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우범의 사라진 도시를 찾아서 <55> 레바논 바알베크

로마제국 최대 신전이 있는 레바논의 바알베크 전경.

[인천투데이] 레바논은 한때 ‘중동의 파리’라고 불렸다. 지금은 내전의 상처를 보듬기 위한 복구공사가 한창이지만, 수도인 베이루트 길가의 수많은 광고를 보면 이곳이 과연 이슬람국가인가를 의심할 정도로 화려하고 파격적이다. 현재도 ‘중동의 파리’임을 스스로 자랑하고 있는 듯하다.

레바논은 로마제국의 지배를 받았다. 로마는 지중해를 아우르는 대제국을 건설했는데, 로마제국 최대 신전이 레바논의 바알베크에 있다. 대제국을 건설한 로마가 최대 신전을 로마도, 그리스도 아닌 레바논에 세운 이유는 무엇일까.

바알베크는 베이루트서 북동쪽으로 86㎞ 떨어진 곳에 있다. 이곳에 가려면 레바논산맥을 넘어가야한다. 로마제국 군이 동방원정을 나섰던 길에 오르자, 산꼭대기까지 건물이 빼곡하다. 그런데 너나 할 것 없이 모든 건물의 지붕이 주황색이다. 푸른 지중해와 녹색 나무숲, 주황색 지붕을 한 하얀 건물들이 마치 한 폭의 그림처럼 아름답다.

‘비옥한 초승달’지대라 일컫는 베카평원 전경.

레바논산맥을 넘어서자 푸른 평원이 가득 펼쳐진다. 베카평원이다. 평원 맞은편으로 달리는 안티레바논산맥을 따라 동서 15㎞, 남북 170㎞로 길게 뻗은 베카평원은 매우 비옥한 땅이다. 로마제국은 이곳을 가리켜 ‘제국의 빵바구니’라고 불렀다. 제국을 먹여 살리는 최대 곡창지대이기 때문이다. 로마제국은 곡물뿐만 아니라 상당량의 과일도 이곳에서 조달했다.

베카평원 북쪽 중앙에 있는 바알베크에 이르자 로마 신전들이 웅장한 자태를 드러낸다. 아크로폴리스에 들어서자 하늘을 찌를 듯 곧게 뻗은 거대한 기둥들이 육중한 모습으로 맞이한다. 로마제국 최대 신전인 유피테르(주피터) 신전의 기둥이다.

유피테르 신전과 원주 기둥.
유피테르 신전과 원주 기둥.

신전의 기둥은 직경이 2미터를 넘고 높이가 20미터를 넘는다. 신전 하부를 받친 건축물까지 합치면 40미터가 넘는다. 이러한 신전을 짓기 위해서는 거대한 돌들이 필요했다. 돌 하나가 2000톤이 넘는 것도 있다. 이 돌을 움직이는 데만 약 4만 명이 필요했다고 한다. 신전 하나를 짓는데 엄청난 인적ㆍ물적 자원이 동원됐다. 신전의 석주(石柱)는 모두 54개였다. 하지만 두 차례 지진으로 지금은 6개만 남았다. 지진이 아니고서는 무너뜨릴 수 없는 기둥이다.

유피테르 신전 옆에 아담한 모습의 바쿠스 신전이 있다. 바쿠스는 로마 신화의 포도주 신으로 그리스 신화의 디오니소스에 해당한다. 이 신전도 유피테르 신전 옆에 있어서 아담하게 보일 뿐이지, 가로 36미터와 세로 68미터로 아테네의 파르테논 신전보다 더 크다. 바쿠스 신전은 로마제국의 신전 중 보존 상태가 가장 좋다.

가장 잘 보존돼있는 바쿠스 신전.

바쿠스 신전 곁에는 비너스 신전이 있다. 비너스는 그리스 미의 여신인 아프로디테에 해당한다. 미의 여신답게 로마제국의 신전으로는 매우 드물게 원형(圓形)으로 건축돼 독특한 아름다움을 자랑한다.

