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얼문화재단 역사기행 ① 신안과 진도 첫 번째 이야기

[인천투데이 이보렴 기자] 기회가 닿아 새얼문화재단에서 주최하는 제34회 새얼역사기행에 참여하게 됐다. 10월 31일부터 11월 2일까지 신안과 진도, 목포를 돌아보는 과정이다. 신안과 진도는 단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는 곳이었고, 목포는 이런 역사기행으로는 처음이었다.

암태도 소작쟁의를 기리며

10월 31일 오전 6시 40분까지 인하대병원 옆 주차장에 모여 신안으로 떠났다. 버스로만 약 5시간 정도 이동했다. 도착하자마자 점심을 먹었는데, 점심상과 함께 노란 술이 한 병 나왔다. 무슨 술인가 했더니 인동초평화주라는데, 선명한 호박빛깔이 매력이다.

나중에 알고보니 신안군은 노벨평화상을 받은 김대중 전 대통령의 고향이고, 겨울을 이기고 핀다는 인동초는 김대중 대통령의 별칭이었다. 이름도 일품이지만 맛도 일품이었다.

신안에 도착하자마자 천사대교를 지나 암태도로 향했다. 암태도는 돌이 많고 바위가 병풍처럼 섬을 둘러싸고 있어 붙은 이름이라 한다. 굳이 암태도를 가는 이유가 무엇일까 싶었는데, 일제강점기에 이곳에서 소작쟁의가 일어났다고 한다. 암태도에는 이 항쟁을 기리는 암태도 소작인항쟁기념탑이 있다. 이 기념탑에는 소작쟁의에 참여한 농민 40여 명의 이름이 쓰여 있다.

암태도 소작인항쟁기념탑 앞에 사람들이 모여 있다 (사진제공 새얼문화재단)

암태도 소작쟁의는 소작인에게 과도한 소작료를 징수한 데서 시작했다. 이 날은 새얼역사기행에 참여한 하늘고등학교 이영종 선생님이 배경을 간단히 설명했다. “원래 조선에서는 병작반수(竝作半收)라 해서 아무리 농사가 잘 돼도 소작료를 절반 이상 징수하지 않았다”며 “일제강점기 토지조사사업으로 토지 소유권이 지주 한사람에게 집중되면서 소작인들의 상황은 더 열악하게 됐다”고 설명했다.

암태도에서는 지주 문재철이 60~80%까지 소작료를 징수하면서 당시 청년이었던 서태석, 서창석 등이 1934년 말 암태소작인회를 조직했다. 이후 논 40%, 밭 30%로 하며 소작료를 내는 농작물 운반은 4km 이내로 결의했으나 문재철이 이를 받아들이지 않아 충돌이 발생했다. 결국 13명이 재판에 회부됐고 그 중 4명이 실형을 선고받았다. 그러나 이 항쟁은 전국적인 반향을 일으켰고 소작률은 40%로 내리게 된다.

지용택 새얼문화재단 이사장은 “암태도 소작쟁의는 서태석이 사회주의자였다는 이유로 오랫동안 역사에서 외면받았다”며 “지금이라도 서태석과 암태도 소작쟁의 이야기가 국정교과서에 실려 다행이라 생각한다”고 언급했다.

그림과 글씨의 고장, 진도

11월 1일 새얼역사기행 둘째 날 아침이 밝았다. 본격적으로 진도를 돌아보는 날이다. 진도가 처음이었던 만큼 기대가 컸다.

예향으로 불리는 진도는 그림과 글씨의 고장이다. 여기에는 재미있는 일화가 있다. 조선시대 진도는 유배지로 꽤나 유명했다. 오죽하면 영조 때 전라감사가 “진도에 유배자가 너무 많아서 섬 사람들이 그들을 먹여 살리느라 굶어 죽을 판이니 다른 곳으로 옮겨 달라”고 건의했다고 한다. 당시 진도로 귀양 온 사람들은 대개 당파싸움에서 밀린 사람들로 글과 그림과 조예가 깊은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그림과 글로 감정을 달래고 교류했다. 진도에서 그림과 글씨가 유명한 건 이 때문일 것이다.

운림산방 풍경 (사진제공 새얼문화재단)

운림산방은 조선시대 남종화의 산실이다. 운림각(雲林閣)이라고도 하며 진도군 의신면 사천리 쌍계사 옆에 있다. 조선시대 남종화 대가였던, 추사 김정희가 '압록강 동쪽에는 소치만한 이가 없다'고 했던 소치 허련이 1856년 9월 스승 추사 김정희가 타계하자 고향에 내려와 지은 게 운림각이다.

하지만 이후 허련이 죽고 아들 미산 허형이 운림산방을 떠나면서 매각됐다. 그 뒤 허형의 첫째 아들 허윤대가 이를 다시 사들였고 1982년 미산의 넷째 아들인 남농 허건이 복원해 부흥했다.

