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우범의 사라진 도시를 찾아서 <54> 에블라와 우가리트의 점토판 기록

[인천투데이] 인류 문명사에서 최고의 발명은 무엇일까. 그것은 다름 아닌 문자일 것이다. 문자로 인류가 축적해온 지식을 공유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문자가 없었다면 지식 대중화는 불가능했고 나아가 진일보한 문명 창조 역시 어려웠을 것이다. 역사상 수없이 많은 민족이 각자 필요한 언어를 만들었다. 하지만 문자로 발전한 것은 훨씬 적다. 그리고 그 문자들은 오랜 세월이 흐르는 동안 대부분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많은 문자가 사라졌듯이 많은 역사가 사라졌다. 문자 소멸은 곧 역사 소멸을 의미한다. 무엇보다 기록될 수 없었기 때문일 터이지만, 기록된 것이라도 해독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기록된 문자는 유효한 역사다. 발견되지 못하고 해독되지 못했을 따름이다. 그러므로 역사는 쉼 없이 진행되는 한편, 끊임없이 발굴되는 것이기도 하다.

에블라 유적지 전경.

시리아 제2의 도시 알레포에서 남서쪽으로 50㎞를 넘게 달린다. 기원전 2500년경 번성했던 고대 도시 에블라 유적지를 찾아간다. 황량한 벌판의 강렬한 폭염은 모든 자연물을 무채색으로 만들어놓는다. 보이는 것은 모두 회색이고 은색이다. 선글라스가 없으면 세상은 온통 흰색이 될 듯하다. 에블라 유적지는 허허벌판 야트막한 구릉에서 온몸으로 폭염을 관조하며 이방인을 맞이한다.

에블라는 고대 근동(=대체로 현재 중동에 해당하는 지역) 3대 문화권인 이집트ㆍ메소포타미아ㆍ히타이트 제국 가운데 있던 왕국이다. 메소포타미아 지역은 유프라테스 강을 따라 상류의 마리와 에마르를 지나 지중해 해안지대와 아나톨리아 지역과 교역했다. 광물ㆍ직물ㆍ목재 등을 수입했는데, 에블라는 지정학적 위치로 인해 국제교역 중심지였다. 이로써 막대한 부를 축적한 에블라 왕국은 문화 중심지 역할도 담당했다. 많은 민족이 왕래한 까닭에 다양한 신이 존재했는데, 그 수가 450개에 달한다.

에블라 유적지의 도서관 터.
에블라에서 발굴한 유적들.

에블라 유적은 20세기 최대 고고학 발굴의 하나로 꼽힌다. 그 이유는 고대 중근동 아시아 상황을 이해할 수 있는 유물들이 발굴됐기 때문이다. 왕궁 문서 창고에서 쐐기문자로 기록한 점토판 1만5000개는 당시 서아시아 정치ㆍ경제ㆍ문화ㆍ외교 등을 이해하는 데 많은 정보를 제공했다. 특히 이 점토판에 적힌 지명과 인물은 구약성서를 해석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이러한 점토판이 5000년 가까이 어떻게 훼손되지 않고 보존된 것일까.

기원전 2250년경, 에블라는 정치적ㆍ상업적 경쟁상대인 마리 왕국과 벌인 전쟁에서 승리한다. 그리고 주변국에서 조공을 받으며 화살촉과 같은 전쟁무기를 수출한다. 이에 위협을 느낀 아카드 왕조의 나람신 왕이 에블라를 점령하고 불태워버린다. 이때 왕궁 문서 창고에 있던 점토판 문서가 뜨거운 열기로 단단하게 굳어지면서 사실상 도자기로 구워져 지금까지 보존될 수 있었다. 에블라 왕국은 한 줌의 재가 되는 불행을 당했지만 그로인해 오히려 더 위대하게 세상에 알려진 것이다.

우가리트 유적지 입구.

에블라와 가까운 거리에 있는 해안도시 라타키아에도 기원전 2000년경 도시국가인 우가리트 유적이 있다. 이곳은 에블라 왕국의 항구도시 역할을 했다. 마을 농부가 밭을 갈다가 묻혀있는 석관을 발견한 것이 계기가 돼 알려진 우가리트는 현재까지 80년간 발굴했음에도 전체의 4분의 1정도만 알려졌다. 이것만으로도 고대인의 생활상을 충분히 엿볼 수 있다.

당시 은화를 화폐로 사용했는데, 은화 1제켈은 약 16.4그램이었다. 3500년 전 사람들의 생활은 어떠했을까. 여왕 아하트밀쿠는 보석으로 만든 귀걸이 4세트, 금반지와 금팔찌 세트, 황금 트로피와 황금 벨트, 다양한 색상의 비단 옷, 고급스런 디자인과 색상의 망토와 코트, 상아 장식 침대 3세트, 금으로 장식된 의자, 동으로 만든 횃불, 화장품 20세트 등을 사용했다.

야시나루라는 중년 신사는 아들이 없자 일쿠야를 입양했다. 그리고 왕에게 맹세했다. ‘일쿠야를 양아들로 맞이해 정성껏 키울 것입니다. 특별한 사유가 없이는 절대 이 서약을 파기하지 않으며, 만약 파기할 경우에는 은화 100제켈을 지급하겠습니다’라고. 일쿠야도 맹세했다. ‘양아버지를 평생 공경하고 잘 모시겠으며, 만약 양아버지가 싫어 떠날 경우는 빈손으로 나가겠습니다’라고. 자신의 영달을 목적으로 하지 않았으니 요즘보다 더 모범적인 계약이라고 할 수 있다.

우가리트 유적지 전경.

높이가 20m 정도 되는 언덕에 오르자, 직선도로를 중심으로 수많은 유적이 널려있다. 방 90개가 달린 왕궁, 대형 응접실과 연회장, 관공서, 수로와 우물, 물이나 포도주를 보관했을 돌항아리 등이 보인다. 제일 높은 곳에는 신전 두 개가 있는데, 바알신과 그의 아버지 다간신을 모신 곳이다. 이 유적지는 19세기까지 잘 보존해오다가 20세기 프랑스 침입 때 대형 화재로 2층 대부분이 소실됐다. 특히, 이곳 우가리트 유적지가 중요한 것은 이곳에서 최초의 알파벳이 발굴된 까닭이다. 이곳 도서관 터에서 발견한 페니키아 문자가 현재 전 세계적으로 사용하고 있는 알파벳의 기원으로 알려졌다.

우가리트에서 나온 점토판.

이곳에서 발굴된 쐐기문자는 기존 쐐기문자들과 달랐다. 즉, 고대 언어가 하나의 뜻을 갖는 표의문자였던 것과는 다르게 자모 28개 체계를 갖춘 것이었다. 이는 당시 많은 민족과 언어가 사용된 관계로 국제적으로 공용될 수 있는 표음기호를 만들 필요가 있었음을 알려주는 증거이기도 하다. 우가리트 알파벳은 이후 후손인 페니키아인들에게 전해지고 페니키아인들이 그리스와 유럽에 전달함으로써 오늘의 알파벳으로 발전할 수 있었다. 그리고 전 세계의 지식을 소통시키는 제1의 언어가 됐다.

※ 허우범은 실크로드와 중앙아시아 곳곳에 있는 역사 유적지를 찾아가 역사적 사실을 추적, 기록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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