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연이 있는 클래식]강렬하고 거칠지만 청중을 감동시키는 경이로움
[사연이 있는 클래식]강렬하고 거칠지만 청중을 감동시키는 경이로움
  • 문하연 시민기자
  • 승인 2019.09.30 1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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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하연 시민기자의 '사연이 있는 클래식'
루트비히 판 베토벤 (중편)
젊은 베토벤.(1804년경)
젊은 베토벤.(1804년경)

[인천투데이 문하연 시민기자] 1787년 베토벤의 첫 번째 오스트리아 빈 방문은 짧게 이뤄졌다. 모친이 위독하다는 소식을 듣고 다시 돌아가야 했기 때문이다. 빈에서 체류는 2주 정도로 짧았지만, 이때 모차르트로부터 수업을 받았다. 모차르트는 베토벤의 연주를 듣고 탄복한 것은 사실이나, 베토벤의 연주가 거칠고 자신이 추구하는 연주에 비해 상대적으로 덜 우아하다고 느꼈다. 그래서인지 베토벤 대신 보헤미아의 신동 네포무크 훔멜을 제자로 받아들여 무상으로 가르쳤고 그의 첫 번째 음악회를 지원하기도 했다. 이후 빈 사람들은 모차르트의 제자인 ‘훔멜’파와 베토벤의 제자인 ‘체르니’파로 나뉜다.

연인 엘레노오레

아버지는 심한 알코올 중독으로 가정을 돌보지 못했기에 어머니가 사망하자 베토벤은 실질적으로 가족 생계를 책임져야했다. 어려운 가운데에도 베토벤은 그를 돌봐주는 사람들이 있어 이 시기를 무사히 넘길 수 있었는데, 대표적으로 헬레네 폰 브로이닝이 그랬다. 헬레네는 젊은 나이에 남편을 잃고 혼자 아이 넷을 키우는 재력가로 베토벤을 양자 대하듯 했다. 예술에 식견이 풍부한 그녀의 집은 문화살롱이 돼 많은 예술가의 모임 장소가 됐고, 베토벤은 그곳에서 피아노를 연주하며 살롱의 품격을 높였다.

베토벤은 헬레네의 큰딸 엘레노오레에게 피아노를 가르쳤는데, 둘은 서로 호감을 품었다. 그 마음을 확인한 엘레노오레가 적극적으로 다가가자 베토벤은 한 걸음 물러났다. 다가가는 그녀, 도망가는 베토벤. 베토벤은 그녀를 연인으로 받아들이지는 못했다.

하지만 자신의 행동에 대해 수차례 그녀에게 편지를 보내 용서를 빌었으며 관계를 유지하고자 노력했다. 그리고 당시 그가 만든 곡 ‘피아노와 바이올린을 위한 론도’와 ‘오르피카를 위한 알레그로’ 등을 헌정했으며, 그의 유일한 오페라 피델리오에서 그녀를 주인공으로 등장시켰다. 결국, 엘레노오레는 베토벤의 평생 친구인 베겔러와 결혼했고, 베토벤은 그녀의 그림을 평생 간직했다.

베토벤의 이런 행동에 관해 한스 요제프 이르멘은 “베토벤이 자신을 자유로운 예술가로 규정하고 있기 때문이며, 베토벤은 자신의 예술적 사명이 해를 입게 될까봐 두려워했고 그래서 여성과 관계가 진행되면 그 관계를 정리하려했다”고 설명한다.

이후 베토벤은 베겔러와 편지를 주고받을 때마다 그녀에 대한 뜨거운 마음을 드러냈다. “친애하는 자네 부인에게 내 키스와 포옹을 보내네.” 또 다른 편지에는 “나는 자네의 로르헨(엘레노오레)에 대해 생생한 기억을 갖고 있다네. 지금도 너무나 그립네. 젊은 시절 그녀는 내게 너무나도 충심으로 대했다네.”

이건 또 무슨 심리일까. 베겔러의 염장을 지르는 것도 아니고. 어쨌든 이런 편지에 흔들림 없이 우정을 유지한 것을 보면 베겔러는 대인배임이 틀림없다.