이 세 신전의 건설은 오랜 기간에 걸쳐 완성됐다. 로마제국의 시저는 다마스쿠스까지 이르는 중동의 요지를 점령한 후, 이곳에 대형 신전을 짓기로 했다. 그 첫 번째로 서기 60년에 유피테르 신전을 완공했다. 뒤이어 바쿠스 신전(150년)과 비너스 신전(220년)을 완성했다.

시저가 로마도 아닌 바알베크에 제국 최대 신전들을 세운 것은 무슨 이유일까. 이는 베카평원의 비옥함 때문만은 아니었다. 베카평원 북쪽 한복판에 있는 바알베크는 고대부터 성스런 땅으로 여겨온 곳이다. 바알베크라는 명칭도 ‘바알(=태양)’과 ‘베크(=언덕)’를 합친 것으로 로마제국 시기 훨씬 이전인 고대 페니키아시대부터 태양신을 모시던 성지(聖地)였다.

가나안 지대 최고의 신이었던 바알신 상.

바알은 가나안 우가리트 신화에 나오는 으뜸 신 ‘엘’의 아들이다. 서아시아 일대의 가나안 지대에서는 오래 전부터 풍년 신들을 지칭하는 말이었다. 바알은 땅을 풍요롭게 해주는 비와 폭풍우를 주관하는 신이다. 오른손에 망치를 치켜들고, 왼손에는 창살모양을 하고 있는 번개를 들고 있다.

바알의 적수는 바다의 신 ‘얌’과 죽음의 신 ‘모트’였는데, 엘의 도움으로 죽음에서 소생해 모트까지 쫒아내고 승자가 된다. 혹심한 더위와 사막의 날씨는 죽음과 지하세계를 관장하는 모트의 영역이다. 바알의 소생은 풍요로운 자연의 순환을 의미한다. 바알 신은 엘 신과 마찬가지로 황소로 상징되며 황소로 숭배되기도 한다.

바쿠스 신전에 새겨진 클레오파트라 상.

바알베크는 그리스시대에도 ‘헬리오폴리스(=태양의 도시)’라고 부르며 신성시했다. 시저는 바로 이러한 성지에 거대한 신전을 건설함으로써 로마의 정신과 정통성을 고취시켰다. 이로써 로마제국의 동방경영에 필요한 통치를 확고히 하려했다.

그러나 역사는 뜻대로 되지 않는다고 했던가. 로마제국 최대 신전이 완성될 무렵, 로마제국은 쇠퇴의 길로 접어든다. 그리고 기독교를 국교로 인정함으로써 이제껏 오랜 기간에 걸쳐 대역사(大役事)를 기울인 신전들이 기독교인들에 의해 파괴된다. 참으로 아이러니컬한 역사가 아닐 수 없다. 이후 신전들은 기독교 교회와 이슬람 사원으로 개조돼 이용돼왔다.

역사의 흥망성쇠를 가늠하는 키워드는 경제력이다. 경제력은 곧 부의 축적을 의미한다. 부의 축적이 왕성하려면 교역이 활발해야하고, 또 그 교역을 이끄는 중심이어야 한다. 바알베크는 지중해와 서아시아 남북을 이어주는 교차점이었다. 그리스인이 ‘태양의 도시’라 부른 것도 바로 이러한 활발한 교역의 중심지였기 때문이다. 강력한 경제력을 가진 로마제국은 유럽ㆍ아시아ㆍ아프리카에 걸쳐 있는 이민족을 다스릴 구심점이 필요했다. 그래서 고대부터 태양신의 신전이 있던 이곳을 택해 이를 흡수하고 자신들만의 신전을 세운 것이다.

※ 허우범은 실크로드와 중앙아시아 곳곳에 있는 역사 유적지를 찾아가 역사적 사실을 추적, 기록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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