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읽기] 자신의 목소리를 낸다는 것
[영화읽기] 자신의 목소리를 낸다는 것
  • 이영주 시민기자
  • 승인 2019.10.28 09: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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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년생 김지영(KIM JI-YOUNG, BORN 1982)│김도영 감독│2019년 개봉

[인천투데이] 결혼과 출산 이후 다니던 광고회사를 그만두고 전업주부가 된 지영(정유미). 반복되는 가사노동과 육아에 지치기도 하지만 자상한 남편 대현(공유)과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사랑스러운 딸이 있고, 명절이면 꽉 막히는 도로를 뚫고 어쩔 수 없이 불편하고 서운할 수밖에 없는 시댁에 가야하는 며느리이기도 하지만 언제나 지영을 응원하는 원가족들이 있어 그나마 위안이 되는, 평범한 30대 기혼여성이다.

너무 평범해서 별 일 없어 보이는 지영에게 위기가 닥친다. 불현듯 다른 사람이 빙의된 것처럼 행동하고는 그 일을 까맣게 잊어버리길 여러 차례. 대현은 아내가 걱정돼 정신과 의사를 찾아가보지만 정작 지영에게는 지영의 이상행동을 털어놓지 못하고 걱정 어린 눈빛으로 안부만 묻고, 그때마다 지영은 ‘괜찮다’며 웃어 보인다.

‘82년생 김지영’은 2016년 발표된 동명 소설이 원작인 영화다. 원작이 100만부 넘게 팔린 베스트셀러인 데다가 젊은 여성 연예인들의 SNS 인증과 그에 달린 악플로 유명해진 작품이고, 영화로 만들어진다는 뉴스에 영화가 개봉하기도 전에 포털사이트에서 별점 테러를 당해야했던, 이미 화제성 만발인 영화다.

솔직히 영화를 보기 전까지는 걱정이 앞섰다. 원작 소설이 대한민국 여성의 현실을 매우 사실적으로 표현하고 있긴 하나 영화로 만들만큼 서사와 캐릭터의 매력이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더구나 워낙 화제가 된 원작이다 보니 영화는 그저 시류에 편승한 장삿속이 아닐까 의심이 들기도 했다.

그러나 김도영 감독이 연출을 맡았다는 소식에 약간은 안도했다. 김도영 감독은 배우로서 사실적인 여성 캐릭터를 연기해온 데다가 작년에는 ‘자유연기’라는 단편영화로 여성 서사 연출에 탁월한 재능이 있음을 보여줬으니까. ‘자유연기’를 워낙 좋아한 터라 김도영 감독의 장편 연출은 어떤 모습일까 기대감까지 생겼다.

실제 뚜껑을 열어 보니 원작 소설보다 영화가 더 좋았다. 일종의 ‘대한민국 여성현실 보고서’와 같았던 원작 소설과 달리 주인공 지영과 남편 대현, 그리고 지영의 주변 인물들까지 캐릭터가 풍부하게 살아 있다. 원작이 실재하는 통계수치로 지영의 현실을 독자에게 설득해 많은 여성의 공감을 얻었다면, 영화는 캐릭터와 서사로 더 큰 울림을 전한다.

소설처럼 수치로 전할 수 없는 현실은 지영과 형제자매들, 동료들의 에피소드로 풀어냈다. 어린 시절부터 집안에서 경험한 남동생과 은근한 차별, 늦은 밤 무작정 쫓아오는 또래 남학생으로부터 느낀 두려움, 성별에 따른 직장 내 역할 제한, 여자 화장실에 설치된 몰래카메라 사건 등 결혼, 육아뿐만 아니라 전 생애에 걸쳐 여성이 경험하는 억울함과 불편함이 자연스럽게 녹아 있다. 원작이 있는 영화 중 각색 잘한 영화로 손꼽을 만하다.

결국 자신의 증세를 알게 된 지영은 정신과 의사를 만나 상담을 받으며 조금씩 자신을 찾아간다. ‘괜찮다’는 말 아래 묻어뒀던 억울함과 분노가 결국 지영이 다른 사람으로 빙의되는 정신분열로 나타났다면, 치료법은 ‘자신의 목소리를 내는 것’일 테다. 다른 사람들도 다 비슷하게 사는데 자신만 이상해졌다며 낙담하는 지영을 보고 전혀 이상하지 않다며 다독이는 의사의 위로는 단지 지영에게만 보내는 메시지가 아니다. 자신을 ‘맘충’이라 폄하하는 이에게 비로소 자기 목소리로 항의하는 지영을 보며 관객들이 울컥하게 되는 이유다.

영화 ‘82년생 김지영’에는 오로지 악하기만 한 캐릭터는 한 명도 등장하지 않는다. 남편 대현은 평균 이상의 선함과 자상함을 가지고 있고, 어릴 때 아들딸을 차별하긴 했지만 아버지도, ‘시’어머니이니 어쩔 수 없는 한계는 있지만 심지어 시어머니마저도, 수준 낮은 농담을 하는 남자 동료들도, 따지고 보면 그렇게까지 악하지는 않다. 오히려 이 영화에는 대체적으로 선한 이가 차고 넘친다. 그런데도 지영은 처절하게 무너졌다. 가부장제의 억압은 나쁜 남성 개인의 일탈이 아니라 구조적 문제이기 때문이다. 대현의 착함은 구조 앞에 무력하기만 하다.

스스로 나 정도면 착한 남자라고, 그래서 잠재적 가해자 취급당하는 게 억울하다고 생각했던 남성이라면 공유에게 감정이입하며 꼭 보기를 권한다. 공유마저 안 괜찮게 만드는 게 바로 가부장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