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일제가 감시한 인천의 독립운동가(15)
[연재]일제가 감시한 인천의 독립운동가(15)
  • 인천투데이
  • 승인 2019.11.04 10: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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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을 뒤흔든 공산청년동맹, 그 속의 인천 청년
신수복과 한영돌

[인천투데이] 1930년대 초ㆍ중반에 조선공산당을 재건하려는 움직임이 여러 사람, 여러 방면에서 나타났다. 그와 관련한 사건 중 하나로 ‘조선공산청년동맹 재건 사건’이 있다. <매일신보> 1934년 10월 10일 기사에는 1931년 6월 소련 모스크바의 국제공산청년동맹으로부터 지령을 받은 정태옥ㆍ강목구ㆍ오기섭이 각각 경성ㆍ함흥ㆍ부산을 중심으로 조직 활동에 나선 내용을 전하면서 인천도 언급하고 있다.

기사를 보면, 정태옥이 인천을 왕래하면서 신수복(愼壽福)ㆍ우종식(禹鍾植)ㆍ이억근(李億根) 등과 접촉해 1932년 8월 1일 ‘반전(反戰)데이’ 격문을 인천부 내에 뿌리고, ‘공산청년인천조직준비위원회’라는 비밀결사를 조직했다고 한다.

매일신보 1934년 10월 10일 기사.
매일신보 1934년 10월 10일 기사.

일제강점기 여러 사건이 그러하듯, 인천에 국한해놓고 보면 이 사건 역시 의문점이 여럿 있다. <매일신보>가 주요 구성원으로 언급한 우종식과 이억근은 이 사건으로 기소된 바 없으며, 재판 기록에는 기사에 이름이 없는 한영돌(韓永乭)이 인천의 주요인물로 등장한다. 일제 통치에 불만을 가진 청년들을 옭아매기 위한 과장된 사건이었을 개연성을 배제하기 어렵다.

어쨌든 이 사건으로 인천 청년 두 명이 구금과 조사 끝에 징역형을 선고받아 수감생활을 한다. 신수복과 한영돌이다. 1935년 10월 25일 함흥지방법원에서 열린 1심 재판에서 두 사람 모두 징역 5년형을 받았다. 형기에 포함하는 구류일이 200일이라는 점에서 체포에서 재판까지 6개월 이상 걸렸음을 알 수 있다.

두 사람을 포함해 18명이 같은 달 29일 경성복심법원에 항소했는데, 한영돌은 1936년 2월 7일 항소를 취하해 1심 형이 확정됐고, 신수복은 1937년 6월 30일에 열린 2심 재판에서 징역 3년으로 감형됐다.

신수복(1935.12.4. 촬영)과 한영돌(1935.11.26. 촬영)
신수복(1935.12.4. 촬영)과 한영돌(1935.11.26. 촬영)

신수복은 1915년 1월 7일생으로 재판 문서에는 본적과 주소가 인천부 외리(外里) 232번지라 했는데, 1938년 5월 2일 경기도 경찰부장이 신수복의 동향을 파악해 보고한 문서에는 본적이 인천부 경정(京町) 102번지, 주소가 경정 97-6호로 나온다. ‘외리’의 바뀐 이름이 ‘경정’이니 번지 차이는 있으나 현재의 경동에서 태어나 산 것은 틀림없다.

체포될 당시 문방구 상인이었으며, 인천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고 경성기독교청년학관(YMCA) 고등과를 중퇴했다. 평소 조선 독립에 관심을 가져 또래 청년들과 활발히 교류한 것으로 보이는데, 1932년 ‘메이데이 격문 사건 관계자 검거의 건’을 보면, 1932년 3월 어느날 자신의 집에서 안문식ㆍ정갑용ㆍ이억근 등과 모여 국제적색구원회(Mopr) 인천조직을 만들었을 때 참여해 교양부를 맡았다.

