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일투사에서 좌익 활동가로 인천에 이름을 남긴 또 한 사람
심만택

[인천투데이] 1936년 9월 10일, 지금은 인천 남동구 수산동인 남동면 발산리 288번지 최춘문(崔春文)의 집에 인천경찰서 형사들이 들이닥쳤다. 집안을 뒤져 좌익서적을 찾아냈고, 21세 청년 최춘문은 꼼짝없이 연행됐다.

‘어린이에게 불온사상 고취, 인천야학교사 사건’이란 <매일신보> 1936년 9월 23일 기사 제목처럼 자신이 교사로 근무하던 발산리 농촌진흥회 부설 야학교에서 빈부격차 문제 등을 14세 이하 어린이에게 가르친 혐의였다.

부친이 규모 있는 자작농으로 중류층 이상의 생활을 했고, 최춘문을 야학교사로 추천해 채용한 사람이 남동면장이었다니, 당국으로서도 곤혹스런 사건이었으리라. 그래서인지 처음에는 한 청년의 ‘일탈’처럼 보도됐다. 하지만 일제 경찰은 달리 보았다. 당시 인천경찰서에서 작성해 경기도 경찰부와 법원 등에 제출한 문서를 보면, 경찰이 주시한 한 인물이 최춘문을 ‘선동’한 사건이었다.

6남매의 장남으로 1930년 부천공립보통학교(현 문학초등학교)를 졸업하고 1931년 4월 야간으로 운영된 인천공립상업보습학교에 입학한 최춘문은 화평리 82번지에서 하숙하며 낮에는 삼신기선(森信汽船) 급사로 일했고, 밤에는 학교를 다녔다. 1933년 졸업 후 1년 정도 인천공립청년훈련소를 다녔고, 이후 집으로 돌아와 농업에 종사하며 야학 교사로 일했다.

하숙을 시작한 1931년 봄에 근처에 살던 한 사람을 알게 됐고, 이듬해 7월에는 그가 건네 준 ‘레닌과 간디’를 탐독했다. 1932년 10월에는 동인천역 인근 야시장에서 스스로 ‘무산계급 문학론’과 ‘시험관 속의 사회주의’ 등의 책을 사서 읽기도 했다.

한동안 끊겼던 만남은 1935년 8월 중순에 그 사람이 최춘문의 야학을 방문하면서 재개됐다. 그 만남 이후 최춘문이 야학 학생들에게 세 차례에 걸쳐 빈부격차가 없는 러시아를 소개하며 공산주의를 선동했고, 같은 해 10월 20일과 11월 야학 개설 1주년 기념 축하식에서는 간도의 조선농민이 약간의 빚 때문에 중국인 지주에게 구타당하고 딸 2명을 납치당한 것을 조선인 소작인들이 습격해 데려오는 연극을 공연해 참석자 100여 명에게 큰 감동을 주었다는 것이 사건 개요다.

일제감시대상 인물카드의 심만택(1934년 5월 28일 촬영).
대중일보 1949년 11월 26일 심만택 재판 기사.

최춘문의 배후로 일제 경찰이 지목한 사람은 심만택(沈萬澤)이다. 1910년생으로 본적과 주소가 모두 지금의 동구 화수동인 신화수리(新花水里)다. 국사편찬위원회에서 ‘소화사상통제사자료(昭和思想統制史資料)’를 정리해 제공한 자료에 보면, 본명이 심경원(沈敬元)으로 경성고보 2년을 중퇴했고, 일본 오사카에서 유학하다가 중도 귀국했다.

아마도 10대 후반 학창시절에 사회주의 사상을 수용해 실천 활동에 나선 인물이 아닐까 싶은데, 신문 기사에는 1931년부터 행적이 드러난다. <매일신보> 1931년 2월 4일 기사에는 인천청년동맹 화평리반에서 임시대회를 열 계획이었는데, 인천경찰서에서 내용이 불온한 안내문을 허가 없이 배포했다며 집회를 금지하고 안내문 작성에 관련한 인물 두 명을 소환했다고 한다. 이때 소환된 두 명 중 한 명이 인천청년동맹 집행위원 심만택이다.

