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방(東紡)을 항일의 거점으로!
전보현 한창희 한태열

[인천투데이] 인천의 노동운동에 관심 있는 사람이라면 ‘동방(東紡)’이란 말을 들어봤을 것이다. 1930년대 동양방적(東洋紡績)으로 시작해 1950년대 동일방직(東一紡織)으로 이어지며 일제강점기와 1970년대 노동운동의 상징이 된 공장이다. 국적과 시간을 달리한 회사였으나, 공장 터와 노동자의 처지는 같았다. 다른 이름의 두 회사를 줄이면 모두 ‘동방’이 되니 우연이라기엔 기이하다.

전보현(1935년 촬영).

1935년 4월 4일, 경기도 경찰부장은 조선총독부 경무국장 등에게 ‘인천 적색(赤色)그룹 사건 검거에 관한 건’이란 비밀 보고 문서를 보낸다. 이 문서를 보면, 1930년대 신화적인 사회주의자 이재유(李載裕) 그룹의 사건을 수사하던 중 관계자인 이인행이 인천의 공장 활동을 위해 인천 활동가를 접촉했다는 진술을 했고, 이 진술을 토대로 관련자를 수사해 ‘별개의 비밀결사가 존재하며 상당히 과감하게 운동을 전개하고 있다는 단서’를 찾게 됐다고 한다.

일제 경찰은 이 비밀결사가 ‘인천적색그룹’이라며 계통도를 그렸는데, ‘권영태→김근배→전보현(田甫鉉)’으로 이어지는 지도선을 중심으로 그 산하에 객우친목회ㆍ안양그룹ㆍ동양방적그룹ㆍ독서회를 뒀다고 봤다. 아울러 이른바 ‘프로핀테른’의 지도를 받는 ‘범태평양노동조합(태노)’의 지역 결사라는 의미로 ‘태노계’란 표현을 썼다.

여기에 1915년 전후에 태어난 인천 청년들이 주축으로 참여했다. 그 중에 몇 사람의 얼굴을 국사편찬위원회의 ‘일제감시대상 인물카드’에서 볼 수 있다. 이 그룹의 지도부 격인 ‘적색위원회’에는 전보현과 한창희(韓昌喜), 한태열(韓泰烈) 등의 이름이 나온다.

전보현은 인천지역 책임자로 추정되는데, 1914년 5월 8일생이니 1935년 체포 당시 20대 초반이었다. 본적과 출생지는 인천부 화평리(花平里) 213번지이고, 주소는 인천부 신정(新町) 54번지다. 키는 160cm 남짓이다. 인천공립보통학교 5년 수료 후 사이토(齊?) 합명회사 인천출장소 급사, 동양방적공장 임시 인부로 생활하던 중 1932년 11월경부터 윤기홍ㆍ심만택과 알게 돼 공산주의 사상에 공감했다고 한다.

1933년 봄부터 실천운동에 나섰고, 1934년 1월경동양방적 직원 한창희를 알게 돼 함께 활동하기로 했으며 1934년 4월 중순부터 같은 해 8월 상순까지 한창희ㆍ박영선 등과 두 사람의 집이나 인천 동공원(東公園, 현재의 인천여상) 등에서 여러 차례 만나 일본제국주의 절대 반대, 전조선 노동자ㆍ농민 해방, 일본제국주의 아래서 신음하는 식민지 조선 무산계급에 대한 계급의식 교양ㆍ훈련 등을 강령으로 삼는 ‘인천적색그룹’이란 이름의 비밀결사를 결성했다고 한다. 한창희 인물카드는 모두 세 장 있는데, 1916년 5월 27일생으로 본적ㆍ출생지ㆍ주소 모두 인천부 신화수리(新花水里) 310번지다. 키는 160cm가량이라는 기록과 172.5cm라는 기록이 있다.

