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동화

[인천투데이 심혜진 시민기자] 엄마가 칠순 맞이 여행을 가셨다. 엄마는 내가 어렸을 때부터 “영국에 가보고 싶다”는 말을 하곤 했다. 언젠가 텔레비전에서 ‘신사의 나라’ 영국이 나왔는데, 거기 사는 사람들 모습과 풍경이 아주 멋졌다는 거다. 멀리 여행을 간다면 꼭 영국으로 갈 거라 했다. 그로부터 50여 년이 지나서야 엄마는 첫 장거리 해외여행을 떠났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번 여행 코스에 영국은 포함되지 않았다. 그래도 엄마는 괜찮다고 했다. “그냥 아는 나라 이름이 영국이었던 거지, 영국에 뭐가 있는지도 몰라. 어디든 비행기 타고 멀리 가는 게 중요한 거지.” 엄마에게 영국이란, 얼굴 하얀 사람들이 사는 먼 나라의 대표명사 같은 의미였나 보다.

엄마는 한 달 전부터 이 여행을 차근차근 준비했다. 10월 유럽 날씨가 쌀쌀하다는 얘길 듣고는 굳이 나를 데리고 가 얇은 점퍼를 샀고 그 안에 받쳐 입을 티셔츠도 몇 개 샀다. 파마도 새로 했다. 틈틈이 걸으며 다리 힘과 체력도 길렀다. 떠나기 2주 전까지도 미처 마련하지 못한 건 딱 하나, 운동화였다. 도무지 무엇을 사야할지 알 수가 없다고 했다. 백화점에서 파는 운동화는 가볍고 편하지만 너무 비싸 못 사겠고, 마트 신발 매장에서 파는 건 값은 싸지만 발이 편할지 확신이 서지 않는다는 거였다.

“신어 보고 사면 되죠.” “그러게. 근데 신어 봐도 잘 모르겠더라고.” 엄마네 신발장에 든 투박한 운동화 한 켤레가 생각났다. 엄마가 작년에 산 것인데, 매장에서 신었을 땐 괜찮은 듯했지만, 막상 신고 걸어보니 신발이 무겁고 발이 영 편하지 않다고 했다. 대신 엄마는 8년 전에 산 운동화를 이때껏 못 버리고 가끔 신는다. “그 운동화가 젤 편해. 그런 운동화는 이제 없는 것 같아. 너무 낡아서 시장 갈 때만 신는 게 아쉽지.” “엄마 발에 익숙해져서 그런 거야. 다른 것도 길들면 똑같아져요.” 아무리 말해도 엄마는 내 말을 믿지 않는 것 같다.

결국, 엄마와 함께 운동화 매장에 갔다. 여러 브랜드의 중저가 모델을 모아놓고 파는 곳이었다. 마침 할인 기간이라 최고가라 해도 10만 원이 넘지 않았다. 비싼 게 발도 편하리란 생각으로 엄마에게 제일 비싼 운동화를 신겼다. 엄마는 아주 만족스러워했다. 내가 신어 봐도 발이 꽤 편했다.

운동화를 사 들고 걸어오는 길, 엄마가 말했다. “사실 내 손으로 운동화 사 신은 게 딱 세 번밖에 안 돼. 그래서 고를 줄을 모르는 거야.” 엥? 칠십 평생에 단 세 번이라니, 말도 안 된다는 표정을 짓자 엄마가 다시 한 번 강조했다. “진짜야. 예전에는 평소에 슬리퍼 신었고, 어디 특별하게 외출할 땐 구두나 단화를 신었지. 겨울엔 털 있는 슬리퍼가 있었어. 운동화는 사 본 적이 없어.” 엄마 얘기론, 늘 시장에서 단화를 사 신다가 내가 하도 편한 신발 좀 사 신어라 해서 한 번 용기를 내 운동화를 사 보았단다. 그게 8년 전이다. 엄마는 그 운동화를 몹시 아껴 신었다.

하여간 엄마는 오랜만에 맘에 쏙 드는 새 운동화를 사고선 곧장 부지런히 신고 걸으며 발에 잘 맞도록 길들였다. 그리고 그 운동화를 신고 비행기를 탔다. 엄마가 가신 지 며칠 후에야 나는 이 글을 써야한다는 걸 알았고, 미처 엄마의 구술을 받지 못했다는 걸 깨달았다. 그래서 마감을 앞둔 지금, 어린 시절 엄마가 겪은 운동화에 대한 일화들을 들을 방법이 없다. 엄마의 ‘신발 변천사’를 신문기사로 추적해보려 한다.