빈의 피아노 경연

1792년 11월, 베토벤은 발트슈타인 백작의 소개장과 하이든에게 배우기 위한 초청장을 들고 빈에 다시 도착했다. 모차르트는 그 전 해에 사망했기 때문에 더는 볼 수 없었다. 발트슈타인 백작의 인맥에는 글루크ㆍ하이든ㆍ모차르트 등이 음악가로 발전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 가문들이 포진하고 있었다.

발트슈타인이 본을 떠나는 베토벤에게 써준 것을 보면, “천재 모차르트의 수호 여신은 제자의 죽음을 애도하며 울고 있소. 그녀는 지칠 줄 모르는 하이든에게서 쉴 곳을 찾기는 했지만 그를 차지하지는 못했다오. 그를 통해 그녀는 누군가 다른 사람과 일체가 되기를 원하오. 근면하게 노력한다면 그대는 하이든의 손을 통해 모차르트의 정신을 받게 될 것이오.” 그의 예언은 예상보다 빨리 실현됐다.

빈에서 베토벤의 명성은 쉽게 퍼졌다. 그의 연주는 이전 비르투오소(전문 연주자)들의 섬세한 스타일과 반대로 강렬하고 거칠었지만, 사람들이 감동하는 포인트를 알았다. 베토벤의 제자인 카를 체르니는 그의 연주를 이렇게 묘사했다.

‘어떤 집단을 만나든 간에 그는 모든 청중이 눈물을 글썽이게 만들지 못할 때가 별로 없었고, 많은 사람이 큰 소리로 흐느껴 울게 만들 수 있었다. 그의 악상과 그것들을 표현해내는 영감어린 스타일이 가지는 아름다움이나 독창성뿐만 아니라 그의 표현에는 무언가 경이로운 것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종류의 즉흥연주를 마치고 나면 그는 크게 웃음을 터트리며 자기가 청중에게서 일으킨 감정에 잠긴 청중을 놀리곤 했다. “당신들은 바보야! 누가 이런 응석받이 애들 속에서 살 수 있겠어.”’

당시 빈에는 내로라하는 피아니스트가 다수 포진해 있었다. 각자가 후원하거나 지지하는 피아니스트끼리 적대감이 형성되고 최고를 가리기 위한 피아노 경연이 수시로 열렸다. 베토벤 역시 그런 경연을 당연히 여기고 참가했으며, 엘레노오레에게 보낸 편지에 “빈 피아니스트들은 나의 적이니, 맹세코 그들에게 굴욕을 안기겠다”라고 승부욕을 드러냈다.

1790년 빈에는 요한 네포무크 훔멜, 뵐플과 크라머, 다니엘 슈타이벨트 등을 포함한 피아니스트가 무려 300여 명 있었으니, 이 경연이 얼마나 치열했는지 마치 원형 경기장에서 벌어지는 야수들의 싸움처럼 묘사되기도 했다.

베토벤의 스승들

빈에 도착한 베토벤은 약 14개월 동안 하이든으로부터 음악수업을 받았다. 베토벤은 기대와 달리 하이든의 느슨한 수업방식이 자신의 발전에 무관심으로 느껴져 실망스러웠다. 게다가 6개월이 지나도록 1종 대위법을 끝내지 못하자, 하이든 몰래 요한 솅크를 찾아가 그에게서 개인지도를 받는다. 솅크는 이런 사실을 알고 그를 제자로 받으며 “내가 수정해준 연습문제를 모두 새로 베껴 하이든이 낯선 필체를 알아보지 못하게 하라”고 권했다. 물론 이런 이론을 잘 가르친다는 것이 음악적으로 더 훌륭하다는 것은 아니다. 어쨌든 거장인 하이든은 그런 세세한 것보다 더 큰 틀을 보여줬으며, 베토벤은 하이든의 음악을 보고 듣고 배우면서 그를 음악적 모델로 삼아 모든 음악적 가르침을 흡수했다.

