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인희 인천문화재단 인천역사문화센터 연구원

[인천투데이] 육로로 강화도를 가게 된 것은 1970년 강화교가 개통되고 난 다음부터니, 불과 50년 정도밖에 안 됐다. 그 이후 1997년에 새 강화대교가 옛 강화교를 대체해 개통했고, 2002년에는 초지대교가 개통했다. 2014년에는 교동대교, 2017년에는 석모대교가 개통하면서 강화도의 주요 섬들은 자동차로 손쉽게 갈 수 있게 됐다.

이제 배를 타고 가야하는 강화도의 섬은 서도면에 속한 섬과 삼산면 부속 섬 정도 남아 있다. 이런 섬들은 특별한 사유가 없는 한 잘 가보지 못하는 곳이다. 지금도 이러한데 조선시대에는 섬들을 방문하기가 오죽 어려웠겠는가.

조선시대 강화유수로 부임해 1년 정도 있다 다시 요직으로 발탁돼 돌아간 관리가 있다. 그는 강화도 부속 섬들을 멀다하지 않고 구석구석 방문해 그 내용을 글로 남겼는데, 바로 이민서(李敏敍, 1633~1688)이다.

이민서는 전주 이 씨로 세종의 아들 밀성군(密城君) 이침(李琛)의 후손이며, 아버지는 영의정을 지낸 이경여(李敬輿), 장인은 좌의정을 지낸 원두표(元斗杓)로 화려한 가문 출신이다. 게다가 1650년 18세에 사마시에 합격하고 1652년 20세에 증광별시 문과에 급제해 관직에 입문했다. 전형적인 문벌가문에 똑똑한 인재였다.

그 이후 요직을 지낸 이민서가 강화유수가 된 때는 1683년(숙종 9) 6월이다. 그의 나이 51세였다. 불과 1년 뒤인 1684년 6월 대제학이 됐는데, 그는 1년 동안 강화도에 관한 많은 기록을 남겼다. 이민서는 당시 뱃길로 험했을 주요섬들을 천혜의 요새라고 여기고 주문도ㆍ아차도ㆍ볼음도ㆍ장봉도 등을 직접 가보고 시를 남겼다. 남아 있는 시는 이 섬들에 대한 것이지만 실제로는 그 근처 섬들도 모두 돌아본 것으로 보인다.

그는 강화유수로 부임하고 두 달여 뒤 올린 강도의 제치(制置)에 대해 논한 상소에서는 강도를 어떻게 해야 잘 방비할 수 있으며 목장을 옮기는 것이 급선무임을 강조하고 말을 먹일 것을 생각할 게 아니라 백성을 먼저 생각해야 한다는 것을 잊지 않았다. 대사헌에 임명된 후 그 직을 사직하며 강도 지도를 덧붙여 올리는 상소에서는 여러 섬을 직접 다니면서 지리와 형편을 더욱 상세하게 알게 됐기에 화공에게 지형을 그리게 해서 올렸다는 내용이 보인다.

불과 1년 정도 강화유수를 하면서 이민서는 강화도 부속 섬들을 직접 찾아다니며 지형과 형세를 살펴보았다. 물론 강화도를 천혜의 보장처로 인식해 방비를 더욱 견고하게 하기 위함이기도 하지만, 백성의 삶 또한 윤택하게 해줬다. 김노진이 편찬한 ‘강화부지 명환(名宦)’에서는 이민서가 여러 섬을 돌며 백성의 어려움을 살피고 잘 다스려 칭송이 자자했으며, 임기를 끝내게 되자 백성들이 수레에 매달려 차마 보내지 못하고 그를 사당에 모셔놓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지금도 배를 타고 섬을 가는 것이 쉽지 않은데 조선시대에 무동력 배를 타고 여러 섬을 다닌 이민서를 떠올려보니, 이것이 바로 위정자의 태도가 아닐까 생각한다. 조선시대나 지금이나 위정자가 할 일은 솔선수범해 가장 험하고, 멀고, 낮은 곳을 찾아가 실정을 살피고, 개선 대책을 마련해 백성이 더 잘 살 수 있는 세상을 만드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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