# 아이들 사이에서 운동화는 ‘꿀템’

1950년대만 해도 고무신을 신는 이가 많았다. 고무신은 1919년 대륙고무공업주식회사를 일본인과 합작해 설립하면서 우리나라에 보급되기 시작했다. 이후 조선고무 등 업체 70여 개가 서울 등 대도시를 중심으로 세워졌으나 1937년 일제 말, 일본이 고무신 원료 보급을 차단하면서 고무신 공장들은 대부분 문을 닫았다. 사람들은 다시 짚신을 신었다. 사실 고무신은 짚신처럼 빨리 닳지도, 물이 스며들지도 않아 장점이 컸다. 광복 후 고무신을 재생산했지만 가난한 사람들에겐 아직 그림의 떡이었다. 그러다 1950년대 고무신이 유행하게 된 건 선거라는 특수를 만나면서부터다.

‘광복 후 고무신 공장은 다시 난립하게 됐으며 50년 5월 국회의원 선거운동 과정에서 후보들이 선심 공세로 고무신을 뿌리는 바람에 신발산업은 급성장했다. 선거특수로 호경기를 누린 신발업계는 6.25동란 이후 군소업체들이 도산, 58년에는 현재의 국제, 삼화, 대양고무 등 10여 개 사만 남게됐다.’(1990.6.20.경향신문)

1950년대에도 운동화를 생산하긴 했으나 값이 비싸 아무나 신을 수 없었고 질도 그리 좋지 않았다. 1957년 보스턴 마라톤대회에서 3등을 한 임종우 선수는 소감을 묻는 기자의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삼착으로 “꼴인”한 후 임군은 기자에게 “내가 신은 운동화의 바닥고무가 너무 단단하였기 때문에 발을 옮길 때마다 고통을 느꼈다.”고 말하였다.’(1957.4.22.경향신문)

1960년대부터 국내에서 운동화 본격 생산에 들어섰다. 투박한 고무신에 비해 운동화는 모양이 세련되고 예뻐 특히 아이들 사이에서 선망의 대상이 됐다. 1963년 신문에 이런 글이 실렸다.

‘묵호초등학교 문병주 어린이는 6학년이 되도록 한 번도 운동화를 신어보지 못했대요. 그런데 하루는 형님이 병주 군을 부르더랍니다. (…) 병주 군은 그길로 뛰어나가 운동화를 사 신었대요. “발을 깨끗이 씻고 운동화를 신으니 날 것 같이 몸이 가벼웠다”고 병주 군은 글을 썼습니다.’(1963.6.21. 경향신문)

운동화가 아이들 사이에서 ‘꿀템’이 되면서, 운동화를 신을 수 없는 아쉬움이나 부러움은 글쓰기의 단골 소재가 됐다. 이에 아동문학가 마해송은 “구멍 난 고무신, 헤어진 운동화의 비극은 인제 그만해야할 것이다”라며 “가난에 쪼들리더라도 큰 이상, 큰 포부, 아름다운 경륜을 펼치는 꿈이 더 소중한 일이다”라는 글을 썼다.(1966.1.11.동아일보)

# 운동화 공장에서 직업병으로 노동자 전신 마비

1960년대 중반부터 플라스틱으로 만든 슬리퍼가 여름용 신발로 관심을 끌며 등장했다.

‘1켤레에 1백50원인 이 플래스틱 슬리퍼는 색깔이 다양하고 아름다운 데다가 스폰지 식으로 된 고무 슬리퍼보다 튼튼하고 때가 끼지 않아 올 들어 부쩍 인기를 얻고 있다.’ (1967.517.매일경제)

1960년대 말엔 생고무 대신 플라스틱의 일종인 폴리염화비닐(PVC)로 만든 운동화를 출하했다. PVC는 질긴 반면 딱딱한 감촉이 단점이었는데, 이를 발포 상태로 유지하는 기술을 개발하면서 고무처럼 수축성 있고 부드러운 제품을 만들 수 있게 된 것이다. 운동화와 슬리퍼가 사랑을 받으면서 고무신은 위기를 맞았다. 생필품 생산이 부족해 해마다 물가가 뛰던 와중에도 고무신 가격만큼은 제자리를 지킬 수밖에 없었다. 1970년대 도시에선 명절을 빼면 고무신을 찾아보기가 어려워졌고 심지어 한 학교에선 고무신을 신고 출근한 교사가 교장에게 불려가 고무신은 품위가 없다며 ‘복장단정’ 지적을 받는 일까지 생겼다.(1971.12.24.동아일보)

운동화의 인기가 나날이 올라가는 와중에 큰 사고가 발생했다. 무허가 운동화 공장 노동자 열세 명에게서 손발이 굳어지고 전신이 마비되는 증상이 생긴 것이다.

