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우은실 문학평론가

[인천투데이] 얼마 전 서울국제작가축제(SIWF)의 한 프로그램에서 ‘여성’의 시선으로 세계를 보고 글을 쓴다는 것에 대해서 들을 기회가 있었다. 초대된 작가들의 대화에서 그들이 타자화된 ‘여성’이 아닌 인간 보편을 지향하는 발화를 하고 싶다고 이해했다. 마땅하다고 생각한 한편, ‘인간보편’을 지향하기 위해 개개인이 지닌 특수성이나 정체성, 자의식을 소거하고 말하지 않을 수 없겠다고도 생각했다.

한 작가가 ‘글 쓰는 노동자’라고 말했던 것을 기억한다. 그 작가는 소설 한 구절을 낭독하고 당신이 거쳐 온 세월을 떠올리며 ‘40대(당시) 여성이 글을 쓴다는 것’에 대해 이야기했다. 발화의 맥락을 고려하면 ‘글 쓰는 노동자’와 ‘글쓰는 (40대) 여성’은 의미상 큰 차이가 없는 듯 보인다. 그러나 ‘글 쓰는 노동자 여성’을 지칭하는 표현이 자기 자신의 대사회적ㆍ내부적 구성요소에 따라 달리, 즉 ‘글을 쓰는 40대 여성’으로도 표현된다는 사실을 오래 생각하게 했다.

노동의 장(場)에 인간이 모두 능력과 실력에 따라 공정하게 진입할 수 있어야한다는 사회적 약속과 실제로 그렇게 실행돼왔는가 따져보는 일은 별개다. 어떤 노동에 대해서는 젠더적 전제가 수용돼있기 때문에 특정 성(性)이 어떤 노동의 장에 진입하는 것을 암묵적으로 거부해왔을 가능성은 없을까? 사적 영역과 공적 영역의 구분에 이분법적 위계질서를 구조화해 어떤 노동의 영역을 판단하는 데 특정 성(性)이 불리하게 판단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나아가 ‘특별한 성(性)’이 특수화돼야하는 것이 정당한 걸까?

최근 공기업 채용 비리 사건을 떠올린다. 서울메트로에서 무기계약직을 공개 채용하는 과정에서 여성 지원자의 점수를 고의로 조정해 합격권 여성 다수를 탈락시켰다는 사실이 알려졌다. 채용 관계자는 여성의 체력적 조건을 문제 삼고(‘여성이 하기 힘든 일’의 의미는 과연 무엇인가?), 현장이 여성을 수용할 만한 조건이 되지 않는다는 이유로(현장이 여성을 받아들일 조건을 갖추지 못했다는 것이 의미하는 바를 물어야하는 게 아닐까?) 점수 하향 조정을 지시했다고 밝혀진 바 있다. 체력적 조건이 뒷받침돼야 한다고 말하는 경우, 언뜻 성별의 생래적 차이에 의해 정당한 이유처럼 느껴지지만(일부 영역에서는 부분적으로 사실이겠으나) 본질적으로는 그렇지 않을 수 있다. 노동의 성격과 무관하게 ‘체력적 조건’이라는 근거가 제출됨으로써 일군의 사람이 채용에서 불리한 위치에 놓이는 경우가 적지 않다. 가령 ‘주방’은 오랫동안 여성의 영역으로 맥락화돼 왔음에도 직업인 요리사의 직위를 두고는 체력적 차이에 따른 고용 성차가 자연스럽다고 말하곤 한다. 그러나 요리 노동에 필요한 ‘체력적 조건’의 문제이기 전에 당사자의 실력을 보증하는 것으로서 임금을 부여하는 ‘요리사’라는 지위에 대해 젠더적 인정 차원의 문제이지는 않은가.

누가 노동을 수행하느냐에 따라 누군가는 자신의 ‘노동의 정합성’을 스스로 증명하기를 요구받는다. 특정 성(性)이 노동의 장에 진입할 때, 누군가는 요구받지 않기도 하는 ‘여성이 이 일을 수행할 수 있고 해야만 하는, 더 근본적으로 당신의 노동에 임금을 지불해야하는 이유를 설득하라’는 요청을 받는 것도 같다. 이로써 젠더화된 노동의 가능성을 살피게 될 때 그 다음에 해야 하는 것은 여성임을 지우지 않고도 노동의 장에 공정하게 진입할 수 있어야한다는 것이다.

 

저작권자 © 인천투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