운림산방 2대 미산과 3대 남농도 당대의 화가였고, 이 화맥은 다시 4대 때 남농의 조카 임전 허문(남농의 동생 임인 허림의 아들)으로, 5대에는 허문에서 남농의 손자인 허진과 허재으로 이어지며 화맥을 이어가고 있다.

소치의 직계는 아니지만 한국 문인화의 정수로 꼽히는 의재 허백련도 소치 허련과 같은 집안이다. 의재 역시 미산한테 사사했고, 미산의 아들 남농과 더불어 20세기 남종화에 '법고창신'의 예술을 불어 넣었으며, 그의 후손과 제자들이 지금도 한국 문인화의 예맥을 잇고 있다.  

운림산방 풍경 (사진제공 새얼문화재단)

소치 허련은 추사 김정희의 제자이기 전에 공재 윤두서의 작품으로 그림을 배웠다. 소치 허련은 허균(許筠)의 후예 가운데 진도에 정착한 허대(許垈)의 후손으로 어려서 해남에 있는 윤선도 고택(현재 녹우당)에서 공재 윤두서(尹斗緖)의 작품을 방작하면서 전통화풍을 익혔다.

소치는 이후 대흥사 초의 스님의 소개로 1839년 상경해 추사한테 서화를 사사했다. 중국 북송의 서예가이자 화가인 미불(米?), 원나라 말 황공망(黃公望)과 예찬(倪瓚), 청나라의 석도(石濤)를 공부했다.

운림산방에서 추사와 소치의 인연 덕분에 세한도에 관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세한도는 김정희가 1844년 제주도에 귀양살이를 하고 있을 때 그린 그림으로 가운데 집을 중심으로 소나무와 잣나무가 대칭을 이루고 있다. 귀양살이 당시 그린 그림이라 그런지 겨울의 쓸쓸한 분위기가 감돈다.

세한도는 추사가 제주에 있을 때 자신을 살펴주던 제자 우선(藕船) 이상적에게 마음을 전하기 위해 그린 그림이다. 이상적은 당시 역관이었기 때문에 중국과 교류가 잦았다. 그는 중국에 사신으로 갈 때마다 책을 구해 김정희에게 보내주곤 했다.

한번은 연경에 갔던 이상적이 '경세문편(經世文編)'이라는 책을 보냈다. 당시 이 책은 매우 구하기 어려워 권력있는 사람에게 바친다면 출세가 보장될 수도 있을 정도였다.

추사는 이상적의 변함없고 정성스러운 태도에서 '논어' 자한 편의 “세한연후지송백지후조(歲寒然後知松柏之後凋)”라는 구절을 떠올렸다. ‘겨울이 되고 난 후에야 소나무와 잣나무가 시들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는 뜻이다. 추사는 자신이 어려운 처지에 놓이고서야 변함없는 진정한 친구를 알게 된 것이다. 당시 이상적에게 현실적으로 해줄 수 있는 게 없었던 추사는 세한도라는 그림 한 편으로 자신의 마음을 담았다.

일본에 있던 세한도가 한국으로 다시 돌아온 배경에도 진도와 깊은 인연이 있다. 세한도는 구한말 경성제국대학 교수이자 추사 김정희 연구가였던 후지즈카 치카시에게 양도됐다. 1944년 진도출신 서예가 소전 손재형이 후지즈카 치카시를 매일 찾아가는 등 노력을 기울였고, 세한도는 그덕분에 한국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소전 손재형이 세한도를 찾아온 지 세 달이 지나 후지즈카의 서재가 폭격을 맞아 소장품이 전소됐다하니, 소전 선생이 아니었다면 세한도는 영영 세상에서 사라질 뻔 했다.

이날 진도에서 마지막 여정은 장전미술관이었다. 원래는 소전미술관에 갈 예정이었으나 그곳에서는 다른 전시를 하고 있어서 이용할 수 없다고 한다. 장전미술관은 진도군 임회면 삼막리 마을 골목에 있는데 건물 밖에는 정원이 아기자기하게 꾸며져 있다. 한국 서예계 거목인 소전 손재형 선생의 제자인 장전 하남호의 작품이 전시돼 있다.

장전미술관 (사진제공 새얼문화재단)

마을 자체가 수묵화 한 편이더라

진도가 그림과 글씨의 고장이라는 걸 여실히 느낀 순간이 있었다. 해질녁 도로를 달리는 버스 창가에서 진도의 풍경을 바라봤을 때였다. 도로 옆에 있는 가로수와 그 뒤에 늘어서 있는 진도의 산 능선, 능선 위로 붉게 퍼져있는 노을, 그 위로 떠 있던 초승달.

버스 창문으로 바라보는 진도의 풍경은 마치 수묵화인 것처럼 아름다웠다. 진도가 그림과 글씨의 고장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매일 이런 풍경을 보고 사는데, 글과 그림이 아름답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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