‘서울 영등포구 신도림동 701의 75 무허가 운동화 공장인 동아고무공업사에서 운동화에 고무창을 붙이는 일을 해온 장윤자 부인(37)은 지난 2월 중순경 원인 모르게 손발이 굳어지기 시작, 다른 사람이 꼬집어도 감각이 없을 정도며 현재는 혼자서 일어나지도 못하고 다른 사람이 세워줘도 그냥 주저앉을 만큼 전신이 마비되었다는 것이다. (…) 이들은 그동안 심한 고통을 겪어 오면서도 일자리를 빼앗길까봐 고용주에게는 증상을 숨긴 채, 한약방 등을 찾아다니며 자가 치료를 해왔으나 전혀 효과를 보지 못했으며 종합병원 등을 찾아가 치료를 받으려 해도 돈이 없어 진찰조차 받지 못하고 있다. 이들은 그동안 박봉에 시달리면서도 치료비로 10만원에서 45만원까지의 빚을 지고 있는 데다 보상도 받지 못한 채 일자리를 떨려나 지금은 치료조차 받지 못하고 있다는 실정이다.’(1974.6.15. 동아일보)

노동청 조사 결과, 이는 운동화 밑창을 붙이는 데 사용한 접착제 원료인 솔벤트250에서 함유된 노르말헥산이 원인임이 밝혀졌다. 이미 일본에선 1960년대 초부터 사회 문제화 된 물질이다. 당시 공장엔 창문 하나 나 있지 않았고 환기장치도 전혀 없었다고 한다. 그곳에서 노동자들이 하루 열일곱 시간씩 일하며 혹사당한 사실이 밝혀지면서 “돈에 눈먼 비정의 기업윤리”를 비난하는 여론이 높았다. 공장 대표는 입건됐으나 후속 보도가 없어 이후 치료가 어떻게 됐는지 알 수 없다.

# 운동화 고급화 바람, 한 켤레 10만 원 넘기도

1980년대 들어 나이키, 리복, 컨버스 등 외국 유명 상표를 단 운동화를 국내에서 제조해 수출하면서 고급 운동화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과거에는 단순한 디자인에 켤레 당 4천~5천 원 하는 제품이 주류를 이뤘으나 최근 다양한 디자인에 특수 소재를 이용한 1만~2만 원을 호가하는 고가품이 다량으로 선을 보이면서 (…) 신발에 대한 소비자들의 구매 패턴이 점차 고급화돼가는 경향을 보이고 있어….’ (1982.8.23.매일경제)

1983년엔 외국 상표를 도입한 운동화가 턱없이 비싸며, 업체들이 폭리를 취하고 있다는 기사가 신문에 여러 차례 실렸고, 유명 운동화를 신고 싶었다며 신발을 훔친 중고생들이 특수절도 혐의로 입건되기도 했다. 프로야구와 88올림픽 등 스포츠가 대중에게 인기를 끌면서 운동화는 더욱 인기를 끌었다. 1990년대엔 국제상사의 프로스펙스, 화승의 르까프, 코오롱상사의 액티브 등 국내 운동화와 나이키, 리복 등 세계적인 운동화 업체가 대등한 경쟁을 벌였다. 1990년대 초부터 켤레 당 10만 원이 넘는 고가 운동화도 젊은 층에서 큰 인기를 끌었다. 그러나 아이엠에프(IMF)를 지나면서 운동화 열기는 한풀 꺾였고, 1990년대 말엔 운동화 할인점이 곳곳에 들어섰다. 운동화는 더 이상 귀한 물품도, 부러움의 대상도 아니게 됐다.

엄마가 그동안 운동화를 신지 않았던 이유를 짐작해보면, 운동화는 아이들과 청소년, 성인 남성을 대상으로 만든 물건이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마치 하이힐이 여성의 신발이었던 것처럼. 당시 운동화 광고 문구를 봐도 알 수 있다. “선택 순간부터 근력이 달라집니다” “운전 시는 피로감소 효과, 걸을 때는 운동 효과” “엄마, 아빠! 고맙습니다. 제가 OO운동화 신고 싶어 하는 거 어떻게 아셨어요?” 건강과 운동은 남성의 영역이었기에, 게다가 여성은 언제나 얌전하고 조신하고 ‘예뻐야’ 했기에, ‘집에서 살림하는 여자들’은 운동화를 신을 생각조차 하지 않았던 게 아닐까.

엄마가 여행에서 돌아오면 꼭 물어봐야겠다. 무엇이 그 편한 운동화를 신지 못하게 만든 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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