1933년 3월 14일자로 인천경찰서장이 경기도 경찰부장 등에게 보고한 ‘적색구원회 및 독서회 사건 검거에 관한 건’을 보면, 적색구원회 관계자들의 검거 등으로 활동이 원활하지 않자 여러 차례 새로운 사람들과 개편해갔는데, 1932년 10월에 결성한 제3차 적색구원회에서는 신수복이 ‘대표’에 해당하는 ‘책임’을 맡았다. 적색구원회는 항일과 사회주의 활동을 하다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을 돕기 위한 목적으로 만든 후원조직이다.

공산청년동맹 재건 사건 관련해서는 학생과 도시빈민층, 아리마(有馬) 정미소, 가토오(加藤) 정미소를 담당했다는데, 상당한 지식과 능력을 갖춘 인물로 주변에서 인정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1938년 4월 11일 만기 출소한 뒤 당시 63세의 모친 정순의(鄭淳義)와 함께 살았는데, 1938년 5월 2일 경기도 경찰부장이 ‘사상범 신수복 만기 출소 후의 감상에 관한 건’이라는 제목으로 보고한 문서를 보면, 어머니의 자애로움과 서대문형무소ㆍ인천경찰서의 온정적 처우에 따라 과거를 반성했다고 한다. 비록 보고문서 속에 ‘내선일체(內鮮一體)’니 ‘황국신민(皇國臣民)’이니 하는 상투적 표현이 들어있지만, 이후 사상 전향을 뒷받침하는 행동을 한 자료가 없어 적극적 친일로 돌아섰다고 단정하긴 어렵다. 추측컨대 연로한 모친을 모시고 조용히 산 것 같다.

한영돌은 1910년 9월 7일생으로 강화군 양도면(良道面) 인산리(仁山里)에서 태어났다. 본적은 경기도 김포군 양촌면(楊村面) 구래리(九來里) 677번지이고, 주소는 인천부 화정(花町) 1정목 91-5번지다. 어린 시절에 서당에서 약 1년간 한문을 배웠고, 18세 무렵부
터 인천에서 제승업(製繩業)ㆍ정미업(精米業) 또는 부두 등의 노동에 종사했다고 한다. 체포될 당시에도 직업란에 ‘고인(雇人)’, 즉 고용돼 일하는 노동자라 기록돼있다. 키는 163cm이다.

1932년 1월 20일께 인천부 화정의 자택에서 안문식ㆍ이복률ㆍ이정숙ㆍ김경득 등과 함께 ‘인천적색노동조합’이란 비밀결사를 조직하고 각자의 직장에서 동지를 획득하기로 결의했으며, 2월에는 자택에서 두 차례 조합 확대를 협의했다고 한다. 1932년 9월 10일에는 자택에서 정태옥과, 9월 13일에는 정태옥ㆍ신수복 등과 ‘조선공산청년회 재건 인천조직준비위원회’를 결성했으며, 9월 15일부터 10월 중순까지 자택에서 준비위원회를 두 차례 개최해 활동 방향을 논의했다. 이때 리키타케(力武) 정미소와 조선인촌주식회사 공장을 담당했다.

징역을 꼬박 5년 살고 1940년 7월 21일 서대문형무소에서 만기 출소했고 그 이후 행적을 알 수 있는 자료는 없다. 국가보훈처 공훈전자사료관의 독립유공자 공훈 조서를 보면, 출소 후 채 3년이 안 된 1943년 5월 12일에 별세했다고 한다.

2008년에 국내 항일로 건국훈장 애족장에 서훈됐으니, 자손이 있어 서훈을 신청한 것으로 보인다. 품은 의지와 겪은 고초에 비할 수는 없지만, 그나마 다행스런 일이다.

신수복과 한영돌에 대해 일제는 공통적으로 ‘조선독립과 공산주의’ 사상을 가졌다고 표현했다. 이들이 품은 공산주의 사상의 실상은 사유재산제도 철폐로 노동자ㆍ농민의 생존권 확보, 즉 극심한 빈부격차 해소에 초점을 둔 것이다. 현재와 같은 이데올로기로 이 당시의 사회주의를 보기보다는 항일의 수단과 생존권 확보의 도구로서 바라보는 게 실상에 더 가깝지 않을까?

/김락기 인천문화재단 인천역사문화센터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