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지개책방 23. 탈코르셋
무지개책방 23. 탈코르셋
  • 심혜진 시민기자
  • 승인 2019.10.17 09: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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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투데이 심혜진 시민기자] 지난해 겨울이었다. 인터뷰하러 만난 이가 내게 대뜸 “촌스럽다”고 했다. 내 외모를 두고 한 말이었다. ‘이런 말을 대놓고 하다니.’ 우린 고작 세 시간 전에 처음 만났을 뿐인데, 낯선 이에게 이런 말을 아무렇지 않게 건넬 정도로 내 상태가 심각한가. 나는 집으로 가는 전철 안에서 유리창에 비친 내 모습을 자꾸 쳐다봤다. 아무 특색 없는 남색 점퍼, 질끈 묶은 머리, 비비크림만 발라 주름과 잡티가 그대로 드러난 얼굴, 무색의 립밤만 바른 허연 입술, 무겁고 어두운색 옷과 어울리지 않는 주황색 러닝화…. 몇 년째 같은 모습으로 아무렇지 않게 다녔으면서도 그날따라 내 모습이 초라하게 느껴졌다.

며칠 후 나는 옷가게에서 코트와 밝은 색 스웨터를 샀다. 화장품 가게에서 얼굴 잡티를 가릴 시시(CC)크림과 눈매를 또렷하고 커 보이게 해줄 아이라이너 연필, 눈두덩이에 색을 더할 아이섀도, 눈썹 그리는 연필, 눈썹 다듬는 칼, 그리고 볼터치와 붓 등 화장품 15만 원어치를 ‘질렀다’. 십몇 년 만에 화장품을 샀다고 친구에게 자랑했더니, 친구는 내가 알아듣지 못할 화장품 목록을 줄줄이 읊으며 그건 많이 산 것도 아니라 한다. 내가 산 건 기본 중의 기본이라나. 아, 내가 몰라도 너무 모르고 살았구나.

사실 나도 20대엔 화장을 하고 굽 높은 구두를 신었다. 서른을 앞두고 직장을 관두면서 화장할 이유가 없어졌다. 처음엔 색조 화장이, 다음으로 파운데이션이, 맨마지막으로 아이라인이 얼굴에서 사라졌다. 나는 점점 ‘예쁜’ 것보다는 편한 길을 택했다.

다시 화장을 하면서 화사해진 내 얼굴이 좋았다. 정말 젊고 ‘예뻐진’ 듯했다. 그런데 화장을 하는 데 시간이 너무 많이 걸렸다. 어딜 나갈라치면 최소 한 시간 전부턴 준비해야했다. 그리고 집에 와 화장을 지울 때면 공들인 게 아까웠고, 또다시 화장하기가 번거롭다는 생각이 마음에서 올라왔다. 그럴 때마다 “촌스럽다”던 말을 떠올리며 흐트러지려는 마음을 다잡았다.

화장과 ‘밀당’을 이어가던 지난여름, 한 글쓰기 모임에서 20대 여성을 알게 됐다. 그는 언제나 짧은 커트 머리에 화장을 전혀 하지 않고 주로 면티나 남방셔츠를 입고 강의실에 오곤 했다. 그저 취향이라고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그건 완벽한 연출이었다.

초등학교 교사인 그는 1학년 아이들이 벌써 화장을 한다는 걸 알고 깜짝 놀랐다. 그는 “여자아이들이 팩트형 톤업 썬 쿠션을 두드리고 빨간 립밤을 바르는 광경을 보고 큰 죄책감에 시달렸다”고 했다. 아이들이 어른 흉내를 내는 게 보기 싫었던 건 아니다. 아직 자아정체감을 갖기 전인 이 아이들이 화장하는 이유는 뭘까. 예뻐지기 위해서? 남자아이들에 비해 유독 ‘여자’아이들만 예뻐야하는 이유가 있을까? 그리고 ‘예쁨’의 기준은 뭘까…. 그는 혼란스러웠다.

문득, 아이들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니 ‘잘살아 가는 듯한 성인 여성’의 모습은 하나같이 화장을 하고 ‘예쁜’ 옷을 입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물론 그 속엔 교사인 자기 자신도 포함돼있었다.

그는 아이들에게 ‘꾸밈 노동’을 대물림하고 있었다는 부채감을 느꼈다. 꾸미지 않은 여성도 잘 산다는 것을 아이들에게 보여줘야겠다고 결심했다.