한창희(1936.5.2. 복사, 1935.3.22. 촬영, 1935. 촬영 추정)

1930년 3월 인천공립보통학교 졸업 후 같은 해 4월에 인천남상업학교에 입학했는데, 1년 만에 중퇴하고 일본 오사카 미나토구(港區)의 요시하라(吉原) 얼음상점에 배달부로 취직했다고 한다. 1931년 8월 중순부터는 동양방적 인천공장에서 일했는데, 1933년 12월에 전보현을 알게 되고, 전보현의 지도에 감명을 받아 항일과 노동운동에 적극적으로 나섰다고 한다.

그 뒤 1935년 1월 중순 이후 동양방적 동료인 한동수ㆍ박윤식ㆍ강치안ㆍ박화옥ㆍ이기창ㆍ조경호ㆍ김영묵 등과 해안통 중화루 부근 중국 빵집에 모여 동양방적 내 적색위원회란 비밀결사를 구성해 적극 투쟁하기로 하고, 같은 해 2월 하순까지 인천관측소 뒷산, 수도국 뒷산 등에서 여러 차례 만나 비밀결사의 부문과 책임자를 결정했다고 한다. 이때 한창희는 자금부 책임을 맡았는데, 동양방적 적색위원회 구성 역시 전보현과 협의한 결과로 추정된다.

한창희의 행적은 해방 뒤에도 확인되는데, <독립> 1946년 5월 22일 기사를 보면, 1946년 4월 14일 열린 서울 민주주의민족전선 결성 대회 제2일차에 상임위원 150명 중 한 명으로 선임됐다. <자유신문> 1949년 11월 8일자에는 영등포구 국민보도연맹에 좌익인사 200여 명이 자수했는데, 이때 전 민주주의민족전선 영등포위원장으로서 자수했다. 이로 보아 해방 전후에 서울로 옮겨 활동한 것으로 보이는데, 구체적 이유는 물론 자수 이후 생사를 확인할 수 있는 자료는 없다.

한태열(1936.5.2. 복사, 1935.4.5. 촬영)

한태열은 1914년 1월 30일생으로 본적과 주소는 인천부 사정(寺町) 25번지, 출생지는 함경남도 원산이다. 체포 당시 직업은 없었으며, 키는 170cm 전후다. 인천박문보통학교 출신으로 1929년 4월 휘문고등보통학교에 입학했다가 1933년 7월 4학년으로 중퇴했다. 그해 12월경 전보현과 알게 돼 서적 ‘프롤레타리아 정치학 입문’과 ‘사회주의 리얼리즘’ 등을 빌힌 것을 계기로 좌경사상에 흥미를 갖게 됐고, 전보현의 지도 아래 항일운동에 나섰다고 한다.

한태열은 인천적색그룹 적색위원회의 한 명으로 독서회를 지도하는 역할을 맡았으며 자신이 독서회 구성원이기도 했다. 한창희와 함께 직접 동방 노동자들과 활동한 사람으로 추정되며, 전보현의 지도를 받은 것으로 보인다.

이들은 1935년 3월 이후 각각 체포돼 오랜 기간 구금상태에서 조사를 받았다. 최종 판결은 체포 후 1년 가까이 된 1936년 3월 17일에 내려졌다. 전보현은 징역 2년 6월, 한창희는 징역 2년에 집행유예 4년, 한태열은 징역 1년 6월에 집행유예 3년을 받았다.

조선중앙일보 1936.3.18. 기사

이 사건은 몇 가지 측면에서 문제가 있다. 관련자들이 혐의 일체를 부인한 건 그럴 수 있다지만, 일제 경찰의 보고 문서에서 전보현과 한창희가 만난 시점을 다르게 기술한다든지, 최초 피기소자 중에 상당수는 무죄로 풀려난다든지 하는 것을 보아 실제로 비밀결사가 존재한 것인지, 일제 경찰이 무리한 수사로 엮어낸 사건이었는지 더 살펴봐야한다.

다만 1930년대 중반 인천에서 전보현을 중심으로 해서 한창희ㆍ한태열 등 20대 초반 청년들이 동방 노동자들과 함께 일본제국주의 반대와 노동자 생존권 쟁취를 목표로 저마다 방식으로 항일투쟁에 나선 것만은 분명하다.

/김락기 인천문화재단 인천역사문화센터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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