만보산 사건 영향으로 인천에서 일어난 화교 배척 사건 와중에 조선인의 분노를 화교에서 일본인으로 돌리려는 ‘음모’가 발각됐다면서 체포한 인물 중에 심경원이 있는데, 심만택의 본명이다.

당시 경찰은 1931년 7월 10일 신간회의 곽상훈, 인천노동조합의 권충일, 인천청년동맹의 이창식 등 단체 간부를 시작으로 7월 12일까지 지역 인사 16명을 검거했다. 심만택도 이 과정에서 체포됐다. 무혐의로 석방된 다른 이들과 달리 7월 21일에 권충일, 권평근, 김성규 등과 함께 경성지방법원 검사국에 송치됐고, 그날 오후 1시 6분 동인천역 출발 열차로 호송돼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됐다.

같은 해 10월 26일 열린 재판에서 다른 이들이 징역형을 받고 수감된 것과 달리, 심만택은 징역 6월에 집행유예 4년을 받고 석방됐다. 애초에 경찰이 무리하게 사건을 엮었기 때문이다. 심만택의 혐의는 7월 6일에 인천에서 기차를 타고 황해도 한포역으로 가는 도중 오후 6시 10분께 기차가 금교역에 도착했을 때 동승한 승객들이 만보산 사건에 관해 이야기하는 것을 듣고 ‘만보산 사건과 같은 중국인의 조선인 압박을 근본적으로 해결하기 위해서는 일본제국주의를 타도해야한다’고 말했다는 것이 전부다. 이른바 ‘치안 방해’다.

석방된 심만택의 활동은 1935년 4월 전보현(田甫鉉) 등이 인천 동양방적을 중심으로 노동운동에 나선 이른바 ‘인천적색그룹’ 사건 조사 과정에서 드러난다. 이 사건의 지도자인 전보현이 사회주의 사상을 갖게 된 계기가 1932년 무렵부터 심만택과 교유라는 것이다. 20대 초ㆍ중반을 주로 인천청년동맹과 인천노동조합을 중심으로 활동하면서 자신의 신념을 주변에 적극 전파하려고 노력한 인물로 보인다.

최춘문 관련 문서에는 1935년 9월 23일부터 중국 천진(天津)의 일본 조계에서 생활했고 1936년 3월에는 부인 김도순(金道順)도 천진으로 불렀다는 것으로 보아, 1930년대 후반에는 중국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다만 중국 생활이 언제까지 이어졌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해방 후 심만택은 인천에서 ‘민주주의 민족전선’(민전)의 관계자로 활동했다. 1947년 2월 14일 <대중일보> 기사에는 민전 인천시위원회에서 구성한 3ㆍ1운동 기념 준비위원회 총무 담당으로 나오고, 같은 신문 1948년 4월 11일 기사에는 4월 9일 지명수배 중이던 심만택이 평택에서 체포돼 인천경찰서로 송치됐다고 했는데, 이때는 민전 인천시위원회 서기국장이었다.

1949년 심만택은 인천을 발칵 뒤집어 놓았다. 1949년 9월 15일 경기도 경찰국장이 기자회견을 열어 인천의 대표적 부호(富豪) 중 7명이 남로당에 자금을 지원했다고 발표했는데, 이 사건의 주동자로 심만택이 지목돼 재판에서 징역 10년의 중형을 선고받았다. 진실은 알 수 없지만, 돈을 낸 부자들이 무죄인 것으로 보아 당시 재판에서는 심만택의 강요에 따른 지원으로 판단한 것 같다. 판결 이후 심만택이 어떻게 됐는지는 알 수 없다.

일제강점기에는 치열한 항일운동가였고, 해방 후 펼쳐진 남북 분단과 좌우 대립의 과정에서는 좌익에서 활동했다. 인천뿐만 아니라 국내 항일운동가 중 이런 사람이 적지 않으므로 특별하다고는 할 수 없다. 분단이 가져온 비극이 투영된 삶이라고도 할 수 있다. 해방 후 심만택의 입장을 옹호할 수 없지만 기록이라는 점에서는 가볍게 지나칠 수 없는 인물이다.

/김락기 인천문화재단 인천역사문화센터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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