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피플] “우린 한민족, 함께 어울려 살아야”
[인천피플] “우린 한민족, 함께 어울려 살아야”
  • 류병희 기자
  • 승인 2019.10.28 14:5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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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연수구 함박마을 정착 고려인 차이고리 씨
어릴 때 정체성 혼란, 고려인들 도움으로 고국에 관심
중앙아시아 고려인, 소련시절 연해주 등에서 강제이주
“아이들 한국말 가르쳐 인재로 키워야…관심과 지원을”

[인천투데이 류병희 기자] 인천 문학산 남쪽 자락, 연수구 연수동에 함박마을이라는 곳이 있다. 이곳에는 몇 년 전부터 먼 나라에서 온 사람들이 모여 살고 있다. 재외동포인 ‘고려인’들인데, 이들은 우즈베키스탄 등에서 ‘고국’ 한국으로 이주했다. 6000명 정도가 함박마을에 산다.

현재까지 한국으로 온 고려인은 8만여 명으로 파악된다. 경기도 안산에 가장 많은 2만 명 가량이 거주한다. 이들은 2015년부터 본격적으로 한국에 이주해 함께 살기 시작했다.

연수구 함박마을에는 고려인들을 지원하는 단체인 인천고려인문화원 ‘너머’가 있다. 이곳에선 고려인들이 한국인으로서 정체성을 찾는 다양한 프로그램을 운영한다. 성인반과 학생반으로 나눠 한글은 물론 한국 춤과 노래를 배운다. 그리고 마을 순찰활동 등을 하며 공동체 형성을 위해 애쓰고 있다.

최근 고려인들에 대한 관심과 지원이 필요하다는 여론이 형성되고 있고, 따뜻한 동포애로 외국인이 아닌 한국인으로서 이들을 품어야한다는 목소리도 커지고 있다.

연수구 함박마을에서 살면서 대한고려인협회 인천지부장과 인천고려인문화원 공동위원장을 맡고 있는 차이고리(차인호ㆍ41) 씨를 만나 고려인들의 생활상과 바람을 들어봤다. 차 씨는 2년 전 우즈베키스탄에서 왔다.

차이고리 씨는 연수구 함박마을에서 아이들에게 한국어와 한국의 역사ㆍ문화 교육을 하며 생활하고 있다.
차이고리 씨는 연수구 함박마을에서 아이들에게 한국어와 한국의 역사ㆍ문화 교육을 하며 생활하고 있다.

“나는 누구인가…고려인”

고려인문화원에서 만난 차 씨는 인사를 건네자마자 자신을 연안((延安) 차 씨 후손이라고 소개했다. 러시아말로 ‘이고리’, 한국말로 ‘어진 범’을 뜻하는 인호(仁虎)가 그의 이름이다.

“나는 우즈베키스탄에서 자랐다. 고려인 아버지와 러시아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1929년생으로 연해주에서 살다가 과거 소련의 강제이주정책에 따라 1937년 우즈베키스탄으로 이주했다.”

차 씨는 초록색 눈을 가졌다. 외모는 영락없는 러시아인이다. 어릴 때 부모와 함께 촬영한 사진을 보여줬다. 그의 아버지 얼굴이 그에게 그대로 투영됐다.

차이고리 씨는 고려인 아버지 차알렉세이와 러시아인 어머니루드밀라 사이에서 태어났다.(사진제공ㆍ차이고리 씨)
차이고리 씨는 고려인 아버지 차알렉세이와 러시아인 어머니루드밀라 사이에서 태어났다.(사진제공ㆍ차이고리 씨)

“아버지 이름은 알렉세이다. 차알렉세이. 어머니는 루드밀라. 아버지는 우즈베키스탄에서 세무공무원으로 일하셨다. 1999년에 돌아가셨는데, 아버지는 당신의 한국말 이름은 알려주지 않으셨다. 할아버지는 차양준이고 할머니는 장마리아다.”

차 씨는 중학생이 되면서 정체성 혼란을 겪었다. 학교를 갔는데 동급생들에게 괴롭힘을 받았다. 어디선가 고려인 형들이 나타나 그를 도와줬다. 그 날부터 ‘나는 고려인’이라는 생각을 가졌다.

