보여준다. 아주 오래 전부터 할리우드 시스템 안에서 여성은 배제되거나 남성의 성적 대상으로 취급되거나 아주 부차적인 존재로 여겨졌고, 그에 맞서 싸워온 여성 영화인들의 투쟁이 있었기에 지금의 변화가 가능했다.

‘우먼 인 할리우드’의 큰 미덕은 비단 불평등의 폭로에 그치지 않는다는 점이다. ‘델마와 루이스(1991)’로 세계적인 사랑을 받았던 지나 데이비스는 주체적인 여성 캐릭터가 살아 있는 ‘델마와 루이스’ 이후에도 여전히 할리우드에서 여성들이 배제되고 소외되는 현실이 바뀌지 않는 것에 의문을 품고 ‘지나 데이비스 미디어 젠더 연구소’를 설립한다. 미디어 젠더 연구소의 구체적인 조사와 통계는 여배우들의 생생한 인터뷰에 객관적인 데이터와 이미지를 더해 영화의 메시지에 더욱 힘을 싣는다.

또한 여성 감독들과 배우들, 제작자들은 더 나은 사회를 위해 미디어 산업 전반을 성평등하게 바꾸기 위한 대안을 제시한다. 실제 폭스사는 이런 제안을 받아들여 실질적인 효과를 내기도 했다. 리즈 위더스푼을 비롯한 여배우들은 직접 제작사를 차려 여성의 이야기를 만들었고, 여성 감독들은 할리우드의 ‘편파적’ 고용 관행에 법적으로 문제제기해 성과를 이뤄냈다. 폭스사는 방송국 내 90%에 가까웠던 백인 남자 비율을 50%로 바꾸는 ‘고용 다양성’을 실행했다.

블록버스터의 대명사 격인 히어로물에서 천편일률적인 남성 영웅이 아니라 원더우먼과 캡틴 마블이 활약하는 것은, 마초적인 액션물이었던 매드맥스에 퓨리오 사라는 새로운 여전사가 등장한 것은, 남성 영웅의 대표 서사라 할 수 있는 터미네이터 시리즈의 최신 버전이 여성들의 이야기로 꾸며진 것은, 바로 이런 노력의 결과물일 것이다.

이것이 단지 할리우드만의 이야기에 그치지는 않을 것이다. 아직 할리우드만큼 큰 변화를 보여주지는 못하고 있지만, 2019년 한 해 주목할 만한 한국 장편 영화들은 젊은 여성 감독들의 영화였다. 이제 한국에서도 ‘우먼 인 충무로’를 만들 때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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