여자라면 누구나 세상이 정해놓은 기준대로 외모를 가꿔야하는, 그 단 한 가지 길만 있는 것이 아님을 몸소 보여주고 싶었던 것이다. 그는 곧바로 긴 머리를 숏커트로 자르고 화장품을 모두 버렸다. 머리 짧은 여자, 화장 안 한 여자, ‘투박한’ 옷을 입은 여자로 교단에 섰다. 갑작스런 변화에 어색해하는 아이들에겐 성별에 따라 외모가 달라야할 이유는 없음을 차근차근 설명했다. 변화는 아이들에게도 찾아왔다. “빨강은 여자, 파랑은 남자”라던 아이들이 “색깔 좋아하는 데 여자, 남자가 어딨어”라는 말을 하고 있었다. 그는 가슴 벅찬 기분을 느꼈다.

그는 자신의 행위를 ‘탈코르셋’이라 했다. 탈코르셋은 작년 초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서 10~20대 사이에 퍼진 ‘여성을 억압하는 꾸밈으로부터 벗어나는 상태’를 추구하는 운동이다. 나는 탈코르셋에 관심을 갖고 책을 읽기 시작했다. 내가 ‘촌스러움’이란 말을 듣고 마음이 상했던 이유도 알 것 같았다. 그건 외모에 대한 억압이었고 사회에서 정해놓은 ‘여성성’의 기준에 도달하지 못했다는 질책이었다. 생각해보니, 있는 그대로의 내 외모엔 아무 죄가 없었다. 잘못은 억압이고 사회적 기준이었다.

한편으론 나 역시 ‘여성성’의 틀에서 벗어나길 두려워하고 있다는 걸 알았다. 늘 머리 손질을 번거로워하면서도 태어나 단 한 번도 단발보다 머리를 짧게 자른 적이 없었다. 어차피 화장은 안 하고 다니니 머리카락을 잘라볼까. 용기가 날 것도, 후회할 것도 같았다. 하지만 결국 난 잘랐다. 미용사의 만류에 귀밑머리를 조금 남겼지만, 난생처음 가벼워진 머리를 보니 낯설기도 하고 시원하기도 하다. 막상 자르고 나니 별것도 아닌데 왜 그렇게 망설인 건지 멋쩍은 웃음도 난다. 어쩐지 머리카락 길이가 점점 짧아질 거 같은 예감도 든다. 내게 커트머리를 선물한 탈코르셋 관련 책 세 권을 소개한다.

# 나는 예쁘지 않습니다 | 배리나 지음 | 북로그컴퍼니

‘못난’ 외모에 쏟아지는 다른 사람의 차가운 시선이 싫어 구석으로 숨기만 하던 한 여성이 있었다. 그는 살기 위해 화장을 하다 “어디서 그런 용기가 났는지” 유튜브에 메이크업 영상을 올리고 ‘뷰티 유튜버’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네가 무슨 화장이냐’는 비아냥과 악성 댓글도 ‘쿨’하게 받아넘겼다. 그러던 지난해 여름, 그는 또 한 번 영상으로 세상을 발칵 뒤집어 놓았다.

‘나는 예쁘지 않습니다’라는 자막과 내레이션으로 시작하는 이 영상은 여느 때처럼 ‘생얼’로 시작한다. 컬러렌즈-선크림-톤업용 베이스-다크서클을 가리는 코렉터-파운데이션-눈썹연필-아이섀도-아이라인-인조속눈썹-블러셔(볼터치)-눈 밑 아이섀도-마스카라-립스틱 순서로 화장하는 것까진 평소와 다름없다. 그런데 화장한 얼굴로 그는 묻는다. “왜 나는 화장을 취미로 삼았을까? 화장은 내 기분을 좋게 했고 화장은 내 구원자 같았는데, 덕분에 자신감이 살아났다고 생각했는데, 만약 이것이 내가 주체적으로 선택한 게 아니라면?”(51쪽) 그는 그 자리에서 한참을 공들여 완성한 화장을 말끔하게 지운다. 그는 생각했다. “지금까지 너무도 많은 시간을 외모 때문에 스스로를 낮추고 자존감을 갉아먹느라 낭비해 왔다고. (중략) 절대, 절대 외모 때문에 나 스스로를 깎아내리지 말자고. 이제는 좀 더 나를 사랑해주자고.”(63쪽)