“우즈베키스탄은 다민족 국가다. 러시아인ㆍ우즈벡인ㆍ고려인 등이 함께 살고 있는데, 특히 우즈벡인들이 고려인 차별을 많이 한다. 시장에서 물건가격이 다를 정도다. 대놓고 ‘너희 나라로 돌아가라’는 말도 한다. 그래서 ‘나는 누구인가’라는 생각을 많이 했고, 중학교 때 고려인들과 자주 어울리면서 한국어와 한국의 문화ㆍ역사를 접하고 공부하기 시작했다.”

그의 한국 공부는 계속 이어졌다. 우즈베키스탄 국립사범대에서 러시아어와 함께 한국어를 전공했다. 한국어와 한국의 역사를 배워 많은 고려인에게 알려주는 일로 평생 봉사하기로 맘먹었다.

고려인문화원에는 교실에 태극기가 걸려있다.
고려인문화원에는 교실에 태극기가 걸려있다.

 카레이츠, 고난한 삶과 독립운동

러시아 지역에 있는 고려인을 흔히 ‘카레이스키’라 불렀다. 그런데 차 씨는 ‘카레이스키’는 잘못된 말이라고 했다.

“카레이스키는 형용사다. ‘고려인의, 고려인에 의한’이라는 뜻의 용어이고, 고려인은 명사로서 ‘카레이츠’다. 선조들이 연해주로 이주했을 때는 조선 시대였는데, 조선인이라고 하지 않고 고려인이라고 하는 것은 외부 시각이다. 코리아(KOREA, 고려)가 통용됐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고려인이라고 불리게 됐다.”

1860년대 만주와 연해주 등으로 고려인이 대거 이주해 살았다. 조선 말기 봉건지배체제 아래에서 경제적으로 궁핍한 삶을 벗어나고자하는 열망이 컸다. 특히 함경북도는 연해주와 맞닿아있고, 1910년 을사늑약으로 국권을 상실한 후 연해주는 자연스럽게 일제에 항거하기 위한 독립운동 근거지가 됐다.

“아버지와 할아버지, 할머니, 그리고 친척들이 연해주로 이주해 살았다. 그리고 확실하지 않지만, 연해주에서 일본군에 대항한 홍범도ㆍ안중근ㆍ최재형 등과 교류가 있었다. 1937년 옛 소련으로부터 강제이주를 당하기 전까지 연해주 고려인들은 독립운동의 근거지에서 활약했다.”

홍범도 장군 등은 강제이주 때 연해주 고려인들과 우즈베키스탄ㆍ카자흐스탄 등 중앙아시아로 이동해 항일독립운동을 이어가며 독자적인 이주문화를 형성했다.

“카자흐스탄에는 홍범도 장군의 동상이 있다. 고려인들의 자랑이다. 고려인들은 독립운동을 했다. 현재 2세, 3세들은 모두 그 후손이다. 어렵게 살았다.”

봉오동ㆍ청산리 전투 등을 승리로 이끈 홍범도 장군은 카자흐스탄 끄즐오르다 지역에 묻혀있고, 그곳에 동상도 있다.

“현재 어린 세대는 한국 방탄소년단(BTS)은 아는데, 그러한 이주나 항일 역사는 모른다. 한국어도 못한다. 안타깝게 생각하고 있다. 이들에게 한국어와 한국의 역사ㆍ문화 등을 가르쳐야한다. 나는 고려인으로서 큰 자부심을 느낀다.”

함박마을에는 고려인 아이 140여 명이 있는데, 이들은 학교를 다니고 방과 후에는 고려인문화원에서 한국어 등을 배운다.
함박마을에는 고려인 아이 140여 명이 있는데, 이들은 학교를 다니고 방과 후에는 고려인문화원에서 한국어 등을 배운다.