베토벤에게 또 다른 스승이 있다는 것을 모르는 하이든은 베토벤에게 작품 표지에 ‘하이든의 제자’라고 표기하기를 부탁했으나, 베토벤은 “나는 하이든에게서 배운 것이 하나도 없다”라고 경멸하며 거절했다. 당시 대부분의 제자는 그런 의미의 문구를 집어넣었다.

그래도 하이든은 그에게 애정을 가지고 그를 여러 후원자에게 소개했으며, 베토벤이 경제적으로 곤란을 겪자 500플로린을 빌려주기도 했다. 하지만 베토벤이 빌린 돈 500플로린을 갚지 못하자, 본에 있는 베토벤의 후견인 선제후 ‘막시밀리안 프란츠’에게 베토벤의 후원금을 올려달라는 편지를 간곡하게 쓴다. 하이든은 편지에 베토벤이 빈에 온 후 만든 곡을 동봉했다. 그가 시간을 헛되이 쓰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함이었는데, 여기에 반전이 기다리고 있었다.

하이든은 베토벤이 선제후로부터 받는 돈 500플로린은 부족하니 1000플로린으로 올려달라고 간청했다. 하지만 본으로부터 온 선제후의 편지에는 그가 받은 곡 중에 ‘푸가’를 제외하고 모두 본에서 작곡한 것이며, 베토벤에게 지급한 돈이 500플로린이 아니라 900플로린이었다고 했다. 베토벤은 이미 본에서 만든 곡을 빈에서 새로 만들었다고 하이든을 속인 것이고, 돈 문제도 마찬가지였다. 이를 계기로 하이든은 베토벤과 함께 런던을 가려던 계획을 접고 그를 다른 작곡자인 요한 게오르크 알브레히츠베르거에게 소개해준다.

하이든이 런던으로 떠나자, 새로운 스승을 맞이한 베토벤은 이 스승과도 갈등을 빚는다. 그리고 영화 ‘아마데우스’에서 모차르트의 숙적으로 나오는 안토니오 살리에리도 베토벤을 가르쳤는데, 그와도 갈등을 겪었다. 베토벤은 스승이든 그 누구든 자신의 음악을 비판하거나 조언하는 것을 모욕으로 받아들였고, 특히 모욕에 민감하게 반응했다. 스승 세 명은 공통적으로 베토벤을 높게 평가했지만, “항상 고집불통이고 자기 방식대로 밀고 나가는 바람에 어려움을 겪었다”고 말했다.

스승 하이든과 화해

런던에서 돌아온 하이든은 베토벤을 용서한다. 다시 그를 가르치고 작품에 조언했으며, 1795년 황궁 소무도회장에서 열린 하이든 연주회에 그를 초대해 유일하게 소개한다. 이에 대한 보답으로 베토벤은 다음해 피아노 소나타 세 곡을 하이든에게 헌정했으며, 하이든을 주제로 공개적인 즉흥연주를 했다.

말년의 하이든은 자신을 찾아오지 않는 제자 베토벤에 대해 “그래, 우리 무굴대왕은 어떻게 지내고 있는가?”라고 그를 찾아온 측근에게 물어보며 보고 싶어 했다. 이즈음 베토벤은 하이든이 인정하지 않는 자기만의 길을 깨닫고 그 사이에서 스승에게 죄책감을 느꼈다. 이 죄책감으로 인해 그는 인간적인 끈을 놓으려했다.

1808년에 하이든 76세 생일 기념 연주회가 열렸는데, 베토벤은 하이든 앞에 무릎을 꿇고 연로한 스승의 손과 이마에 열정적으로 키스했다. 베토벤은 하이든이 죽은 뒤 이전의 괴로운 감정에서 벗어나 하이든에게 무한한 찬양과 애정을 표현했다.(다음 편에 계속)

[참고서적] 베토벤(얀 카이에르스, 홍은정, 도서출판길) / 루트비히 판 베토벤(메이너드 솔로몬, 김병화, 한길아트)

※ 이 글은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