‘나는 예쁘지 않습니다’는 같은 제목의 유튜브 영상을 올린 배리나 씨가 펴낸 책이다. 영상의 주요 장면을 일러스트와 글로 재구성한 책의 앞부분은 그의 거듭된 변화를 시각적이고 명확한 메시지로 전달한다. 처음 ‘풀메이크업’을 하고는 “신세계가 열린 것처럼 황홀”(152쪽)했던 그는 하루 두 시간씩 “밥 먹는 시간, 잠자는 시간을 줄여가며”(154쪽) 화장을 했다. 그러나 화장을 지우면 “거울 속에 원래의 ‘못난’ 내 얼굴”(155쪽)이 드러났다.

그는 고백한다. “화장 솜씨가 좋아져서 화장 전후의 차이가 커질수록 자괴감 역시 깊어”(155쪽)졌다고. 이후 ‘강남역 살인사건’으로 페미니즘에 관심이 생긴 그는 성차별과 여성혐오에 대해서도 생각했다. “왜 남자들은 편하게 다녀도 아무도 뭐라 하지 않아? 왜 다들 아무렇지 않게 여자들 외모를 비하하지?”(165쪽) 그는 탈코르셋 운동을 접하고 ‘나는 예쁘지 않습니다’ 영상을 만들어 올린다. 초등학생부터 성인까지 누가 읽어도 공감과 깨달음을 얻을 수 있는 책. 탈코르셋을 이해하기 위한 첫 책으로 적합하다.

# 외모 왜뭐 | 경진주 외 7인 지음 | 북센스 펴냄

‘여자가 화장은 해야지’ ‘여자가 안경을 쓴다고?’ ‘여자가 50kg가 넘는다니!’와 같은 언어폭력에 이어 숨도 못 쉬는 작은 교복과 말도 안 되는 학칙 등 셀 수 없이 많은 코르셋이 여성들을 옥죈다.

‘외모 왜뭐’는 화장ㆍ다이어트ㆍ미디어ㆍ사이즈 등 여러 형태로 여성을 옥죄는 코르셋의 유형과 그 아래 숨은 의도를 이해하기 쉽게 정리한 페미니즘 입문서다.

사회가 강요하는 이중 잣대와 편견 속에서 힘들어하는 10~20대를 위한 탈코르셋 이야기 여덟 가지를 담았다. ‘화장을 공부하게 하는 사회’ ‘노브라는 안 돼, 그렇다고 티내지도 마’ ‘내 몸은 나를 위해서’ ‘‘소녀’를 팝니다’ ‘월경을 월경이라 부르지도 못하고’ ‘용모단정女 구합니다’ 등 목차만으로도 메시지가 전달되는 책. 쉬운 문장, 큼지막한 글씨로 부담 없이 읽을 수 있지만, 함의하는 내용은 절대 가볍지 않다.

# 탈코르셋 : 도래한 상상 | 이민경 지음 | 한겨레출판 펴냄

‘탈코르셋 : 도래한 상상’은 탈코르셋의 방향성과 운동의 궤적을 충실하게 담은 책이다. 저자인 이민경은 탈코르셋을 행동으로 옮긴 여러 여성을 만나 인터뷰한 내용을 책에 옮기고 페미니즘 연구자의 입장에서 이를 분석, 전달한다.

저자는 “여성으로 하여금 꾸미지 않고서 외모 평가를 듣느니 귀찮더라도 꾸민 상태를 차라리 편하게 여기도록 만드는” 사회적 ‘규범’을 꼬집으며 “그렇게 여성은 스스로를 규범적 여성성에 순응시키게 된다"고 해석한다. 결국 “탈코르셋 운동에서 여성 개인이 사회적 변화를 이루기 위해 감내하는 불편함의 정체란 규범적 여성성에서 이탈했을 때 주어지는 처벌”(62쪽)이다. 그래서 이 운동의 궁극적 목적은 “꾸미지 않아 느끼는 일상의 편안함이 아니라 여성성이라는 규범으로부터의 이탈”(72쪽)이라 설명한다. 현재를 살아가는 20대 여성들의 현실과 탈코르셋 운동의 개념을 명확히 이해할 수 있는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