“한국어 교육 절실, 나라 인재 될 것”

지난 17일 인천시의회 임시회 본회의에서 김국환 의원은 시정 질의를 통해 함박마을 고려인 복지 지원 강화와 고려인센터 건립을 박남춘 인천시장에게 요청했다. 박 시장은 실태조사를 실시하고 고려인들의 구심점이 될 센터 건립을 적극 검토하겠다고 답했다.

김 의원의 이러한 시정 질의는 함박마을에 살고 있는 고려인들이 처한 어려움과 여러 사회적 문제를 해소하기 위해 그들의 생활을 돕고 그들이 공동체를 형성하는 데 구심점 역할을 할 기관이 필요하다는 뜻이다.

함박마을에 고려인들이 몰려든 것은 비교적 최근이다. 차 씨는 “2년 정도 된 것 같은데, 일단 공항이 가깝고, 공단(=남동공단)이 있어 일자리에 접근하기 편하다. 그리고 집값이 다른 곳보다 비교적 저렴하기 때문에 모인 것 같다”고 말했다.

이어 “아이들은 인근 학교에 다닌다. 나도 두 아이의 아빠다. 딸과 아들이 있는데, 학교생활을 물어보면 큰 문제는 없다고 한다”며 “다만, 한국어 소통이 아직 부족해 교육이 더 필요하다. 한국어를 잘 배운다면 러시아어, 우즈벡어 등 여러 언어를 할 수 있다는 점에서 정착해 살아가면 나라의 인재가 될 것이다”라고 덧붙였다.

고려인문화원은 고려인들로 마을순찰대를 조직했다. 아이들도 참여해 마을을 청소하기도 한다. 고려인문화원 교실에는 차 씨가 쓴 서예작품이 걸려있다. 그리고 태극기를 벽에 걸어 아이들이 늘 보고 다니게 했다. 한국에 대한 애정이 남달라 보인다.

함박마을 고려인들은 한국 문화와 역사를 알기 위해 다양한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사진제공ㆍ차이고리 씨)
함박마을 고려인들은 한국 문화와 역사를 알기 위해 다양한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사진제공ㆍ차이고리 씨)

“우린 한민족, 함께 어울려 살아야”

함박마을에는 고려인뿐만 아니라 중앙아시아와 러시아 등에서 온 외국인들이 함께 거주하고 있다. 고려인들은 스스로 ‘한국인’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외국인’이라는 차별적 시선에 부담을 느끼는 경계에 있다.

“언어 소통이 미숙하고 한국 문화를 잘 모르기 때문에 문제가 없지는 않다. 러시아 또는 살던 나라의 문화를 지니고 있어서 여기에서도 그대로 하고 있다. 사고방식을 쉽게 바꿀 수는 없다. 그래서 더욱 언어와 문화, 역사 교육이 필요하다.”

언어 다음으로 일자리 구하기가 어렵다고 차 씨는 말했다. 인천에서 먼 지역까지 매일 출퇴근하는 사람도 많다고 했다. 그러면서 한국 사회가 고려인과 다른 외국인을 차별하는 것을 지적했다.

“고려인들은 언어 소통 다음으로 일자리가 부족해 어려움을 겪고 있다. 일자리 마련을 위해 지원이 필요하다. 많은 고려인이 단체로 승합차를 타고 경기도 안산 등으로 일을 하러 다닌다. 고려인들은 단순히 일자리를 찾으러 한국에 온 것은 아니다. 외국인들은 반드시 자신의 나라로 돌아간다. 그러나 고려인들은 한국에서 살고 싶어 한다. 한국에 온 이유는 내 뿌리가 어디인지 궁금하기도 하고, 한국 문화를 배우고 싶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다른 외국인들과 다르다. 고려인들에게 관심을 갖고 적극 지원해주길 바란다.”

인터뷰 도중 차 씨 휴대전화가 울렸다. ‘애국가’가 고려인문화원 교실을 가득 메웠다. 벨소리도 애국가로 할만큼 깊은 고국 사랑이 느껴졌다.

차 씨는 인터뷰를 마치면서 “한국에서 고려인, 조선족, 탈북민 등이 함께 어울려 사는 세상을 꿈꾼다. 한민족은 함께 살아야한다”는 바람을 얘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